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기행 2
전주(친구 결혼식이 11시에 있어서 예식을 마친 후 출발한다)에서 군산으로 가기 위해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버스는 15분 단위로 배차되어 있다. 1시 45분차는 이미 떠났기에 2시 차를 타야했다. 탈 때만 해도 ‘설마 얼마나 사람들이 타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출발할 때 80%가 탔고, 덕진 간이 터미널을 지나니 한 자리만 비었다. 여행객은 아닌 거 같고 일을 보러 오가는 사람들 같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이용하더라.
2008년 군산선과 장항선이 연결되기 전엔 전주에서 군산까지 꼬마열차가 출퇴근을 책임졌다고 한다. 그 땐 그래도 열차와 버스로 교통량이 분산됐을 텐데, 지금은 꼬마기차가 다니지 않으니 이런 상황이 펼쳐진 게 아닐까.
군산역과 도깨비 시장
한반도엔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서야 철도가 본격적으로 놓이기 시작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함으로 철도와 도로 등의 인프라가 놓일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뒤집으면 ‘식민지가 되지 않았으면 조선 말기의 폐단이 지속되어 근대화는 더욱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말로는 ‘유신체제 아니었다면 경제성장 못했다’는 말이다. 어떤 강한 힘이 사회의 다양한 요구(갈등)를 틀어막은 덕(?)에 힘이 하나로 결집되어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얘기이니 말이다. 그러니 과정적으로 민주화에 역행했고 사회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었으며 대를 위해 소를 희생했을지라도(실제로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죽거나 다쳤다), 근대화의 기초를 다졌고 경제를 성장시켰으니 그거면 된 거 아니냐는 얘기다.
하지만 우린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이 한반도에 교통 인프라를 확대한 의도에 대해, 유신을 하려 했던 의도에 대해, 그리고 그 과정 속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 대해 말이다. 이런 식으로 물을 수 있다면, 더 이상 ‘식민지 근대화론’과 ‘유신 경제성장론’을 자랑스럽게, 또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진 못할 것이다.
일제가 만든 철도는 철저히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호남선에 이어지는 군산선을 만든 이유도 드넓은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신속하게 일본으로 나르기 위해서였다. 1912년에 완성된 군산선은 열차로 실어 나른 쌀을 배로 신속하게 나르기 위해 항구까지 철로를 놓았다. 이처럼 강점기 당시엔 군산이 발전하는 만큼 아이러니하게도 한반도는 쇠퇴해 갈 수밖에 없었다. 군산은 어디까지나 일본 성장을 견인하는 역할을 충실히 했던 도시였기 때문이다.
군산역에 대해선 군산 출신인 선배에게 재밌는 얘길 들었다. 군산역 앞엔 새벽에 시장이 열렸다가 아침이 되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도깨비 시장’이 열린다고 한다. 아마 출근 시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군산역에서 내리기 때문에 그와 같은 진풍경들이 펼쳐졌던 게 아닐까. 하지만 군산역이 시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구 군산역은 철거되었다고 한다. 도시의 운명도 어찌 보면 한 개인의 운명처럼 여러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군산역은 이전했지만, 도깨비 시장은 여전히 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째보선창과 군장대교
터미널에서 내려 30분 정도 걸어 째보선창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둘러보고 있다. 『아리랑』을 보면 하대치가 피땀 흘려가며 째보선창을 간척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부잔교는 해수면의 높이에 따라 다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장치인데, 아무래도 수심에 상관없이 쌀을 실어 나르기 편하도록 만든 것이다. 조수간만의 차와는 상관없이 수탈하기 편하도록 만든 시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랜 4기가 건설되었다던데 지금은 3기만 남았다고 한다.
해변을 따라 걷는다. 바다 건너편은 충남 장항읍이 보인다. 군산과 장항을 동시에 묶어 ‘군장국가산업단지’를 만들었다. 장항과 군산은 금강하구둑이 만들어지면서 왕래가 더욱 활발해졌다. 여기에 지금은 군장대교까지 건설되고 있으니, 이 다리가 완공되면 군산과 장항은 완벽한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일 것이고 더욱 교류가 활발해질 것이다.
