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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Feb 14. 2016

누구나 자신만의 여행을 떠나야 한다

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 35 - 15.10.9(금)

  

▲ 여주 → 양평 배로농원  / 58.04km


        

6박7일 일정으로 떠난 여행이 어느덧 6일차에 접어들었다. 내일이면 목적지인 올림픽공원에 도착하고 때론 걱정으로, 때론 즐거움으로 달렸던 낙동강-한강 자전거여행은 끝이 난다.                



▲ 어제 뜻하지 않게 야간 라이딩을 해야 했다. 이게 바로 여행의 묘미다.




여행이 일상이 된 시대에 여행을 떠나야 한 

    

흔히 여행은 배부른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곤 한다. 물론 예전처럼 한 마을에서 나서 거기서 쭉 자라다 옆 마을 처녀와 결혼하여 자식 낳고 살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치는 세상이 아닌, 공부를 위해서건 취직을 위해서건 어쩔 수 없이 마을을 떠나 타지로 나가야 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여행에 대한 이미지는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삶이 바쁘다는 이유로, 돈이 없다는 이유로 반복되는 일상에만 머물 뿐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을 떠나기 위해선 결단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누군가는 “요즘처럼 여행을 많이 다니는 시대도 없는데, 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황당해할지도 모른다. 맞다, 주말이면 주요 고속도로가 늘 막히며 각 관광지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러니 요즘 세상을 ‘여행이 일상이 된 세상’이라 표현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던 여행과 주말마다 떠나는 여행엔 다른 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말해야 한다. 여행엔 두 가지 유형이 있으며, 우린 두 번째 유형의 여행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 국내여행은 물론이고 해외여행 인구도 1600만명에 달하는 시대가 왔다. 이런 시대에 더욱 더 여행을 떠나야만 한다고 외쳐본다.




두 가지 유형의 여행

     

첫 번째 유형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고 하고 있는 여행으로 ‘스쳐감의 여행’이라 표현할 수 있다. 남들이 다 떠나기에 우리도 떠나, 그곳에 가서 먹고 즐기고 온다. ‘스쳐감의 여행’은 일상을 살아내느라 쌓인 스트레스를 풀 때, 뭔가 삶의 쉼표를 찍고 싶을 때, 소중한 사람과 추억을 만들고 싶을 때 떠나면 제격이다. 단재학교에서 매학기에 떠나는 전체여행이 바로 ‘스쳐감의 여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곳을 가든지 거기는 내 의식에 스며든 ‘그곳’이 아닌 나와는 동떨어진 ‘배경’에 불과하기 때문에 삶을 되돌아본다거나, 생각 한 가운데 틀어박혀 당연하게 여겨지는 생각을 되짚어볼 수는 없다. 그저 먹고 즐기며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새로운 감흥만을 느끼면 된다. 그러니 여행을 떠난 장소와 마주치지 못하고 그저 스쳐가는 정도의 감상만 남기에 ‘스쳐감의 여행’이라 정의한 것이다.



▲ 2015학년 2학기 때 부안 변산 전체여행을 떠났었다. 그곳에서 우린 '스쳐감의 여행'을 했다.



두 번째 유형은 한 번쯤 떠나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행으로 ‘마주침의 여행’이라 표현할 수 있다. 마주치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 관념을 떨쳐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건 의식적으로 떨쳐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상황에 부딪히며 그때서야 ‘내 생각이 너무 협소했다’고 느끼거나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되네’라고 느끼거나 해야 한다는 말이다. 상황과 마주치고 감정과 뒤엉키고, 장소와 부딪히기에 의식에 균열이 생기고 그로 인해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마주침의 여행’이라 정의한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자전거 여행이야말로 ‘마주침의 여행’이라 할 수 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혀 밤늦도록 추위에 벌벌 떨며 함께 기다려주기도 하고, 서로 감정이 상하여 한 마디도 하지 않기도 한다. 극한의 상황에 내몰렸을 때 비로소 나의 대처능력을 볼 수 있으며,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들여다 볼 수 있다. 환경이 좋고 관계도 좋을 때 ‘좋은 사람인 척’하는 건 쉽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선 자신의 본심이 나오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선 갑작스런 행동이 나와서 ‘좋은 사람인 척’하는 건 어렵다. 그건 그 사람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갑작스런 상황에선 긴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로 그 때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생각을 되짚어볼 수 있는 순간이라는 얘기다.                



