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 37 - 15.10.9(금)
이제 6일째 자전거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아침도 맛있게 먹었겠다, 재익이 자전거도 고쳤겠다, 펑크패치용 본드도 샀겠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완벽한 출발이다.
여기에 날씨까지 화창하여 하늘이 더욱 높게 느껴지는 맑디맑은 가을날씨다. 예전에 임용시험을 준비할 때만 해도 드높아진 하늘을 보며 ‘언젠가 나도 가을을 만끽하며 즐길 날이 오겠지?’라는 생각으로 도서관에 있어야만 하는 나를 위로했었는데,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 꿈은 현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행을 할 때 목적지에 빨리 가기 위해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고 가지 않으면, 아무런 기억도 남지 않는다는 걸 도보여행과 사람여행을 하며 느꼈었다. 여행엔 ‘점과 점의 여행’과 ‘선의 여행’이 있다.
‘점과 점의 여행’은 시작점과 끝점만 있는 여행으로 목표는 ‘어떻게 끝점에 빨리 도착하느냐?’하는 것이다. 그러니 중간에 스쳐 지나가는 광경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포커스가 안 맞은 배경에 불과하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출근할 때 늘 성내초등학교를 지나간다. 보통 땐 학교에 빨리 도착하는 게 목표다보니, 전속력으로 달리기만 한다. 그러니 늘 지나가는 곳이면서도 무엇이 달라졌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천천히 가다가 목련이 활짝 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분명히 그 전날까지도 지나갔던 길이기에 당연히 봤을 텐데, 모르고 지나쳤기 때문이다. 이처럼 ‘점과 점의 여행’은 수많은 것들을 지나칠 뿐 어떤 인상도 남기지 않으니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그러니 겨우 ‘몇 시간 일찍 도착했다’는 정도의 감상만 남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선의 여행’은 점과 점을 이은 만든 선을 따라가는 여행으로 목표는 ‘지나는 과정에서 무엇을 느꼈느냐?’하는 것이다. 중간 중간에 주요 관광지를 들르거나, 처음 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 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 도보여행 때 초평저수지를 지났었는데 그냥 지나가기만 했다면 지금까지 어떤 의미로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우연하게 마을회관에서 자게 되었고 그 다음 날 고추까지 함께 심게 되면서 그곳은 나에게 의미 있는 공간으로 남았다.
‘점과 점의 여행’이 아닌, ‘선의 여행’을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래서 중간 중간 번거롭긴 하지만 조금 돌아가더라도 주요 관광지를 넣어 그 순간을 느껴보도록 한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원해서 가는 게 아니기에, 나처럼 그 순간을 만끽하려 하진 않지만 나의 바람은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신륵사에 가려 하는 걸까? 일반적으론 ‘천년고찰이니 보러 가는 건 당연하지’라고 생각하거나, ‘무언가 깊은 뜻이 있겠거니?’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런 의미 때문에 가는 게 아니다. 고찰로서의 역사성 때문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깊은 뜻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여주에서 갈 곳을 검색하다보니, 명성황후 생가와 세종대왕릉(이하 영릉), 신륵사가 나왔고, 그 중에 명성황후 생가는 작년 도보여행 때 갔기 때문에 나머지 둘 중에 고르게 되었으며, 신륵사가 영릉보다 가까운 곳에 있기에 선택된 것뿐이다. 사람의 일이란 게 어떤 거창한 의미를 따라 결정되는 일도 있지만, 이처럼 별 생각 없이 단순하고 간단하게 결정되는 일도 있다.
하지만 하루 일정이 끝난 후 펜션에 도착하여 생각해보니, 잠시 후회가 되긴 했다. 그건 신륵사가 별로여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이 날이 한글날이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이미 훈민정음 미션을 하고 있었으니, 영릉에 가서 미션까지 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한글날’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번쩍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전만 해도 그런 생각은 전혀 못했으니, 그 부분이 조금 아쉬웠다.
신륵사는 남한강변에 만들어진 고찰이다. 강 바로 옆에 있어서 산 속 깊은 곳에 있는 사찰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삼국시대에 들어오기 시작한 불교는 국교로 채택되어 백성들을 정신적으로 하나로 묶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사찰하면 불국사의 석가탑, 다보탑과 같이 높이 솟은 탑이 떠오른다. 탑stupa은 부처님의 사리를 넣은 무덤으로 사찰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탑은 사람이 살기 위한 건축물은 아니지만,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하여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자 하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시대엔 이러한 탑의 의미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백제의 미륵사나 신라의 황룡사는 사찰이 산속 깊은 곳에만 있다는 편견을 깨며 당당히 평야에 내려와 지어졌으며, 그곳에 만들어진 미륵사지 석탑이나 황룡사 9층 목탑은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그 당시엔 높은 건물이 아예 없었으니 사방 어느 곳에서 보아도 엄청난 크기로 우뚝 솟은 탑은 바로 보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탑을 보면서 불심을 키웠으며, 불국토佛國土의 이상이 현실이 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높은 건축물이란 단순히 위압적인 느낌만을 주지 않는다. 그건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잠실에 세워지고 있는 제2롯데월드는 수많은 비판과, 서울공항의 활주로를 바꿈으로 안보를 내팽겨 쳤다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허가가 떨어졌고 이제 완공도 얼마 남지 않았다. 롯데는 왜 비난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감행하려 했던 것일까? 그건 다름이 아니라 어디서나, 심지어 매우 먼 곳에서도 그 건물을 볼 수 있도록 하여 ‘자본주의 사회’임을 자각하게 하고, ‘롯데의 영향력’을 무의식중에 심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린 멀리서 탑처럼 높이 솟아오른 이 건물을 보면서 ‘역시 돈이 최고’라는 자본주의의 제1의 정의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롯데(자본)의 영향력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에 순응하게 된다. 삼국시대엔 엄청난 크기의 탑이 우리의 불심을 자극했다면, 현대엔 상상을 초월한 건축물이 우리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신륵사 대웅보전 앞엔 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다른 탑처럼 엄청난 규모는 아니어서 실망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 사찰의 수수한 분위기가 잘 맞아 떨어져 기풍 있는 멋을 보여준다.
