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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Feb 14. 2016

언어엔 정신이 담겨 있다

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 36 - 15.10.9(금)

 

▲ 여주 → 양평 배로농원  / 58.04km

       


오늘은 익숙한 길을 달리기도 하고 아무리 천천히 가도 5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라 여유 있게 시작하기로 했다. 아이들에겐 9시 30분까지 나오라고 했다. 

어제 아침에 재익이가 건의했던 것처럼 오늘부턴 선착순으로 점수를 주지 않고, 시간대별로 점수를 주기로 했다. 시간대별로 체크하니 민석이, 재익이, 현세는 30분이 되기 전에 내려와서 출발할 준비를 하는데 준영이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더라. 준영이는 20분 늦게 9시 50분이 되어서야 내려왔다.                



▲ 준영이가 내려올 때까지 시간이 있어서 각자의 일을 하다가, 용돈기입장을 쓰기 시작했다.




용돈 미션잘 하는 사람은 여전히 잘하고 정작 해야 할 사람은 하지 않는다

     

자전거 여행 기간 동안 계속 진행된 미션으론 용돈미션이 있었다. 21.000원을 각자에게 주고 7일 동안 그 돈을 적자가 나지 않도록 0원에 가깝게 쓰는 미션이다. 그러려면 쓸 때마다 얼마를 썼는지 기입하여 체계적으로 돈을 지출해야만 한다. 

이 미션을 하는 이유는, 넉넉하게 용돈을 받고 자란 아이들답게 별로 돈을 쓸 줄 모르기 때문이다. 있으면 한 번에 다 써버리던지, 아예 쓰지 않던지 돈을 고민하며 써본 적이 없기에, 이 미션을 통해 조금이나마 돈에 대한 생각이 바뀌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이상적인 것일 뿐이기에 현실에선 달라지게 마련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가 있고, 기대치가 있다 할지라도, 그걸 실행하는 건 아이들이니 어그러질 수밖에 없다. 이 미션을 짤 때만해도 편의점에서 간식을 살 때마다 얼마를 지출했는지 규칙적으로 적고 관리하길 바랐는데, 그나마 민석이만 꾸준히 했을 뿐 재익이와 현세는 “내가 다 기억하고 있으니 기록하지 않아도 되요”라고 호언장담하며 뭉개버렸고, 준영이는 아예 용돈 미션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준영이가 내려올 때까지 아이들은 부랴부랴 용돈기입장을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희미해진다. 그러니 재익이와 현세는 열심히 기억하여 적고 있지만 여러 가지를 빠뜨리고 적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민석이는 틈틈이 적어놓은 게 있어서 거의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이 미션이 정작 필요한 사람은 재익이와 현세였는데, 그 둘은 늘 하던 대로 별로 생각 없이 돈을 썼고 대충대충 하기만 했다.                



▲ 현세가 쓴 용돈기입장. 아무래도 한참이 지난 후 기억에 의존해서 써야 하니, 빠진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다.




훈민정음 미션 1 - 한글날을 기념하는 미션

     

오늘은 569돌 한글날이다. 우리 민족의 위대한 유산이며 자부심이 느껴지는 세계적 발명품이니만치 이 날을 기념하여 ‘훈민정음’이란 미션을 하기로 했다. 

훈민정음은 영화팀 아이들이 심심할 때마다 하는 게임 중 하나다. 규칙은 간단하여, ‘한글 외에 외국어를 쓰면 맞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게임을 할 때마다 억지로 영어를 쓰도록 유도하곤 한다. 예를 들면, “오늘 학교 끝나고 물고기방(피씨방)에 갈 건데, 너 그 때 무슨 놀이(게임) 할 거냐?”라고 물으면, 대부분 별 생각 없이 “롤(League Of Legends)”이라고 대답하게 되고 그 때문에 맞게 된다. 외국어 고유명사를 대답하도록 유도하여 때린다. 

오늘 하는 훈민정음도 이와 같은 형식은 그대로 유지하되, 좀 더 규칙을 강화하기로 했다. 외국어, 은어, 일베어까지 모두 포함하여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규칙은 모두에게 500점의 점수를 주고 그런 용어를 쓸 때마다 체크하여 30점씩 깎기로 했다.                



▲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묻자, 민석이가 개천절이라 대답했다.




훈민정음 미션 2 - 적용 범위를 좁히다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재익이가 “오늘 리더는 제가 할 거예요”라는 말을 했고, 아이들은 ‘리더’라는 영어를 썼다며 재익이의 점수를 깎아야 한다고 목소릴 높였다. 그랬더니 재익이는 대뜸 “전 오늘 아무 얘기도 안 합니다”라고 선언하며, 혼잣말로 “말을 못해 말을~”이라고 하소연을 한다. 자칫 잘못하면 시작도 하기 전에 서로의 감정이 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부터 문제점이 드러난 만큼 규칙을 바꿔야만 했다. 그래서 적용범위를 좁히기로 했다. 처음 규칙대로 진행했다가는 아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펜션까지 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문제가 되는 은어, 비속어, 일베어로만 한정하며 외래어나 외국어는 써도 된다고 열어놓았다. 그러자 민석이는 “외국어도 꼭 포함해야 돼요”라고 강도 높게 항의하더라. 외국어까지 포함해야 게임이 재밌어진다는 게 민석이 생각이었는데, 말만 했다하면 걸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민석이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도록 했다.                



