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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May 07. 2016

모르는 사람처럼 살라

12.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 세 번째

어느덧 트위스트 교육학 3강 세 번째 후기를 시작하게 됐다. 시작할 땐 언제 끝나려나 막막하지만, 그래도 시작하여 진행하다보면 내용이 하나씩 정리된다. 

3강 강의 제목은 ‘지금 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필요한가?’이지만,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거쳐야할 과정이 있다. 그래서 첫 번째 후기에선 ‘칭송받는 교사가 필요하다’라고 강의 제목을 잘못 들은 선생님의 일화를 소개하며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는 인간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두 번째 후기에선 왜곡된 사실을 기술하여 우리가 눈 감아 버린 현실이 어떤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귀를 활짝 열어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지라도 들으려 하고, 왜곡된 현실이 갑갑할지라도 기술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거기서부터 ‘모름이야말로 축복이다’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 에듀니티의 밤이 깊어져 가고 있다. 밖엔 비가 점차 거세지고 있다.




배움은 모름에 머물려는 몸부림이다

     

트위스트 교육학 5번째 후기에서 ‘배움은 미지에의 투신이며, 무지에의 항거’라고 썼었다. 하지만 강의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 말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젠 ‘배움은 미지에의 투신이며, 무지에의 항거다. 하지만 결국 지를 해체하여 모름에 머물려는 몸부림이다’라고 바꾸고 싶다. 

‘배움은 미지에의 투신이며, 무지에의 항거’라고만 할 경우, 앎 또는 진리만을 추종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럴 경우 무지는 나쁜 것이고 앎은 좋은 것이기에, 무지에서 벗어나 앎을 추앙하라는 말이 된다. 이런 생각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앎에 대한 환상을, ‘하나라도 더 배워라’는 앎을 소유하려는 마인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하지만 이에 반해 ‘배움은 결국 지를 해체하여 모름에 머물려는 몸부림’이란 말을 덧붙일 경우, 안다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안다는 자만심 자체를 허물어버린다. 그럼에도 알려는 강인한 마음으로 배워나가게 된다. 왜 배우게 되는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 알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많은 것을 알게 되는가? 하나를 알게 되면, 그와 관련된 수만 가지는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앎과 모름이 공존하며 강렬히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샘솟기에, 모름은 축복이고 모름은 삶에 대한 강렬한 추동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어느 대학에 가든지 쉽게 볼 수 있는 문구.



               

모르는 자는 축복 받은 자다 

    

이 얘길 잘못 들으면,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결국 모르게 된다는 사실이 비운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알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모르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저주의 말이라기보다 축복의 말이라고 해야 맞다. 

그 이유는 모르기에 배우려 하고 삼라만상에 대해 궁금해 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세상 만물을 보면서 무척이나 신비해하고, 뭔가 단순한 변화가 있을 때에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까르르 웃으며 그 신비를 관찰한다. 모르기에 알려 하고 그렇기에 궁금하게 여긴다. 

하지만 온갖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진 어른은 더 이상 그런 것에 신기해하지 않는다. 개념으로 세상을 조각조각 나누어 인식하고, 그렇게 파편화된 지식들에 갇혀 더 이상 궁금해 하지 않기에,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안다고 생각할 때 우린 그 개념의 틀에 갇혀 머물게 되고, 모른다고 생각할 때 상황에 몸을 맡겨 나아간다. 그래서 안다고 자임할 때 결국 모든 관심의 끈을 끊고 죽음의 단계로 나아가지만, 모른다고 생각할 때 모든 소통의 통로를 활짝 열고 삶의 단계로 나아간다. 그러니 앎은 저주이고, 모름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 지식이란 단편적인 앎은 현실을 제대로 보게 하기보다, 오히려 단편적인 앎에 머무르게 만든다.




반자본주의적인 모름을 쫓아삶을 사는 사람들

     

