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빵 Apr 25. 2016

하품 수련의 역설과 배움

5.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하품 수련의 역설, 네 번째

1강 후기의 마지막 편에 드디어 이르렀다. 등산할 때 가장 힘든 구간은 뭐니 뭐니 해도 정상이 보이는 구간이다. 눈에 보이니 금방이라도 올라갈 것 같고, 그에 따라 숨은 턱 밑까지 차오른다. 그 때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얼마 가면 정상에 도착하나요?”라고 물으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조금만 가면 바로 나와요”라고 답한다. 그래서 10분을 걷고, 20분을 걷지만 정상은 가까워지기보다 오히려 ‘꼭 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는 것처럼 점점 더 멀어져 간다. 기대와 실망의 앙상블 속에 몸은 더욱 더 지쳐간다. 바로 이런 마음의 조화 때문에 정상이 보이는 그 시점이 가장 힘들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힘듦을 참고 끝끝내 오르면 드디어 정상에 당도하게 된다. 정상은 높은 시좌를 확보하는 공간으로 지금껏 내가 아등바등하며 살던 곳을 조감할 수 있도록 해주고, 여태껏 맛보지 못한 청량하고 시원한 바람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처럼 지금 우린 박동섭이란 산의 제1캠프에 오르고 있는 중이다. 조금 더 힘을 내고 함께 한다면, 조금 더 높은 시좌를 확보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삶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어 극단적인 경쟁의 길로 자신을 내몰지 않게 될 것이다. 제1캠프가 코앞이니, 서로 힘을 북돋워주며 함께 올라가보자.                



▲ 동섭레스트 등반에 오신 여러분 제1캠프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세월호와 인성교육그리고 수치화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정부에선 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했다. 그래서 대통령은 해양경찰을 해체했고, 안전행정부(그 전까진 행정안전부였으나, 안전을 중시한다며 2013년 3월에 바꿨음)를 쪼개어 국가안전처를 신설했으며, 교육부는 배를 버리고 간 어른들의 인성이 문제라며 학생 때부터 인성을 길러야 한다고 인성교육법을 발의함과 동시에, 학생들이 수영을 못해서 문제가 커졌다며 생존수영이란 수업을 개설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책들이 하나 같이 어이가 없지만, 그 중에서도 ‘인성교육법’은 혀를 내두르게 했다. ‘어른들의 인성이 부족하여 300명의 희생자가 생겼다’는 발상 자체가 이해되지 않지만, 그걸 인정한다 하더라도 ‘인성을 교육을 통해 기를 수 있다’는 생각이 매우 유아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으려면 당연히 ‘교육을 하면 이전보다 나아진다’는 합의가 있어야 하고, 그건 곧 어느 식으로든 평가가 가능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인성교육을 했더니, 아이들의 인성지수가 10포인트 상승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 '글로벌 인재', '인성교육'의 콜라보레이션. 이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불쾌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왠지 모르게 불편함이 느껴지고, ‘정말로 그래?’라는 의구심이 생긴다. 학교에서 배우는 국영수와 같이 박제된 지식의 경우 정량적인 평가가 충분히 가능하고 그에 따라 성적을 매기는 게 이상하지 않지만, 그 외의 것들은 평가도 불가능할뿐더러 그에 따라 순위를 매기는 건 현실 왜곡에 불과하다. 그건 ‘도덕 점수가 높다고 도덕적인 인간은 아니다’와 ‘학교 성적과 사람 됨됨이는 별개다’라는 말들로 충분히 검증된 사실이다. 우치다쌤이 얘기한 ‘자아란 낡은 목조건물이다’라는 메타포나 준규쌤이 얘기한 ‘멀티 아이덴티티’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분석하고 평가하여 정량화하는 것이 문제라고 비웃고 있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판에 박혀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동섭쌤은 “‘나는 지난달보다 30포인트 성숙해졌다’라는 말은 수치화할 수 없는 것을 수치화한 것이기에 잘못된 말입니다”라고 꼭 짚어 설명해줬다. 그러면서 “성숙이란 어떤 하나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이전엔 절대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바로 성숙입니다”라고 새롭게 정의해준다. 성숙해졌다는 건 검사지에 체크를 제대로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안목이 넓어져서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행동하게 되었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 강의는 시간 속에서 스치는 나의 생각들을 낚아채는 일이다.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라는 광고 대사와 교육의 관계 