구 군산세관 1 - 아는 만큼 보인다
오늘은 시간이 많지 않기에 군산 구석구석을 살펴볼 순 없다. 그렇기에 본정통本町通(일제 강점기의 중심거리)을 거닐며 일제시대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건물을 보고 싶었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기는 군산역사박물관 앞쪽에 그와 같은 건물들이 쫙 펼쳐져 있을 거라 생각해서 역사박물관 앞쪽을 거니니, 공공기관 같은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민가들만 보인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검색해보니, 역사박물관 좌우로 그 당시의 건물들이 있더라.
처음 보게 된 건 구 군산세관이다. 역사박물관 바로 오른쪽에 위치해 있어서 역사박물관을 둘러본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줄지어 서있다. 구 세관 건물의 이국적인 디자인에 눈길이 간다. 하지만 이내 현대의 건물 규모에 비하면 왜소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건축양식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보고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해서 그런 걸 테다. 나는 별 감흥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분주하고 건물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있으니 그 모습이 신기할 밖에. 이 사람들에게 이 건물은 어떤 의미일까?
하지만 막상 돌아와 건물에 대한 역사를 알아보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군산의 근대식 건축물은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줄만 알았는데, 이 건물은 특이하게도 대한제국 시기인 1908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쇄국정책에서 개방정책으로 정책을 바꾼 후에 1883년에 인천, 부산, 원산 등의 주요항구를 개항하였고, 이후 군산도 1899년 5월 1일에 개항한다. 개항한 항구엔 조계지租界地를 두어 외국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며 상업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군산세관은 바로 그런 상업 활동을 감시하고 세금을 매기기 위해 인천세관 산하 기관으로 건설된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알고 보니, 구 군산세관이 남달라 보이더라. 어쩐지 건물이 일본풍이 아니라 했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건축양식을 ‘서양고전주의’ 양식이라 한단다. 현재 남한엔 ‘서양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이 서울역, 한국은행, 군산세관 3곳만 남아 있다고 한다. 두 군데는 서울에 있는데 멀고도 먼 군산에 그런 역사성을 지닌 건물이 있다는 게 반가웠다. 알기 전엔 ‘특이하지만 초라한 건물’이었는데, 알고 나니 ‘의미도 있으면서 특별한 건물’이 되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구 군산세관 2 - 군산세관과 제2롯데월드
건축물이 시간이 지난 후 각광을 받고 ‘역사적인 건물’로 남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당연히 ‘무언가 우수한 게 있거나 역사적인 가치가 있기에 남았겠지’라고 생각했다. 경복궁이나 석굴암, 수원화성 등은 그 시대를 담은 건축물이기에 지금껏 이름을 날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제2롯데월드에 대해서는 ‘어떠한 역사적인 가치는 볼 수 없고 인간의 가장 말초신경적인 욕망만 추구하고 있기에 문제가 된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친구는 “지금 남아 있는 과거의 건물들이 그 당시엔 일반적인 건축양식이었을 텐데 지금은 유적지가 되었듯, 제2롯데월드도 현대의 건축양식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그와 같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게 단순히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 그대로 현재 ‘과거의 유산’이라고 남아 있는 것 중엔, 군산의 ‘히로쓰 가옥(일제 강점기 당시의 포목으로 떼돈을 번 일본인이 만든 으리으리한 집)’이나 ‘청남대’처럼 어떤 욕망의 극치를 보여준 곳도 있으니 말이다. 결국 과거에 어떤 현재적인 의미를 부여하느냐, 그리고 그게 얼마나 현대인들에게 어필하느냐에 따라 남을 수 있거나, 사라지거나 하는 건 아닐까?
이쯤 되니 많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렇다면 구 군산세관과 제2롯데월드는 정말 같은 의미의 건축물이란 걸까? 아니면 이런 식으로 애써 다른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한 걸까? 아직은 여기에 대해 어떠한 말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장미동 1 - 장미동엔 장미가 없다?