▲ '마주침의 여행'을 위해 동서울 터미널에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는 아이들.




그렇기에 우린 마주침의 여행을 떠나야 한다 

    

‘스쳐감의 여행’과 ‘마주침의 여행’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행들이다. 어느 게 더 우위에 있다거나, 어느 게 더 좋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스쳐감의 여행’은 이미 우리 사회에 보편화되어 누구나 크게 고민할 필요 없이 할 수 있는 여행인데 반해, ‘마주침의 여행’은 그렇지 못하다. ‘마주침의 여행’을 떠나려면 혼자서 떠날 수 있도록 강해져야 하며, 나를 가로막는 수많은 것들을 잠시 뒤로 미루고 나만을 생각할 수 있는 강단이 필요하다. 그런 용기와 강단이 없으면 스스로에게 ‘일상도 팍팍해 죽겠는데, 무엇하러 여행까지 가서 골치 아프게 있냐?’며 떠나지 않을 핑계를 만들거나, 스스로는 맘을 먹었다 할지라도 주위에서 “나중에 생활이 좀 괜찮아지면 그 때 여행을 하든지, 뭘 하든지 해”라는 만류하는 말을 듣고 그만두게 된다.

그런데 예전에 사람들을 만나보니, 마음 깊숙한 곳엔 ‘마주침의 여행’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상의 답답함을 벗어나 이상의 새로움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떠나고는 싶되,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못 떠나고 있을 때 한비야씨가 쓴 책을 읽으며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한비야씨야말로 ‘마주침의 여행’을 긍정하며 떠날 수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것도 지금처럼 혼자 떠나는 여행. 만나는 모든 상황과 사람들 사이에서 나 자신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스스로에 대한 고정관념이 많이 깨지고 있다. 또 일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내가 객관적으로 보이고 때때로 예상치 않게 멋진 자신을 만날 수도 있었다.

-한비야,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푸른 숲, pp 48   


       

일상에서 떠나봐야 나를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그 때 보는 모습은 실망스런 모습과 함께 평소엔 몰랐던 괜찮은 모습도 있다. 그녀의 책은 나에게 ‘이런 저런 핑계야말로 두려움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줬다. 그래서 2009년에 도보여행을 떠날 수 있었으며, 그게 하나의 계기가 되어 단재학교에서도 이런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처럼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없다고 주저앉지 말고, 현실의 한계를 생각하며 단속하지 말고 몸이 원하는 그대로 떠나면 된다. 그러면 그 때부터 그대의 속에 꼭꼭 감춰둔 이야기가 샘솟듯 흘러나올 것이다.                



▲ 맘이 이끄는 대로, 몸이 원하는 대로 떠나보면 된다. 그 때 그 감정에 충실하며.




아이가 자랄 때 필요한 건, 넉넉함이 아닌 적당함이다

     