    

이처럼 교육의 성과는 엄청난 시간을 요구하며, 그 시간이 지난 후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 할지라도 그게 A의 영향인지, B의 영향인지 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인지는 아무도 설명할 수가 없다. 아니, 심지어 본인조차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배움은 미지에의 투신이며, 무지에의 항거’라고 할 수 있다. ‘하품 수련의 역설’은 바로 이런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하품을 수련한다. 현실에선 그럴 리가 없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픽션을 통해 현실을 풍자하기 위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품을 수련하기 위해 두 명의 학생이 하품의 달인인 노인을 찾아 가서 “하품을 가르쳐주십시오”라고 강단 있게 말한다. 하지만 두 명의 학생 중 한 명은 하품에 대해 전혀 관심은 없지만,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지만 그냥 끌리네’라는 심정으로 친구를 따라 왔다. 

한 때 유행한 광고 중에 “아~ 좋은데, 참 좋은데,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이야말로 언어의 한계를 극명히 나타낸 말임과 동시에 진정한 것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 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그 친구도 말로는 표현하지 못했고, 왜 배워야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배워야만 해’라는 마음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품을 배워 나가는 과정은 너무나 힘들었다. 온 몸의 기를 모아 한 번에 터뜨려야 하고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려 방출해야 하니 말이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친구는 어느 순간 지루하게 느껴졌던지 아주 크게 하품을 하고야 말았다. 그 모습을 보던 노인은 “같이 온 친구가 하품을 너무나 잘 하는구만”이라 인정해줬다는 얘기다. 



▲ 배움이란 매우 역설적이고, 지금 당장 나의 생각으론 알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배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배움이야말로 아주 역설적인 활동이라는 말이다. 배우기 전부터 배운 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오히려 배우려 하지 않지만, 배우기 전에 배운 후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그저 배우는 게 좋기 때문에 배우게 된다는 말이다. 

배우기 전부터 배운 후의 가치를 안다는 것은, ‘이 학원에 다니면 수능 3등급이 2등급이 된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좋은 직장에 다닐 수 있다’를 아는 것이다. 이렇게 배운 후의 가치가 명확할 경우 사람은 열심히 배우려 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최소로 공부하고 최고의 성과를 이룰까?’만 골똘하게 된다. 그래서 속성과외랄지, 좀 더 편하게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고민할 겨를도 없이 그걸 선택하고 만다. 그러니 굳이 미지의 것을 알려하지도 않을뿐더러, 예측 불가능한 불안한 미래에 몸을 맡기려 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선 배움이란 활동 자체가 일어날 수가 없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배움은 배운 후에 어떻게 달라질지, 어떤 결과가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저 ‘이걸 배우면 뭔가 유익할 거 같다’는 느낌만으로 배우고 싶고, ‘선생님과 이렇게 해나가는 게 즐겁다’는 생각으로 해나가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순간순간의 상황들에 의미부여를 하고 선생님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저절로 귀가 기울여 진다. 그러다 보니 마침내 그 상황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어 하품이 나와 대가로 인정받는 것처럼 어느 순간 그런 상황들이 하나로 꿰어지며 깨닫게 되어 학문의 일가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배움이란 ‘아~ 좋은데, 참 좋은데,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라는 말처럼 미처 표현하지 못할 감정으로부터 시작되어 몸을 내 맡기고 전심치지專心致志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 강의를 들으니 좋긴 참 좋은데 뭐라 설명할 말이 없네.