일주문 앞엔 매표소가 있다. 그곳에서 표를 끊고 자전거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연휴의 첫 날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정말 많더라. 그 중에서도 단연 단체 조끼를 입고 절로 들어가는 초등학생 들이 눈에 띄었다. 조끼엔 ‘박선생창의역사교실’이란 사설학원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창의’라는 솔깃한 단어와 ‘역사’라는 주요과목명이 절묘하게 섞인 것을 보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이 시대가 뭘 원하는지, 학부모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이런 식으로 답사도 하며 역사에 흥미도 갖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이니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단재학교에 청년 두 명이 찾아와서 승태쌤과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눴었다. 학교에 찾아와서 청소년 활동과 관련하여 자문을 구하거나, 또는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꽤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야기가 다 끝난 다음에 승태쌤이 들어오면서 받아온 자료를 바로 버리더라. 그들은 역사답사를 체계적으로 하는 기관에서 일하고 있었기에, 단재학교에서 역사 답사를 할 경우 자신들과 조인하면 잘해주겠다는 홍보를 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아마도 그 때 오신 분들이 하는 일이나, 지금 이렇게 돌아다니는 활동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현 정권 들어서며 수능 과목에서 선택이었던 역사가 필수과목으로 바뀌었으며, 심지어 검인정체제로 발행하던 교과서를 국정체제로 발행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이렇게까지 역사가 중시되며 현대사가 새롭게 떠오르는 분위기에 학원들은 역사라는 컨텐츠가 얼마나 돈이 되는지 알았을 것이고, 그래서 이런 활동을 하게 된 걸 거다.
물론 이렇게 비판하는 요지엔 ‘역사는 숭고하고 존귀하기 때문에 전문가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특별한 학문의 체계일 수 없으며, 사람의 수만큼 그만큼의 역사가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독점적인 해석이나 독점적인 선택은 있을 수 없고, 그것만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현정권은 왜 역사를 건들려는 것일까? 그들은 ‘역사의 재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현재 자신의 정당성이 확보되느냐, 거부되느냐?’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곧 ‘고정된 역사’는 없으며, ‘해석된 역사’만 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역사를 고치고 하나의 해석만을 고집하여 자신들의 정통성이 위협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 교육이 중시되고, 사교육 업체가 전면에 나서 역사교육의 붐을 일으키고 있으니,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강이 바로 보이는 자리에 아이들과 섰다. 아이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절이고만’이라는 생각과 ‘뭐 볼 게 있다고 여기까지 왔냐?’하는 생각이 동시에 있는 듯했다. 하긴 이건 아이들만 탓할 순 없다. 내가 학생 때도 불국사에 갔는데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번 미션은 ‘신륵사 홍보 영상’을 찍는 것이다. 준영이와 현세가 한 팀, 민석이와 재익이가 한 팀으로 구성되었다. 규칙은 30초 분량으로 롱테이크로 촬영하되, 신륵사의 매력이 보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편집할 때 컷은 허용되지 않고 오로지 음악 삽입만 가능하니, 카메라를 어떻게 움직여 어떤 장면을 담아낼지 충분히 고민해야만 하는 미션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신륵사를 구석구석 살펴보며 이 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규칙을 들었음에도 별로 반응이 없다. 그나마 준영이는 호기심이 있어 절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당연히 한 팀인 현세도 따라 움직였다. 둘은 신륵사 맨 위 쪽에 위치한 삼성각을 둘러보며 토착종교와 불교가 어떻게 융합되었는지 둘러본 후 대웅보전 앞으로 내려왔다. 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던 이 때 재익이와 민석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범종이 있는 곳에 바로 앉았다. 절에 대해 전혀 궁금해 하지도 않았으며,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이들이 만든 결과물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준영이와 현세의 영상은 동적으로 삼성각에서 시작하여 극락보전까지 현세의 움직임을 보여주며 ‘신륵사에 온 사람들은 이 방향으로 관람하세요’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고, 민석이와 재익이는 기어코 범종 곁에서 일어나 구석에 서더니 범종 주위의 광경을 보여주고 범종의 풍경을 비추며 끝냈다.
어느 영상이 더 신륵사를 오게 만드는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애써 신륵사에 왔는데, 전혀 무관심하고 둘러보려 하지도 않는 민석이와 재익이를 보니 가슴이 찡하게 아려오긴 했다. 그렇다고 억지로 둘러보라고 말하긴 뭐 했다. 그래봐야 강요밖에 되지 않으며, 강요에 의해서 보는 척을 한들,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어느덧 12시 20분이 넘었다. 여기서 펜션까지는 54.21km로 4시간 정도가 걸린다. 여유 있게 시작했음에도 거리가 짧다 보니, 오후 시간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달릴 수 있을 정도다. 볕도 따뜻하고 바람은 시원하니, 맘껏 남한강을 따라 작년에 걸어왔던 길을 거슬러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