15학년도 1학기 작은 전시회 3
이 말이 어렵다면 아래에 인용한 글을 읽어보도록 하자.
1. “내 아이는 문제가 없어요.”
2. “내 아이는 착해요.”
3. “내 아이는 공부를 잘해요.”
나는 문제가 있는 아이들보다 이런 아이들이 나중에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고 본다.
1. 문제가 없었기로 앞으로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자살하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남에게 별 문제를 안 일으킨다. 다만 자신에게 단 한 번 문제를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2. 착하기로 끝없이 불만이 쌓인다. 하고 싶은 말을 참고, 하고 싶은 행동을 참고, 자신의 욕망을 끝없이 유예하는 아이, 그 아이의 내면은 갈가리 찢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3. 판검사들이 공부를 못했나? 기자들이 공부를 못했나?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의사들이 공부를 못했나? 고위관료들이 공부를 못했나? 대기업임원들이 공부를 못했나? 대학교수가 공부를 못했나? (‘일반’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공부를 잘 한다는 말은 부모, 선생으로부터 ‘칭찬(인정욕구)’을 듣는 방법을 안다는 말이고, 시키는 대로 잘 따른다는 말이고, 자신(만족)을 위해 인내한다는 말이고, 나중에는 결국 체제(권력에)가 요구(기여)하는 모범적인(?) 인간이 된다는 말이다. 당신이 변화시키고자 하는 체제의 부속품이 되기 십상이라는 말이다. 좀 무섭지(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문제없는 내 아이가 문제다’, 카페헤세이티 Facebook 글, 2015년 7월 26일
이 글을 읽으면 무언가 필이 팍하니 올 것이다. 물론 이 글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네’라며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오해를 덜기 위해 위의 이야기를 좀 더 풀어보기로 하자.
우리 사회에선 모범생과 문제아를 가차 없이 구분하고 있다. 어른의 기준에 철저히 맞춰, 체제에 철저히 순응하는 경우 모범생이라 칭하며 대우해주는데 반해, 어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천방지축 날 뛸 경우 문제아라 낙인찍고 온갖 불이익을 다 준다. 나 또한 그런 사회에서 지금껏 자라왔기 때문에 모범생에 대한 환상(뭐든 잘 할 것이다, 인성이 바를 것이다)이 있었던 게 사실이고, 문제아에 대해서는 편견(성격이 지랄 맞을 것이다, 할 줄 아는 게 없을 것이다)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니 당연히 모범생인 아이들에겐 매너 있게 대하고 뭔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 거란 관념 때문에 그들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묻게 되었고, 문제아인 아이들에겐 좀 더 거칠게 다루고 말을 듣기도 전에 내 의사대로 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니, 그건 환상일 뿐임을 알 수 있었다. 모범생이지만 오히려 사회적인 시선이나 인간관계에선 젬병인 경우를 충분히 볼 수 있었으며, 문제아지만 억압적인 분위기만 아니면 오히려 주도적으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경우도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모범생이냐 문제아냐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 없는 더 큰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소위 모범생이란 것은 활발발한 자신의 생채리듬을 꺾고 어른들의 기대수준에 맞추기 위해 감정을 거세한 것이었다. 아이지만 아이가 아닌 어른인 척하려 무진 애쓰고 있다는 뜻이다. 흔히 ‘애어른’이란 단어로 불리듯, 자신의 감정보다는 타인의 감정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시선보다 사회의 시선을 먼저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니 어른들이 보기엔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게 맘에 들 수밖에 없고, 그러니 온갖 칭찬을 퍼붓게 되고, 아이는 그런 어른들의 칭찬에 한껏 고조되어 더욱 어른을 흉내 내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감정은 감출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만이 쌓’이게 되고 ‘내면은 갈가리 찢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아이다움을 축복으로, 청소년이 청소년다움을 축복으로 여길 수 있도록 생각을 바꿔야겠다고 맘먹었다. 청소년 시기를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로 표현하듯, 그 나이 때 정체성의 혼란을 느껴 맘껏 방황하고 반항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걸 ‘정신 못 차렸다’고 나무랄 일이 아니라, 그 시기를 온전히 겪어내며 맘껏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도록 주위에서 가만히 지켜볼 일이다. 민석이를 보면서 누구에게나 때가 있다는 생각과 함께, 어른의 기준이 아닌 그 나이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깨달음을 준 민석이에게 ‘아즘찬이 또 아즘찬이 아즘찬이구만요’라는 말을 하고 싶다.
연습이 끝나고 이제 곧 학부모님들이 오실 시간이 되었다. 부엌은 분주하다. 학부모님들에게 대접할 간식을 만들고 차를 대접하기 위해 물을 끓인다. 아이들의 역할은 세 파트로 나누었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파트, 학교 앞에서 학부모님에게 인사를 건네고 안내를 하는 파트, 학교로 들어온 부모님에게 전시회를 볼 수 있도록 안내해 드리고, 서빙을 담당하는 파트로 말이다.
한 분씩 학부모님이 오실 때마다 아이들도 바빠지기 시작했고, 덩달아 학교에는 활기가 넘쳐났다. 학습발표회는 공연을 보는 것이기에 정숙한 분위기라고 한다면, 작은 전시회는 축제 분위기라고나 할까. 모두 기뻐하는 표정이 보기 좋았고 아이들도 나름 자부심이 있어 보였다. 특히나 자신이 한 학기 동안 만든 작품을 부모님에게 소개해줄 땐 아이들의 억양에서 뿌듯함이 묻어났다. 꼭 예술가들이 전시회를 열고 자신의 작품을 지인들에게 성의껏 설명해줄 때 내뿜어 나오는 열기 같다고나 할까. 특히나 재익 어머님은 재익이의 그림실력을 보고 깜짝 놀라셨다고 전해주며 예전엔 그림을 곧잘 그렸다고 알려주셨다. 그림을 관람하는 시간은 어떤 시간 못지않게 여기저기 웃음이 넘쳐났으며, 아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모님들의 마음이 충분히 느껴졌다.