자립은 홀로 섦이 아니라함께 섦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배운다는 게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완벽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건 미래의 가치를 위해서 배우는 것도, 수단을 얻기 위해 배우는 것도 아니라 할 수 있다. 배움의 가치를 알기 위해선 기존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엎어야 하듯이, 기존의 단어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동섭쌤은 고삐를 당기듯, 바로 “자립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음을 던졌다. 당연히 그 질문에 대해서는 ‘경제적인 독립’,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순간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일반적인 자립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내가 자립하지 못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은 철학적인 정의까지 나왔다. 



▲ 영화 [세얼간이]의 총장이 말하는 인재상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립한 인간상이다.



이에 대해 동섭쌤은 “무라카미 류村上龍(1952~)의 『최후의 가족』에 잘 나타나 있듯이, 내가 누군가를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함과 동시에 누군가도 나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 자립입니다. 다른 사람 중에 ‘니가 없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자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바로 앞에 계신 분이 “그렇다면 북한의 김정은 같은 경우 자립한 사람이라 할 수 있나요?”라고 그런 정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을 던졌다. 그 말을 하신 분도 그런 반문 자체가 억지스럽다고는 생각했을 것이다. 관계를 맺은 후에 ‘니가 없으면 안 돼!’라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 불가능한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과 분위기에 휩쓸려(세뇌되어) ‘위대한 령도자’라는 환상으로 추종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동섭쌤이 자립을 이와 같이 정의한 이유는 지금 사회가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회사의 한 마디면 언제든 해외로 나갈 수 있고, 가족과 남남처럼 데면데면한 고립적인 인간을 원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회에서의 자립은 기업이 그토록 원하는 ‘가족에도 얽매이지 않고, 언제든 기업의 요구에 따라줄 수 있는 철저히 파편화된 개인’이니 말이다. 즉 그들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존재들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그런 식의 자립에 대한 정의를 광범위하게 유포하고 꼭 그래야 성숙한 사람인 것처럼 받아들이도록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런 상황을 알기에 동섭쌤은 ‘관계성을 통해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이 자립한 존재’라는 새로운 정의를 하며,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에 맞선 것이다.                



▲ 나의 존재가 너의 존재와의 연결 속에 선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게 바로 자립이다.




무지란 지식이 꽉 차 있는 상태이며엄청난 노력의 결과

     

이에 탄력을 받았는지, 무지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얘기해준다.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지하다고 생각하는데, 각 학자들의 다른 관점을 얘기해주며 다시 생각해보길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롤랑바르트는 “지식이 꽉 차서 더 이상 들어갈 것이 없는 것이 무지다”라고 말했으며, 우치다쌤은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런 정의를 듣다 보면 당연히 황당할 수밖에 없다. 무지 또한 노력의 결과라는 것이 그렇고, 지식이 꽉 찼기 때문이라는 말이 그렇다. 그건 여태껏 우리가 상식처럼 받아들인 정의와는 완전히 상반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롤랑바르트의 말대로 생각해본다면 소위 지식인들처럼 자신들의 생각만을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무지한 사람들’이라 생각해볼 수 있게 되며, 우치다쌤의 말대로라면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만을 맹목적으로 믿으며 그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알고 싶지 않다’고 외치는 사람들이야말로 ‘무지한 사람들’이라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단어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면 이처럼 세상을 보는 눈도,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도 달라진다.                



▲ 무지는 알고 싶지 않다고 노력한 결과이며, 이미 지식으로 꽉찬 상태라는 것.




유아교육학개론정치적인 너무도 정치적인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 그리고 그 단어에 달라붙은 정의들을 다시 재정의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군가 어떤 의도에서 만들어 놓은 지도 모르는 함정에 빠져, 그들의 생각을 대변하며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정치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동섭쌤은 “사람들은 흔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정치적인 책이다’라고 말하는데, 어떤 책이든, 심지어 어떤 것이든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유아교육학개론』처럼 중립적이며 객관적으로 보이는 책이야말로 더 교묘하게 정치성을 감추고 있는 정치적인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개론서는 학문에 접근할 때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을 개괄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그러니 처음 공부하는 사람은 빠짐없이 봐야 하는 책이라 할 수 있고 그만큼 객관적인 사실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 '세상의 모든 지식'이란 수식어가 무색해진 백과사전. 그럼에도 여전히 위용은 대단한데, 이 책은 중립적일까?



