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신발 떨어뜨리는 사람, 두 번째
강의는 어찌 보면 강사와 수강생 사이의 약속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수강생들은 강사가 미리 공지한 강의 제목과 계획표를 보고 강의를 들을지 말지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강의에서 강의 제목이 바뀐다는 것은 강사의 준비가 소홀했다거나, 강의 진행에 실패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부득이하지 않고선 강의 제목을 바꾸거나, 계획을 수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건 어찌 보면 자신의 실수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에 정한 대로만 한다’는 건 어찌 보면 불쾌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도 학창 시절에 수업을 들어봐서 ‘판에 박힌 수업’, ‘진도표에 명시되어 있기에 그만큼 진도를 나가야 하는 수업’이 얼마나 지루한 수업이며, 얼마나 각 반 학생들을 무시하는 수업인지 잘 알고 있다. 그건 애초에 학생들을 들러리로 앉히고 형식을 갖춰 ‘이렇게 수업을 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계획표를 짜서 그에 따라 기계적으로 반복적인 수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과 상관없이 수업이 이미 정형화되어 있다면, 그건 동영상 강의와 하등 다를 게 없다. 그래서 학생과 상호작용하는 수업을 하고 싶은 교사라면, 수업의 틀은 유지하되 학생들의 성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수업을 변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각자의 존재를 인정하며 배려하는 것이다.
동섭쌤은 2강이 시작되기 전에 강의제목을 바꾸며 “원래 제목은 이게 아니었는데 저번 주에 1강을 진행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제목과 내용이 이동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페이스북에 이유를 솔직하게 밝혔고, 강의 시간엔 “저번 주에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이야기’가 한참 나오고 있었는데, 시간을 잘 조절하지 못해 미처 이야기를 끝마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강의 제목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추가적인 설명을 했다.
에듀니티에서 하는 강의냐, 일반학교 학부모들의 초청에 의한 강의냐에 따라 강의 내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한 강의를 진행하며 내용은 청중과의 호흡으로 다양한 변곡점을 그리며 흘러가고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바뀔 수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어찌 보면 ‘살아 있는 강의’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우치다쌤은 『스승은 있다』라는 책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했었다.
지금까지 당신의 이야기를 이끌어온 것은 처음으로 준비했던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상대방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다’라는 욕망도 아니고(왜냐하면 당신이 타인의 마음속을 알 리가 없기 때문에) 그저 당신이 추측한 상대방의 ‘욕망’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이야기한 것은 ‘당신이 이야기하려고 준비한 것’도 아니고 ‘듣는 사람이 듣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라 당신이 “이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닐까”란 상상으로 만든 이야기인 것입니다.
기묘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이끈 것은 대화에 참여한 두 당사자 중 그 어느 쪽도 아니고 그렇다고 ‘합작’도 아닙니다.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진심으로 바라보고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대화를 하고 있을 때 거기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둘 중 누구도 아닌 그 누군가입니다.
진정한 대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제삼자인 것입니다. 대화할 때 제삼자가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바로 대화가 가장 뜨거울 때입니다. 말할 생각도 없던 이야기들이 끝없이 분출되는 듯한, 내 것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처음부터 형태를 갖춘 ‘내 생각’ 같은 미묘한 맛을 풍기는 말이 그 순간에는 넘쳐 나옵니다. 그런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우리는 ‘자신이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치다 타츠루 저, 박동섭 역, 민들레 출판사, 『스승은 있다』, pp58~59
대화를 할 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 말을 꺼냈을지라도,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새로운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그러다 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진행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 때 우린 얘기하려는 본론을 잊고 ‘어먼 소리만 탱탱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치다쌤은 그런 대화야말로 진정한 대화이고, 그 때엔 나와 너가 아닌 제삼자가 말하는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삼자란 애초에 내가 말하고자 했던 말도 아니고, 상대방이 듣고 싶었던 말도 아닌,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말을 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강의도 대화와 비슷하다. 물론 강의라는 게 애초부터 강사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지만, 청중과 호흡하면서 강의 내용에 엇나감이 발생하며 자연스럽게 다양한 이야기들로 분기되며 진행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용도 훨씬 풍성해지고, 강의실엔 활기가 샘솟는다.