지금 우린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를 한 마디로 말하면 ‘지금 당장 이익이 되는 일에 매진하라’는 것이다. 이걸 달리 말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치(이익)에 헌신하라’라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먼 훗날의 지고지순한 이상을 위해 달려가는 것보다,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부시간에 / 창밖을 보다가 /꾸중을 들었다. / 아이들이 깔깔대고 웃었지만 / 아무도 모른다. / 나팔꽃 고운 꽃술에 / 꿀벌 한 마리 몰래 / 입 맞추고 간 사실은 -김재수, 「몰래 혼자만」’라는 시처럼 아이가 조금이라도 허투루 시간을 보내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경우 시간을 낭비했다, 헛짓을 했다고 호되게 혼낸다. 학생 시절에 공부를 한다는 게 미래의 이상을 위한 노력 같아 보이지만, 실상 그건 6살 아이도 알만한 현실의 가치(권력, 자본, 지위)를 따라가는 것이라 봐야 한다. 지금 당장 이익이라 여겨지는 가치들을 너무도 잘 안다고 생각하니 그것만을 쫓아갈 뿐, 다른 가치들이 있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우치다쌤은 교사라면, 어른이라면 “지금까지 네가 지녔던 잣대로는 도저히 잴 수 없는 것들이 있고 언젠가는 (전혀 다른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라고 얘기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런 가치들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동섭쌤은 브리콜라, 맹상군,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를 통해 앎이 아닌 모름을 쫓아가며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들려줬다.                



▲ 지금의 가치로는 전혀 알 수 없는 다른 가치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브리콜라의 삶론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1908~2009)는 인디오들과 수개월동안 함께 생활하며 그들에게서 특이한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 이 때 ‘브리콜라bricoleur(주위의 물건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와 ‘브리콜라주bricolage(무언가를 만드는 일)’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인디오들은 무리를 이루어 정글을 이동하는데, 이 때 등에 짐을 담을 수 있는 바구니를 들고 간다고 한다. 그러다 정글에서 나무토막이든, 쓰레기든, 또는 어떤 물건이든 발견하게 된다. 바구니는 무언가를 담을 수 있지만, 무한정 담을 수는 없다. 그러니 물건을 담을 때조차 신중하게 고민하여 담을 수밖에 없다. 이동하는 중에 인디오들은 마주치는 물건들을 보며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바로 담는다고 한다. 물론 레비스트로스의 입장에서 보면 ‘저런 물건은 어디에 쓰려고 담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법한 물건이지만, 그들은 순간의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바구니를 채운다. 



▲ 생소한 얘기를 듣고 있다. 그러니 귀가 번쩍 뜨인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그렇게 주워 담은 물건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적합한 장소에서 쓰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인디오들은 오랜 정글 생활을 하면서 직관적으로 물건을 보는 순간, 그 쓰임을 예측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쓸 수 있는 곳이 어딘지를 알았던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듣다 보면, 부시맨들이 콜라병을 다양한 용도로 쓰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래서 동섭쌤은 “야생의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브리콜라이다. 그들은 ‘도구’의 범용성, 그것이 품고 있을 잠재가능성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 부시맨과 콜라병, 레비스트로스가 본 인디오들의 사물을 대하는 모습에선 그런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브리콜라가 전해주는 사람의 원초적인 능력  

   

어찌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기도 하다. 우린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언제든 주문을 통해 받을 수 있고, 온갖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집이 있기에 인디오처럼 물건을 선별하기보다 될 수 있는 한 모든 물건을 가지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더 이상 물건의 잠재적 가능성을 파악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에 따라 물건의 범용성을 알아볼 수 있는 감각은 사라져 버렸다. 풍요는 자본주의 사회가 준 엄청난 혜택이지만, 그에 따라 우리의 몸은 나약해지고, 시야는 좁아지고 말았다. 



▲ 시간은 돈이라는 관념은 한편으론 맞는 얘기지만, 그것만으로 진리로 생각할 경우 매우 그른 얘기다.



브리콜라는 물건을 볼 때 그것이 지금 당장 필요하냐, 그리고 눈에 보이는 역할이 있느냐 하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 물건이 지금 당장은 쓸모가 없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잠재적 가능성과 여러 용도로 쓰일 수 있는 범용성에 집중했던 것이다. 그건 어찌 보면 말로는 할 수 없는 미래적 가치를 한 눈에 알아보고 바구니에 넣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들의 입장에선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을 물건을 뭐 하러 좁은 바구니에 넣을까?’라고 한심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건 먼 훗날 돌아보면 한심한 게 아닌, 현명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린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너무도 시야가 좁아졌고, 지금의 가치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브리콜라였던 시절에 가졌던 원대한 지평과 사물을 보던 광범위한 시야를 잃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모습을 조금이라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린 다른 가치들을 찾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질 수 있다. 

아직 이야기는 한참이나 남았기에, 글이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이번 후기는 여기서 마무리 짓기로 하겠다. 맹상군 얘기와 잡스의 얘기 또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다음 후기에선 그 둘을 살펴보며 지금 당장은 알 수 없는 가치(모르는 가치)를 추구하며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생각해보도록 하겠다. 



 ▲ 브리콜라 이야기는 맹상군 이야기로, 스티브 잡스 이야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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