하지만 그 책을 저술하는 사람들은 어떤 문화에 소속된 사람들이고, 그들이 배운 학문적 풍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런 생각들이 목차를 짤 때에도 반영되며 내용에도 들어있게 마련이다. 객관적이다, 중립적이다라는 말들은 허울 좋은 가림막일 뿐, 그 안에 들어가면 정치성이 교묘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국정화 국사 교과서를 반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학교에서 교육학 시간에 배운 비고츠키는 늘 삐아제와 상반된 입장을 지닌 사람, 사회적 구성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이미 임용 문제에 그렇게 출제되고 있고, 책에도 그런 식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교수들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니, 이에 대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하지만 동섭쌤을 통해 비고츠키를 배우다 보니, 그런 규정들 자체가 매우 정치적이며, 왜곡된 시선에 불과한 것이더라. 그리고 그런 시선은 권위를 쥐고 있고, 그에 따라 객관이란 포장지로 사람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게 만드는 것이니,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객관적, 중립이라는 포장을 하고 있는 모든 것, 그것들이야말로 가장 적대시하고 가장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외치며, 꺼진 불만 다시 볼 게 아니라 너무 당연하다 생각되는 것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 동섭쌤은 2시간의 열강을 마쳤고 나는 마침내 1강 후기를 마쳤다.




박동섭 제1캠프에 오신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힘겹게 달려왔다. 제1캠프가 보이던 시점부터 숨이 벅차오르고 발은 움직이지 않았으며, 가까워질 듯 가까워지지 않는 캠프를 보며 당장이라도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힘든 순간들을 이겨내며 오르고 나니, 드디어 청량한 바람을 한껏 맞을 수 있으며 무언가 해냈다는 뿌듯함에 기쁨이 밀려온다. 그건 심리적인 기쁨뿐만이 아니라, 여기까지 함께 올라오며 시야도 확보되어 훨씬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지금껏 너무 당연하다고만 느꼈던 것들에 대해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기쁨까지 포함하고 있다. 

함께 애쓰며 올라오신 분들, 이 순간을 만끽하며 누려보자. 그러고 나서 웬만큼 피로가 풀렸을 때는 맛있는 밥을 옹기종기 나누어 먹고, 다시 힘을 내어 제2캠프를 향해 함께 힘을 북돋워주며 기쁘게 올라가 보자. 



▲ 강의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엔 바람이 장난 아니게 불었다. 춥긴 했어도 마음 속엔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목차     


1. 프롤로그 트위스트 교육학으로 트위스트를 추다

맹목적인 질주는 회한을 낳고

그렇기에 맹목적인 질주가 아닌 성찰적인 걸음으로

트위스트 교육학으로 트위스트 추면서

다섯 번의 강의를 트위스트 추듯 즐기길     


2. 강 후기 -강의와 여행의 공통점

여행을 떠나기 전, 강의를 듣기 전의 공통점

소풍 가듯 강의를 들으러 가야 하는 이유

강의는 타자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같은 강의를 들으러 가다

에듀니티에서 강의를 듣다     


3. 강 후기 비인정한 사람이 되어라

트위스트 교육학 수강생의 특징 1 - 교육 경력이 많은 교사들

트위스트 교육학 수강생의 특징 2 - 멀리서 온 교사들

강의실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 동섭쌤 목소리의 비결

박동섭과 이타미 주조, 그리고 디오게네스

비인정한 사람이 되어 누비라

‘하품 수련의 역설’은 언제 나오나요?


