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 17 - 15.10.5(월)
어제 숙소에 들어와 인터뷰를 끝내고 나니 9시 30분쯤 되었다. 아이들은 대충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티비를 보며 장난을 치면서 놀고 있다. 어찌나 시끄럽게 떠들며 놀던지, 내가 다 긴장될 정도였다. 그나마 여긴 한적한 곳이라 숙박객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다. 아이들에겐 11시엔 모두 다 잠을 자야 한다고 말했다.
아침마다 기상미션을 하고 있다. 시간을 정해두고 그 시간이 되기 전에 나오는 순서에 따라 점수를 주는 것이다. 도보여행 땐 이게 그나마 잘 먹혀 누가 ‘준비해라’, ‘일찍 나와라’ 등등 재촉하는 말을 하지 않아도 점수를 따기 위해 일찍 나왔었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당연히 ‘기상미션’을 넣었다.
우린 7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다. 오늘 달려야 할 거리가 자그만치 88.06km나 되었기에 일찍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오늘부턴 미션을 하기 위해 중간에 들르는 곳도 있기 때문에 늦장 피우면 피울수록 어제처럼 야밤에 달리는 경우까지 생기게 된다. 어제 모이는 시간을 공지했을 때, 현세는 “그럼 7시 15분엔 나가야 겠네요”라는 말을 했던 터라, 나도 그 말에 따라 일찍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7시 10분부터 나와서 기다린다. 아침은 언제나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시작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다. 날씨도 좋으니 오늘 여행은 무난할 거 같은 기대감도 어린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가고 있다. 약속 시간이었던 30분이 넘어가고 45분이 되도록 누구 하나 나올 생각을 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빨리 서둘러야 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늦어진 만큼 함께 그 시간을 감내해야 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고, 이미 다 큰 아이들에게 시간을 재촉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47분이 되니 현세가 나왔고, 민석이는 55분에, 재익이는 8시 10분에, 준영이는 20분에 나왔다.
이로써 모두 상점은 못 받게 되었지만, 여행 둘째 날 시작부터 이렇게 늦는다는 것에 실망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아이들 중 한 명도 시간을 맞춰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아침은 기분 좋게 시작했는데, 이런 상황을 겪고 보니 절로 힘이 빠진다.
어제 예고했다시피 오늘부터 ‘리더미션’이 진행되는 날이다. 오늘의 리더는 김민석이다. 하긴 어제는 리더 미션이 없었음에도 민석이가 지도를 검색하여 아이들을 이끌었으니, 오늘도 잘 할 거라고 생각했다.
민석이는 중1 때부터 단재학교를 다녔으니, 막내에서 어느덧 최고참이 된 케이스라 할 수 있다(민석이 소개 보기). 작년 도보여행 때까지도 위로는 승빈이가 있었기 때문에 리더로서의 자질을 뽐낼 기회는 없었다. 그저 이끌어주는 대로 따라가고, 챙겨주는 대로 챙김을 받을 뿐이었다. 더욱이 2013년엔 단재학교의 회장이기도 했는데, 부회장인 이향이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주고 서기 역할을 도맡아 했을 정도였으니, 길게 말한들 입만 아프다.
그런데 선배들이 프로젝트에서 빠지며 최고 선배가 되자 여러 부분에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챙겨주기 시작했으며, 책임감을 가지고 이끌려 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활동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두각을 나타낸 경우는 작년 전주영화제 때, 영화를 만들기 위해 진두지휘를 하던 모습이다. 물론 그 때 가장 열심히 하려 했던 사람은 현세(물고기방에 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열정을 불살랐다)였지만, 막상 영화를 찍는 것으로 컨셉이 정해지자 민석이가 진두지휘하게 되었다. 재익이와 상현이가 카메라를 잡고 찍을 수 있도록 구도 조정을 해줬으며, 현세에게 어떤 연기를 해야 하는지 연기지도를 해줬으니 말이다. 그렇게 탄생한 영화가 바로 『현세의 꿈』이란 영화다. 그래도 2012년에 『다름에의 강요』와 『영원한 사랑』이라는 영화를 찍어본 경험이 있기에, 이 때도 그런 경험을 기반 삼아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두 번째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학기 작은 전시회를 위해 아카펠라 연습을 시킬 때였다. 단재학교 학생 모두를 이끌어야 하고 하나된 목소리로 연습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대단히 어려운 일었는데, 민석이는 차분히 주위를 정돈하고 연습을 순조롭게 진행했던 것이다. 민석이가 가장 돋보이던 순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세 번째는 광진청소년센터와 중독 관련 영화를 만들며 감독으로 활동할 때였다. 감독이면서도 배우의 역할을 동시에 하다 보니 힘이 들 수밖에 없고 ‘왜 나만 고생해야 해?’라는 불만이 생길만도 한데, 전혀 그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작품을 만들었다. 더욱이 초보 감독인 현세의 작품까지 챙겨주면서 말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사람의 성장이란 어느 한 순간으로 못 박고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석이를 보더라도 4년이란 시간을 함께 볼 때, 비로소 어떻게 사람이 성장해 가는지 보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 말은 곧 가장 기본적인 얘기라 할 수 있는 ‘배움(교육)은 시간상의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를 다시 확인 시켜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래에 인용한 글을 읽어보면 왜 그러한지 명확해진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곧바로 판정을 내려주기 때문에 비즈니스는 재미있습니다. 