물론 여기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강사가 준비를 해오지 않았다거나, 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까먹고 횡설수설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선 수영을 생각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수영장에 들어가면 물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준비를 잘 해오지 않아 어먼 소리나 탱탱하는 강사와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년간 수영을 하여 물에서 활동하는 게 육지를 걷는 것만큼이나 쉬워진 사람의 경우, 굳이 영법을 지키며 동작하지 않고 대충 동작을 할지라도 물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그건 곧 준비를 철저히 했으되 상황과 청중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로 변주하는 강사와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동섭쌤이 강의 제목을 ‘왜 지금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들이 필요한가?’라는 제목에서 ‘신발 떨어뜨리는 사람과 줍는 사람’으로 바꾸며, 변주하는 자유로움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청중의 입장에서 풀어낸 생각일 뿐이다. 동섭쌤은 2강 제목을 바꾼 이유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풀어내며 이야기를 진행했으니 말이다.
그건 이름하야 ‘오해가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모든 연애는 상대방을 오해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것은 없지만 ‘뭔가 좋은 사람 같다’는 감이 들 때 사귀게 된다. 그래서 처음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에게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달달한 말은 뭐니 뭐니 해도 “너를 알고 싶어”라는 거다. 그 말은 한 사람을 뻔한 사람이 아닌, 미지의 존재로 언명하여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모른다고 생각될 때 알고 싶고, 미지의 세계라 느껴질 때 흥미가 인다.
이런 이유로 2강의 제목이 바뀌었다.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에서 ‘신발을 떨어뜨리는 사람’으로 제목이 바뀌어 일정한 흐름을 뒤흔들며 오해를 증폭시켰다. 동섭쌤이 페이스북에 올린 2강 제목이 바뀌었다는 글을 보고 나선 ‘이게 뭥미?’하는 심정으로 그대로 멈춰 섰다. 그 짧은 순간에 미궁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고, 모든 게 뒤죽박죽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뒤죽박죽된 만큼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동섭쌤은 “배움은 오해로부터 시작됩니다. 연애를 해보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게 되죠. 연애할 때 최고의 찬사는 ‘난 니가 좋은데, 왜 좋은지 모르겠다’는 말이고,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은 ‘난 너를 잘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너를 잘 안다’는 말은 한 존재를 뻔하디 뻔한 존재로 여긴다는 것이다. 도종환 시인의 「가구」란 시의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 그저 아내는 아내의 방에 놓여 있고 /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는 내용과 같다고 보면 된다. 생물의 살아있음이 무생물의 죽어있음으로, 미지의 불편함이 지의 익숙함으로 대체되며, 관심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관계의 종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강의에 빗대어 말하면 ‘이 강의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하더라’라는 말이다. 다른 제목의 강의를 하는데 이미 한 강의를 들은 것만으로 다음 강의의 내용이 짐작된다면, 더 이상 들을 이유가 없어진다. 그러니 그런 죽은 강의가 되지 않도록 동섭쌤은 강의 제목을 바꿔 오해를 증폭시키며 “이 강의를 들으니 좋긴 한데, 왜 좋은지 모르겠다”는 말이 자연히 나오도록 한 것이다.
‘오해야말로 배우게 하는 원동력이다’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오늘의 주제인 ‘신발 떨어뜨리는 사람과 줍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우치다쌤의 책인 『스승은 있다』에 소개된 일화인데,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야 비로소 배우고자하는 마음이 일어나는지 아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건 어찌 보면 ‘학생 눈높이에 맞추는 교사’, ‘학생의 공부 동기를 불러일으키도록 여러 수업 기법을 연구하는 교사’, ‘학생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교사’와 같이 우리 사회에 좋은 교사상으로 소개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교사상을 소개해주고 있다. 그러니 처음 이 이야기를 들으면, 준규쌤이 예전에 했던 말처럼 ‘교사는 어떤 지식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아도 교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는 것과 같이 황당한 기분이 들게 된다. 그건 어찌 보면 자격증으로 교원을 인증하는 제도(지식의 유무로 교사가 될 수 있기에)와는 180도 다른 관점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한 편으론 흥미진진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에게 그게 뭐야~’라며 허무맹랑하기도 하니, 다음 후기에 깨달음과 어색함 사이를 맘껏 누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