4. 강 후기 일상에서 ’ 빼게 하는 강의

강의 제목은 하나의 단서일 뿐이다

강의 형식은 열하일기다

강의 내용은 김승희의 시다


5. 강 후기 하품 수련의 역설과 배움

세월호와 인성교육, 그리고 수치화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라는 광고 대사와 교육의 관계

자립은 홀로 섦이 아니라, 함께 섦을 인정하는 것이다

무지란 지식이 꽉 차 있는 상태이며, 엄청난 노력의 결과

『유아교육학개론』, 정치적인 너무도 정치적인

박동섭 제1캠프에 오신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6. 강 후기 배움이란 고통의 순간을 지나 기쁨의 순간으로 가는 것

배운다는 건 고통의 순간을 지나 기쁨의 순간으로 나아가는 것

에듀니티로 가는 길엔 봄 향기 가득

동섭쌤의 강의 스타일, 방심하는 순간 치고 들어가기

자립은 일방적인 의존이 아닌, 상호부조여야 한다

어른이 사라진 세상에서, 어른에 대해 생각해보기

두 번째 후기 예고


7. 강 후기 강의의 제목이 바뀐다는 것

두 번째 강의의 제목이 바뀌다

청중과 호흡하기 위해 강의 제목을 바꾸다

배움은 오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강의제목을 바꾸다

세 번째 후기 예고


8. 강 후기 - 배움이란 무엇인가? 1

오해야말로 배움의 기본이다

장량, 신발을 줍다가 배움을 터득하다

장량의 이야기를 듣고 황당하셨나요?

배움은 이성으론 이해할 수 없는휘말림으로부터 시작된다

장량의 일화엔 배움의 역동성이 담겨 있다


9. 강 후기 배움이란 무엇인가? 2

고민이 사치가 된 시대엔 장량이 나올 수 없다

배우는 자는 욕망하는 자다

오해가 나를 자유케 한다

박동섭과 박지원과 김영민의 다르지만 같은 말


10. 강 후기 지금 왜 칭송받는 교사가 필요한가?

갈 땐 몰랐지만, 돌아올 땐 그 전의 나와는 달라져 있다

비 오는 날, 강의 들으러 가기의 어려움

‘칭송 받지 않는 교사’가 ‘칭송 받는 교사’로 바뀌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제3캠프에 오르기 위해선 버터야 한다


11. 강 후기 기술이 곧 처방이다

관점을 지우는 게 아닌, 일그러진 상을 조금이라도 펴나가는 것

일그러진 상 1 - 시스템의 장단점

일그러진 상 2 - 학교 평가의 역설

일그러진 상 3 - 부조리에 적응하면 일상이 된다

섬세의 정신으로 기술하고, 또 기술하라


12. 강 후기 모르는 사람처럼 살라

배움은 모름에 머물려는 몸부림이다

모르는 자는 축복 받은 자다

반자본주의적인 모름을 쫓아, 삶을 사는 사람들

브리콜라의 삶론

브리콜라가 전해주는 사람의 원초적인 능력


13. 강 후기 맹상군처럼 사귀고 잡스처럼 배워라

혼란기에 꽃핀 다양한 철학과 관계학

맹상군이 들려주는 관계학

이익의 관계론이 팽배한 시대에 갇히지 않기

스티브 잡스의 배움론

사후적 지성으로 판단하기


14. 강 후기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되자

혁신학교는 혁신적이지 않고, 프라임 사업은 프라임하지 않다

괜찮아, 사후적 지성이야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를 통해 교직사회의 획일화를 비판했다?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고만 하는 칭송받는 사람들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칭송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수고했어 오늘도


15. 강 후기 친숙해짐 속에 낯섦 발견하기

친숙해짐과 여자 친구와의 헤어짐

친숙해짐은 동영상을 사진으로 보는 것

불인해질 때, 친숙해진다

친숙함 속에 낯선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방법

이제 우리가 학교를 낯설게 볼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16. 강 후기 학교는 학교다워야 한다?

‘학교를 학교답게 해야 한다’와 정명론

‘정명론’의 문제점

‘학교를 학교답게 해야 한다’의 문제점

디자인된 학교, 그래서 재디자인이 필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에서 ‘ㄹ’ 빼게 하는 강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