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민 교수의 과학사 특강 1
2014년을 맞이하여 단재학교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특강을 듣기로 했다. 학생들에게 다양한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고 학생들을 폭넓은 지식의 장으로 안내하기 위해서다.
여기에 덧붙여 한 강사의 특강을 여러 번에 걸쳐 심도 깊게 듣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2~3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듣기엔 ‘수박 겉핥기’나 ‘후추 통째로 삼키기’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지 ‘한 번 들어보긴 했지’하는 정도의 위안은 오히려 특강의 의도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말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내가 알고 있는데’하는 말일 것이다. 제대로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닌 몇 번의 경험만으로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그건 알고자 하는 욕구를 봉쇄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니 말이다.
다양한 배움의 장을 마련하자는 의도와 이벤트성에 그칠 수 있다는 문제점을 함께 고려하여 올 1학기에 마련된 강의가 바로 박철민 교수의 ‘과학사 특강’이다.
4월 4일 14시 30분, 단재학교 단군방에서 과학사 특강이 시작되었다. 외부강사의 특강이 진행되는 만큼 분위기는 지금까지 단재학교의 분위기와는 달리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다. ‘과연 강사님은 어떤 식으로 강의를 진행할까? 그리고 우리는 이 시간에 무엇을 듣고 무엇을 느낄까?’라는 기대를 하며 강사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박철민 교수님의 첫 인상은 친근하여 옆집 형 같은 느낌이었다. 강의 진행도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방식이 아닌, 학생들의 생각을 세 가지 카드(긍정카드, 중립카드, 부정카드)로 표시하게 하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충분히 들은 후에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걔 중에는 장난으로 카드를 드는 학생도 없진 않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진지하게 카드를 들어 자신의 의사를 표시했고 자신의 생각을 여과 없이 말하여 활기찬 분위기가 되도록 했다. 그와 같은 강의 분위기가 된 데엔 교수님의 역량도 있지만, 성숙해졌고 힘들더라도 참으며 들을 수 있는 단재학생들의 저력도 있었다.
강의가 시작되자마자 교수님은 질문을 던졌다.
Q: “과학 공부는 필요한가?”
얼핏 생각해보면 ‘왜 당연한 걸 묻지?’하는 생각이 들 법한 질문이다. 더욱이 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던지는 것이라면, 뻔한 답을 유도하기 위한 발문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하지만 역시나 ‘자기 생각이 분명한’ 단재학생들이기에, 태반이 긍정카드를 들었으나 걔 중 몇몇은 부정카드와 중립카드를 들었다.
A: (긍정카드를 든 학생)
오승환: “과학으로 긍정적인 결과 뿐 아니라 부정적인 결과도 발생하는데,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
송지민: “당연히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기에 꼭 과학 공부는 필요하다.”
하유빈: “과학을 조금 좋아하며 과학이 역사보다 좋기 때문에 필요하다.”
A: (중립카드를 든 경우)
김이향: “관심이 없었고 잘 몰랐다.”
임승빈: “조금의 호기심은 필요하나, 난해한 것엔 관심이 없다.”
A: (부정카드를 든 경우)
이건호: “물론 필요하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필요치 않다. 실생활에 필요한 정도면 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유럽의 산업혁명 이후로 과학의 세기에 접어들었고, 현대문명의 기초가 과학을 통해 건설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는 있지만, 과학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공부라는 영역으로 좁혀 이야기하면 과학자가 되려는 사람에게만 필요하며 그 외의 사람에겐 필요하지 않다는 ‘한정적 필요성’을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과학 공부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모순적인 말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답변 또한 어찌 보면 근대 학문이 지닌 문제점을 드러낸 말이라 할 수 있다. 전근대 시대의 학문이란 문학文·역사史·철학哲을 아우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문인들은 철학자이면서 과학자였고 역사학자였다. 문장가로 이름 난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거중기擧重器라는 기구를 사용하여 수원화성을 지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문화적인 풍토가 있어서 가능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유명 작가가 건물의 도면을 그리고 건설현장에 서서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격이니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그 땐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 학문 풍토가 20세기 이후 서양의 학문으로 급격하게 대체되면서 전공이란 게 생겨났고 각 과목은 잘게 쪼개져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건호의 주장은 분과分課된 학문만 배우고 전공을 택하여 공부하는 근대학문의 한계를 그대로 반영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교수님의 ‘과학 공부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통해 학문을 좁은 의미로만 받아들이는 현세대의 공부론을 재확인하고 문제제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문제제기를 통해 문제가 무엇인지 알았다면, 이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도 제시해야 한다. 좁디좁은 공부론을 어떻게 확장시킬 것이며, 그걸 어떻게 학생들에게 의미부여할 것인가?
교수님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넌지시 알려주기보다 정공법으로 다음 설명을 이어갔다. 바로 ‘工夫공부’라는 한자어를 풀어주며 이야기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工(장인공)이란 한자는 ‘손잡이가 달린 끌’을 본떠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왜 우린 ‘공부’라는 한자를 쓸 때, 왜 ‘工’을 쓰는 것일까? 교수님은 ‘工’이란 한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그 이유가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바로 ‘工’의 윗 획은 하늘을, 아래 획은 땅을, 그 사이를 연결하는 획은 인간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工’은 공작의 도구인 끌만을 의미하지 않고, 천지인天地人의 철학을 구현한 한자라는 것이다. ‘巫(무당무)’가 ‘하늘과 땅과 사람을 이어주는 존재’를 형상화한 것과 같은 원리라고 보는 것이다. 천지인 사상의 핵심은 자연의 법칙이 인간 내면의 법칙과 조응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건 곧 인간의 끊임없는 천지자연과의 소통을 의미한다. 공부의 ‘공’이란 기실 알고 보면, 천지자연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夫(지아비부)는 왜 쓰인 것일까? ‘夫’는 ‘大’라는 한자에 한 획을 첨가한 꼴이다. ‘大’가 ‘사람이 양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기에, 머리 부분에 첨가한 한 획은 당연히 갓을 쓴 성인 남성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어른이 되어 세상에 나아가 세계를 일구며 가꾸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공부의 ‘부’란 미지未知의 세계를 지知의 세계로 바꾸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목차
첫 만남, 그리고 방식
과학 공부는 정말 필요할까?
공부의 원의
원래의 의미에 가까운 공부란?
과학은 세상을 보고 궁금해 하는 데서 시작된다
과학은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과학은 어떤 경우에 악이 되는가?
과학은 선택이다 1 – 납에 대한 과학적 신념
과학은 선택이다 2 – 자연을 위한 과학? 인간을 위한 과학?
과학은 선택이며, 맹신보다는 통찰이 필요하다
첫 과학사 특강을 듣고 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