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하품 수련의 역설, 세 번째
강의가 계속 되면서 어느덧 비는 그쳤다. 하지만 바람은 장난 아니게 불며 성큼 다가온 봄을 시샘하듯 갑작스레 추위가 느껴진다.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퇴근길을 재촉하지만, 에듀니티에 모인 사람들은 배움의 열기를 가득 채우며 그 시간을 즐기고 있다.
오늘 강의의 제목은 ‘하품 수련의 역설’이지만 강의가 시작된 지 1시간가량이 지났음에도 ‘하품’이란 단어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동섭쌤이 제목을 헛갈렸거나, 다른 할 얘기가 많아서 뒤로 미뤘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작년 제주 강연 때 우치다쌤은 자아를 낡은 목조 건물로 비유했다. 이에 대해 동섭쌤은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은 더러운 목조 아파트 건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메타포를 가져오면서 중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는 화법으로 탁월하게 풀어내셨다. 물론 강연하시면서 레비나스의 ‘레’자도 꺼내지 않으시고 레비나스의 철학을 풀어내는 스승의 모습에 또 감탄”이라 평가하며, 자신도 그런 스승을 본받아 비고츠키의 ‘비’자도 꺼내지 않고 비고츠키를 전파하겠노라고 의지를 다졌었다.
그런 의지가 바로 올해 초에 있었던 초중등 교원 연수였던 ‘침대에서 읽는 비고츠키’ 강연에서 빛을 발했다. 그 강의엔 비고츠키의 ‘비’자도 언급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옆집 바이러스’, ‘동천홍의 울음소리’, ‘『14세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라는 책을 읽으면 아이들의 마음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걸 알게 된다’와 같은 이야기만 가득했다. 그러니 강의의 전체적인 내용을 생각하지 않고 ‘비고츠키의 이야기가 언제 나오나?’라고 기다리던 사람이라면, ‘뭐야 왜 제목대로 강의하지 않고 엉뚱한 말만 하지?’라고 불만을 제기할 만도 하다.
하지만 동섭쌤 강의 내용을 쭉 들어보면, 그런 이야기들이 모두 ‘환경과 인간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비고츠키의 아이디어로 세상을 본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즉, 비고츠키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ZPD, 구성주의, 비계설정 등의 파편화된 한국적 비고츠키 이해 방식)만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 비고츠키안의 시각으로 강의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처럼 오늘 강의도 ‘하품 수련의 역설’이란 이야기만 아직 나오고 있지 않을 뿐, 실질적으론 처음부터 제목과 관련 된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주제를 통해 이야기를 펼쳐내려다 보니, 강의의 형식은 독특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 교육학을 강의하는 경우, 교육학에 한정된 이야기만 하며, 교육 관련된 예화를 들게 마련이다. 그렇게 해야만 더 전문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하고, 이 땅의 학문 풍토가 그렇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박사博士’라고 할 때의 博이라는 한자가 ‘넓다’는 뜻을 지녔음에도, ‘엷다, 얇다’의 뜻을 지닌 薄으로 느껴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지금의 전문가들은 ‘博士(안목을 지니고 넓게 볼 수 있는 사람)’가 아닌 ‘薄士(자신이 아는 것만 진리로 다른 것을 배척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이런 풍토는 근대화 이후 서양학문이 본격적으로 수입되며, 각 학문을 잘게 잘게 쪼개어 분과화하며 시작되었다. 처음엔 잘게 나누어 하나의 학문만을 깊게 연구하다보니, 그 학문의 깊이가 깊어지고 다양한 연구 성과들이 쌓여 전문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자잘한 것까지 따지고 들어가게 되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그 학문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시각은 사라져 갔다. 청나라에서 발달한 고증학考證學이 이와 유사한데, 『논어』나 『맹자』 등과 같은 전통적인 철학서가 후대에 전승되는 과정 속에 어떻게 글자가 바뀌었으며, 때론 어떤 글자들이 추가되고 삭제됐는지를 따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철학서의 원본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됐지만, 작은 것에 너무 천착하여 오히려 큰 것들을 보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게 됐다. 이처럼 지금의 학문풍토도 그러하다 보니 학문의 질은 급격히 떨어졌고, 학문의 내용은 협소해졌다.