▲ 너무 범위가 광범위하여 말을 할 때마다 걸리게 되는 상황이 생길 수 있기에 규칙을 바꿨다.




훈민정음 미션 3 - 일베용어가 일상용어를 대체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미션은 실패했다. 그 이유는 지금 중고등학생들의 언어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내가 학생일 때도 학생들의 언어파괴는 늘 기사거리가 되어 오르내리곤 했다. 신조어를 만들어 쓰면 한글을 파괴한다며 좋지 않게 본 것이다. 

지금도 그런 풍조는 여전하여 아이들은 아예 ‘ㅇㅇ(응)’, ‘ㅈㅅ(죄송)’과 같이 자음만 써서 의사소통을 하거나 ‘데헷’, ‘개~~(정도가 심할 때 붙이는 수식어)’와 같은 단어를 만들어 쓰기도 한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새로운 언어 현상이니 우리 때 만들어진 신조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새로운 언어현상으로 부각되고 있는 일베어의 사용이다. 일베어는 새로운 의미를 담은 단어를 만든 게 아니라, 특정 인물을 비하하고 특정 지역을 폄하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 때 흔히 쓰이는 ‘운지’, ‘부엉이’, ‘홍어’, ‘~~노?’ 따위의 말들은 놀리고 비꼬기 위해 쓰는 말이다. 그런데 아이들 사이에 이게 유행처럼 퍼져 점차 그 단어를 쓰지 않으면 ‘또래문화’를 거부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 말을 쓰지 않으면 ‘혼자 고고한 척은 다해’라고 평가되며 또래와 어울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아이들도 처음엔 또래와 어울리기 위해 시작했다가, 점차 그 말에 대한 반응이 재밌어서 더욱 더 하게 되며, 결국엔 버릇처럼 굳어져 일상언어처럼 사용하게 되었다. 



▲ 알면 쓰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이게 청소년 문화로 자리잡혀 가고 있어 쉽지만은 않다.



이런 현실에서 ‘일베어를 쓰지 말자’는 미션을 하게 되었으니, 말만 했다 하면 걸릴 수밖에 없었고, 내가 혹 듣지 못한 경우 그 얘기를 들은 다른 아이들이 와서 알려주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런 단어를 쓰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나기보다 일러바치는 주위 친구들에게, 점수를 깎고 있는 나에게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오후엔 그렇게 쌓였던 감정이 폭발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얘기는 다음 후기에서 하도록 하겠다. 어찌 되었든 이런 상황 때문에 훈민정음 미션은 마무리를 제대로 짓지 못하고 중단해야 했다.  


▲ 진중권의 일베에 대한 분석. 명쾌하다고 생각한다. 일베를 하는 사람들은 약자지만, 그들은 약자를 공격으로 대상으로 삼으니 말이다.



              

훈민정음 미션 4 - 언어는 정신이다 

    

꼰대의 말처럼 들릴지는 모르지만, 나는 ‘언어=정신’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말을 쓰고, 어떤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정신에도 영향을 받고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단어나 언어엔 그 단어가 만들어진 역사성이 숨어 있고 그건 정감으로 남아 심상에 자리한다. 그래서 ‘예쁘다’라는 단어를 쓰면 쓸수록 내 자신이 예뻐지고, ‘짜증난다’는 단어를 쓰면 쓸수록 감정에도 짜증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일베어나 은어처럼 누군가를 향해 불만을 잔뜩 품은 언어를 입에 담고, 그걸 계속해서 쓴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자신의 감정을 망가뜨리고 혼란에 빠뜨리며 해소되지 않는 불만을 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전에 MBC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했던 적이 있다. 쌀밥을 담아놓고 그 밥에 말을 거는 것이다. 한쪽 컵엔 좋은 말만 하고, 다른 컵엔 나쁜 말만 한다. 좋은 말엔 좋은 기운이 담겨 있고, 나쁜 말엔 나쁜 기운이 담겨 있으니 그 기운이 그대로 전달되어 밥의 상태는 극과 극으로 변했다. 밥이 그럴 정도면 그 말을 직접적으로 계속 들어야 하는 나의 정신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말은 그냥 말이 아니다. 거기엔 정신이 담기고 자신의 정감이 담긴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으로라도 좋은 말을 쓰려고, 누군가를 비꼬기 위해 만들어진 말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건 어찌 보면 남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나 자신을 위한 거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에겐 이런 마음이 가닿진 않았지만, 이런 미션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말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행동도 바뀌게 되니 말이다. 

오전엔 신륵사에 가서 미션을 하면 된다. 출발할 때 시계를 보니 어느덧 10시 30분이 넘었다. 우선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재익이 자전거를 고치려 자전거점에 갔다. 거기서 본드까지 구입하고 보니, 마음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이제 모든 준비는 다 마쳤다. 오늘 하루 동안 신나게 달리면 된다. 그러면 출~발!



▲ 자전거점에서 자전거를 고치고 본드까지 샀다. 준비가 완벽히 됐으니 이제 맘껏 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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