즉, 옳은 일을 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성공했기 때문에 옳은 것이죠. 그래서 비즈니스 세계에서 투자부터 그 성패 판정까지의 시간은 가능한 한 짧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시간은 돈’이니까. 시간은 돈이라는 말은 시간을 화폐로 치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단적으로 그만큼 ‘돈이 든다’는 것이지요. 신제품을 만들었는데 시장이 곧바로 반응하지 않을 때, ‘언젠가 팔리지 않을까?’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팔리지 않는 상품의 생산라인을 유지하며 노동자에게 월급을 주고 재고를 늘리는 것은 ‘손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 제가 앞에서 교육은 타성이 강한 제도라고 말한 것은, 교육은 자판을 누르고 나서 문자가 표시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시스템이라는 뜻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교육은 공들인 것과는 다른 모양새로 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 되돌아오는 시스템입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자판을 두드리면 화면에 문자가 뜨는 게 아니라 사흘 후에 그림엽서가 도착한다든지 삼 년 뒤 호박을 두 개 받게 된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흐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사를 춤추게 하라』, 우치다 타츠루, 민들레 출판사, pp 31~32
교육을 비즈니스의 논리로 생각하는 게 만연되어 있다. ‘투입에 따른 산출’의 공식으로 교육을 대하기에, ‘아이에게 얼마만큼의 교육적 투자를 하느냐가 산출물의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를 학원에 뺑뺑이 돌리거나, 쉴 틈 없이 공부만 시키는 것이다. 투입되었기에 곧바로 산출물로 나올 것을 기대하며 그렇게 채찍질 한다.
그렇다면 교육의 산출물이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시험 성적이고, 입시 성적이다. 학교에서 매 학기마다 정기적인 시험은 2번, 비정기적인 시험은 3번 정도를 보게 되어 있다. 그걸 통해 부모들은 ‘투자-산출’을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원하는 산출물이 나오지 않을 땐 ‘그 학원은 별로인가 봐. 다른 곳을 찾아봐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최근엔 사교육의 정보력을 틀어쥐고 학부모들을 좌지우지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학부모를 ‘돼지엄마’라 표현하는 신조어까지 등장함). 우치다쌤이 이야기하는 ‘비즈니스 세계’에 대한 설명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신자유주의란 ‘자율경쟁이란 환상 속에 경쟁을 부추기는 것’을 말한다. 누구 할 것 없이 대등한 상태,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경쟁하면 그에 따라 효율도 올라가고 개인역량도 증대될 거라 생각하는 체제다. 하지만 실상 완벽하게 대등한 상태, 대등한 관계란 존재하지 않고 각자가 지닌 정보량, 자본량, 문화자본량이 다르기에 경쟁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무한경쟁체제를 만들어 학생에겐 맹목적으로 ‘열심히 공부해 그래야 살아’라고 살인적인 경쟁에 밀어 넣으며, 직장인에겐 ‘열심히 자기계발해 그렇지 않으면 잘려’라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경쟁에 밀어 넣는다. 신자유주의가 급격하게 사회 전반으로 파고들며, ‘교육을 비즈니스의 논리’로 접근하는 사태는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하지만 민석이의 경우만 보더라도 교육은 절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순간순간의 결과물을 중심으로 민석이를 본다면, 어디에서도 ‘교육적 효과’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어딘가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있고, 못마땅한 구석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걸 전체적인 흐름에서 본다면 그 변화의 양상은 뚜렷하다. 즉 ‘사흘 후에 그림엽서가 도착한다든지 삼 년 뒤 호박 두 개 받게 된다든지’하는 식의 ‘도통 알 수 없는 흐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럼 민석이는 완벽한 인격체가 된 거야?’라는 착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커 가는 과정 속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담은 것이지, 그게 완벽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담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민석이는 여전히 자라고 있는 학생이고, 이번 여행을 통해서도 여러 부분에서 성장해갈 아이이기 때문이다. ‘교육’에서 ‘비즈니스 논리’를 걷어낼 때 비로소, 그 아이가 보이고,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 보이며, ‘도통 알 수 없는’ 교육의 가능성이 보인다.
오늘은 민석이가 영화팀 전체를 이끌며 간다. 여기에서 어떤 에피소드들이 생길지, 그리고 어떤 상황들과 엮일지는 여행을 떠나는 당사자도, 그걸 지켜보는 사람도 아무도 모른다. 그 흐름에 몸을 맡겨 그저 함께 어우러져 갈 뿐이다. 둘째 날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