그런데 근대화 이전의 시대에 살았던 학자들은 문사철文史哲을 아우르며, 세상과 사람, 그리고 삶을 논했다. 그래서 조선시대 학자 중 한 명인 연암이 쓴 『열하일기』만 보더라도, 국제 정치학, 성벽 건축술, 철학, 인간학 등이 모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었고, 그 때의 안목은 여러 사람에게 깊은 감흥을 안겨줬다. 이런 것을 알기에 동섭쌤도 강의를 할 땐 종횡무진 역사를 누비고, 철학을 주파하며, 문학작품을 나열하며 진행한다. 이것이야말로 일반적인 강의 방식과 동섭쌤의 강의 방식이 뚜렷하게 차이 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섭쌤 강의가 다른 강의와 방식만 다르고, 내용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일까? 동섭쌤 강의의 주요 내용은 일상을 이상하게 보도록 만들며, 당연함을 불편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섭쌤의 강의는 김승희의 시다’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상략)
<일상>이란 낱말을 고요히 들여다보네
ㄹ은 언제나 꿇어앉아 있는 내 두 무릎의 형상을 닮았네
일상은 어쩌면 우리더러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자기를 섬기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것도 같네
무릎을 꿇고
상이 용사처럼 두 무릎을 꿇고
ㄹ로 두 다리를 포개고 앉아 있으라고
그러면 만사 다 오케이라고
<일상>이란 낱말을 더 들여다보네
(일상은 역사보다 더 오래되고
전쟁보다 더 많은 상이 용사들을 낳은 것)
ㄹ을 한번 움직여보네, 바퀴처럼, 썰매처럼
밀고 가보네, ㄹ을 달리게, ㄹ을 구르게, ㄹ을 구루마처럼
굴리며 굴려가 막 밀어보네.
제 속도에 취하여 ㄹ은 즐겁게 굴러가고 즐겁게 달려가네
절벽이 있는 데까지 굴러가서
절벽 아래엔 절이 있거나 벽이 있거나 하겠지만
ㄹ은 멈출 수가 없어 아래로 곧장 굴러 떨어지네
너무 멀리 온 거야, 이렇게까지 올 줄은 몰랐어,
웃다 만 반 조각의 얼굴을 허공 중에 설핏 남기며 분해된 ㄹ은
투신 자살, 혹은 미필적 추락으로
(하략)
-「<일상>에서 ㄹ을 뺄 수만 있다면」, 김승희
동섭쌤 강의는 시에 나와 있듯이, ‘<일상>에서 ㄹ을 빼는 일’이다. 그러면 일상은 이상한 것이 되고 낯설어지게 되어, 더 이상 다른 것들을 억누르지 못한다. 일상이란 어떤 기준에 의한 것인지, 또는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일상’이란 단어를 외치는 사람은 권위를 부여받고, 그에 따라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일상적인 생활을 해’라는 말은 늦게 일어나는 사람을 사회 부적응자로 만드는 말이며, ‘우리 회사에선 이런 모습이 일상적인 모습이야’라는 말은 회사의 부조리를 감추고 합리화하는 말이며, ‘군대에선 맞는 게 일상다반사야’라는 말은 억울한 상황을 묵인하도록 만드는 말이다. 일상이란 말과 같이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단어들엔 ‘평범’, ‘다수결’, ‘능력주의’ 등 우리가 아무 생각도 없이 당연하게 쓰는 말들이 있다.
우린 알게 모르게 그 단어들에 지배를 당하면서도 그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는데, 동섭쌤의 강의는 그런 우리의 현실을 까발려 주는 것이다. 강의를 듣다보면 누누이 아주 일상적으로 쓰였던 단어들이 얼마나 정치적인 단어들인지 알게 되고, 그에 따라 우리도 아무렇지 않게 그런 단어들을 쓰며 폭력을 행사하는지 깨닫게 된다. 그래서 동섭쌤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뭔가에 맞은 듯 현기증이 일고,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는 갑갑증까지 인다. 정답을 알려주기보다 문제만 한 아름 던져주고, 그는 ‘바람과 같이 사라’지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애정을 담아 ‘박동섭, 그를 조심’이란 표현을 썼던 것이다.
이번 후기에선 동섭쌤 강의가 어떤 형식을 띠는지, 그리고 강의 내용은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었다. 이번 편에서 1강 후기가 끝나길 바랐는데, 또 이렇게 한 편이 늘어나게 되었다. 다음 편엔 1강의 제목인 ‘하품 수련의 역설’을 꼭 이야기하며 후기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그러니 1강 후기가 마무리 되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해주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