아이들이 그린 작품을 보고 있노라니, 예술작품으로 자신을 맘껏 표현할 수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나도 중고등학생 때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만화책을 똑같이 그려보기도 하고 뭔가 여러 가지 표현을 하려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소질이 없는 것을 알고,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남에게 보여주기에 창피하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그리지 않게 되었다.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누군가에게 평가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다 보니, 드러내지 않게 된 것이다. 더욱이 어른이 되어갈 수록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누군가에겐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감추고 아닌 척하기에 바빴다. 감추고 아닌 척하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맘껏 이런 저런 재료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부럽기도 했고, 이 아이들은 나 같은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어리기도 했다.
현세 엄마가 좀 늦는 바람에 6시 20분쯤 되어서야 아카펠라 공연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아카펠라 공연을 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아이들은 누군가 앞에 서서 공연을 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누군가 앞에서 하는 공연이기에 잘 해야만 한다는 부담이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어설픈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좀 더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게 사람이니 말이다. 더욱이 부모님 앞이라면 더욱 잘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처음엔 아카펠라를 하네, 마네를 가지고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초이쌤이 좀 색다른 방법을 제안했다. 지금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선 복면을 쓰고 노래 부르는 프로가 있는데, 그것을 착안하여 아이들은 연극팀 교실에서 노래를 부르고 부모님들은 거실에서 듣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그러자 아이들은 초반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공연을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복면가왕’은 이미지가 주는 선입견을 걷고 음악에만 집중하여 노래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는 컨셉인데 반해, ‘옆방아카펠라’는 모습을 보이기 쑥스러우니 목소리만이라도 들어주세요라는 컨셉이었다. 같은 듯 다른 컨셉으로 ‘옆방아카펠라’ 진행되었다.
그런데 막상 6시 20분에 아카펠라 공연을 할 시간이 되자, 서로 간에 어떤 이야기들이 있었는지 부모님들 앞에서 공연을 하겠다고 컨셉을 바꿨다. 이왕 할 바에야 제대로 하자는 의견이 나온 것인지, 아니면 어떤 큰 손에 의한 것인지 모르지만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바뀐 컨셉 때문에 걱정스런 부분이 있었다. 바로 ‘재익이가 과연 무대에 설 수 있을까?’하는 부분 말이다. 아이들은 모두 무대에 서 있었지만, 재익이는 2층 화장실에서 내려오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재익이는 뭔가 못마땅한 게 있거나, 자기만의 공간에 있고 싶을 때 화장실을 애용하곤 한다. 재익이에겐 화장실이 피난처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버티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날 재익이는 무대를 피하지 않았다. 시간을 거의 끌지 않고 바로 내려와 무대에 선 것이다. 그 순간 안도의 한숨이 나옴과 동시에, 모든 학생이 서있는 무대가 더욱 꽉 차 보였다.
아카펠라 공연은 모두 하나가 되는 시간이었다. 상현이도 그 자리에 서서 최선을 다하여 함께 무대를 만들어 갔고, 재익이는 평소에 자신이 드러나는 걸 싫어하지만 공연에 있어서만큼은 화음을 맞추며 자신의 파트를 소화했으며, 민석이는 리더로 사회자역할(“공연 연습이 부족하여 많이 어설플 수는 있지만, 그래도 많이 응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을 도맡아 하며 분위기를 이끌었고, 현세는 타고난 노래실력으로 노래에 힘을 보탰으며, 특히 지민이는 무대 공포증이 있음에도 ‘섬집아기’의 솔로부분을 천상의 목소리로 완벽하게 소화하여 감탄을 자아냈다. 아이들 하나하나의 작은 소리가 모여 하나의 화음을 이루는 것을 듣는 것도 재밌는 일이었지만, 학부모님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었다. 원래 공연이란 게 무대에 서는 사람과 객석의 사람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가는 종합예술인데, 이 날 공연도 공연자와 관중이 하나로 뒤엉켜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뜨거운 무대였다.
공연이 끝난 후 진심어린 박수가 여기저기 흘러나왔고, 나 또한 아이들의 공연을 보면서 감동했다. 서로 껴안고 박수치고 환호하며 한껏 성공적인 공연을 함께 축하했다. 일전에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 필요하다’는 얘길 한 적이 있는데, 이 날 밤이 바로 그 얘기처럼 뿌듯함이 느껴지던 순간이었고, 그 힘으로 내일은 좀 더 힘차게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2015년 1학기의 마지막 밤은 뿌듯함을 물씬 느끼며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목차
기록으로 낚아 챈 시간과 기억으로 남긴 시간
작은 전시회는 뭐예요?
전시회를 준비하는 손길들, 말길들
교육의 핵심은 ‘어떻게 성숙한 인간으로 만드는가?’ 하는 것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른의 시선이 문제일 수 있다
문제없는 내 아이가 문제다
어른의 시선이 아닌, 그 사람의 시선으로
작은 전시회, 큰 기쁨의 전시회
아카펠라 공연, 한 학기의 성장을 그대로 보여준 특급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