구 군산세관에서 군산역사박물관쪽으로 길을 따라 걸어가면 연거푸 근대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야말로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물자들이 일본으로 쏙쏙 빠져나가며 호황을 이루였던 곳이다. 그런데 하필 이곳의 이름이 ‘장미동’이다. 어랏? 일본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 있는 곳 이름이 하필 ‘사쿠라동’이나 ‘벚꽃동’이 아닌 ‘장미동’이라니 깜짝 놀랄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과 관련된 곳이란 이미지를 지우려 이름을 바꿨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미’라는 꽃이름을 붙인 이유가 궁금했다. 예전엔 이 주변에서 장미를 집단적으로 키워냈던 곳이었을까? 서울의 잠실蠶室이 조선시대만 해도 누에고치를 키워 명주실을 뽑아내 옷감을 생산해냈기에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처럼, 이곳도 ‘장미를 키워낸 곳이기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장미를 재배하는 곳이 있나 살펴보니, 그런 곳은 보이지 않더라.
이상한 마음에 자료를 검색해보고서야 나의 무식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한문을 전공했다는 사람이, 너무도 단순히만 생각했으니 말이다. 장미는 ‘薔薇Rose’가 아니라, ‘臟米’였다. 째보선창 근처엔 정미소가 있었고 그곳엔 쌀을 저장하기 위한 저장소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배가 정박하면 그 쌀들을 배에 실어 일본으로 보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이곳의 지명은 일제 수탈의 가장 정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고, 아주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장미동에 돈과 관련된 근대 건축물이 많은 이유는 이미 지명으로 충분히 설명이 될 정도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장미동엔 장미는 없지만 역사는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장미동 2 - 장기18은행과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흥망성쇠
처음으로 보인 건물은 ‘장기18은행’이다. 네모반듯한 모양의 건물로 그 시대의 군산의 위상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이 건물은 은행 건물로 사용되다가 최근엔 대한통운에서 창고로 사용했다고 한다.
조금 더 걸어가면 ‘조선은행 군산지점’이 보인다. 조선은행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일본의 조선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활용되었다. 조선의 경제권을 틀어쥐기 위해서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군산에 세워진 조선은행은 한양 이남에 이와 같은 거대한 건물은 없었다고 하니 군산이 강점기 당시에 어느 정도의 위상을 지닌 도시였는지 알만 하다. 이렇게 대단한 의미를 지닌 건물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퇴물 취급을 받게 되었고 결국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바로 나이트클럽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선배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땐 ‘장난이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정말 그랬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이 경우야 말로 건축물이 후대에 남겨 지는 이유가 ‘무언가 우수한 게 있거나 역사적인 가치가 있기에 남았겠지?’라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쇠락한 융성
‘장기18은행’과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을 보면서 건축물이 역사가 되는 것도 복잡미묘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선배는 “해방 후에 군산은 발전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개발에서 소외되며 그와 같은 건물들이 남겨지게 된 거야”라고 말해주더라. 이 말이 100% 사실일 순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맞는 얘기일 것이다. 1930년대 군산은 가장 호황을 누렸으나 해방이 된 후 철저히 소외되며 쇠락해갔다. 그 상황에서 남겨진 건물들은 처치불능의 건물들이 되었을 테고 그렇게 나이트나 대기업의 창고 역할을 하며 연명했던 것이다. 만약 그 때 군산이 발전했다면 아마도 그런 건물들은 모조리 부수고 새 건물을 세웠을 것이니 말이다. 때론 발전하지 않았기에 옛 가치들을 더 많이 지니고 있어서 후대엔 각광을 받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삶의 반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2시간 정도의 짧은 군산 여행을 마쳤다. 다음엔 좀 더 군산을 공부한 후에 제대로 둘러봐야 겠다. 이번 군산 여행을 통해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역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닌, 그 때의 관념에 따라, 사회의 요구에 따라 재창조될 수 있는 유동적인 흐름이라는 것을 말이다.
목차
사람의 이야기가 담길 때, 공간의 의미는 달라진다
똑같다고? 그럼 역사를 배워봐
옛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나의 이야기
군산역과 도깨비 시장
째보선창과 군장대교
구 군산세관 1 - 아는 만큼 보인다
구 군산세관 2 - 군산세관과 제2롯데월드
장미동 1 - 장미동엔 장미가 없다?
장미동 2 - 장기18은행과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흥망성쇠
쇠락한 융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