우리가 자라면서 ‘나는 비록 이렇게 살지만, 자식에게만은 그런 환경을 물러주지 말아야지’라는 바람을 갖게 마련이다. 그게 권위주의적인 가정환경일 수도 있고, 원하는 걸 맘껏 못하는 가난한 환경일 수도 있으며, 부부싸움이 연일 일어나는 전쟁터 같은 환경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현실적인 문제라고 느껴지면 그걸 가슴 속에 담아뒀다가 그와 같은 환경을 자식에겐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우리집도 예전엔 정말 가난해서 원하는 것을 하며 살 수는 없었다. 그러니 무언가를 욕망할 수도 없었으며,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엔 ‘내가 원하는 게 뭐지?’라며 헛갈릴 정도였다. 그런 환경을 받아들여야 하는 아이는 단순히 ‘나의 모든 문제는 가난함에서 비롯되었으니, 커서 자식을 낳으면 그런 불행의 고리를 끊어야지’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꼭 나의 모든 문제들이 가난한 환경 하나로 생겨난 것처럼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단재학교에 와서 깨졌다. 단재학교 아이들은 대부분 넉넉한 환경에서 원하는 것을 쉽게 받으며 원하는 것을 맘껏 하며 자라왔다. 그러니 내 생각대로라면, 단재아이들은 인성도 바르고 생각도 올곧으며 감정적인 상처도 없어야 한다. 나의 모든 문제는 ‘가난’ 때문이라 치부했으니, 가난이 말끔히 제거된 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내 생각은 너무나 인간을 단순하게 생각한 거였다. 하나의 요인은 수많은 요인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인데, 그걸 너무 일반화하여 전체인양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에겐 ‘부족함’이 문제였다면, 아이들에겐 반대로 ‘풍족함’이 문제라는 걸 볼 수 있었다. 아이가 원하기 전에 모든 것을 채워주고 아이가 문제라고 느끼기 전에 부모가 먼저 해결해 준다. 그러니 아이는 자기 스스로 뭘 원하는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자라며 그에 따라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내 생각도 일정 부분 바뀌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넉넉하여 맘껏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 충분한 고민과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길 정도의 적당한 결핍이 있는 환경이라고 말이다. 그러려면 부모가 너무 앞장서서 모든 것을 해결해주고 사주며 누릴 수 있게 해서는 안 된다.                



▲ 넉넉함과 부족함은 같은 것이지만, 세상은 부족함만을 탓하지 넉넉함에 대해선 탓하지 않는다.




현세의 리더십, 책임감을 다하다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현세가 이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지금껏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할머니와 엄마가 해주며 자라왔다. 그러니 기본적인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황을 파악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거의 알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건 아무래도 학교와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는 곳에서 문제로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머리는 비상한데, 무언가를 할 땐 거의 하지 못하니 자꾸 부딪히게 되니 말이다. 그래도 단재학교에서 2년을 생활하며 이젠 어느 정도 눈치라는 것도 생겼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법도 알게 되었기에 리더역할도 잘 수행할 거라 기대했다.

형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니 주눅 들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 물론 초반에 길을 잘못 들었을 땐 난감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곧 안정을 찾았다. 더욱이 사마귀를 살리기 위해 목을 잡고 옮겨준 행동이나, 재익이 자전거의 바퀴가 펑크 났을 때 사람들에게 가서 본드를 얻어온 행동은 리더로서 책임감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 현세는 책임감으로 최선을 다했다. 현세의 이런 모습 처음이야~




현세의 리더십, 진지할 때조차 장난스럽게

     

아이들은 현세에 대해 그렇게 기대를 하지 않아서인지, 부정적인 평가는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길도 나름 잘 찾아갔고, 본드도 구하려 노력했으니 부정적으로 평가할 게 없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그래서 현세도 자기 스스로 “(리더 역할을 한 것에 대해) 딱히 아쉬운 점은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아쉬운 부분이 보인다. 현세는 늘 ‘개그캐릭터’를 유지하고 있다. 늘 음악을 흥얼거린다거나, 진지한 상황에서 장난을 치며 그 상황을 와해시키려 한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그런 모습은 진지해야만 했던 어제에도 그대로 보였다. 아마도 여태껏 진지하게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를뿐더러, 스스로 어색하게 느껴져서 그러는 것 같았다. 이제 곧 있으면 17살이 되는 만큼 진지할 땐 진지하게, 장난칠 땐 장난스럽게 상황에 맞게 행동할 수 있길 기대해본다.

오늘부터는 리더를 모두 다 한 번씩 해봤기 때문에 정식적인 리더는 없이 자전거 여행을 해야 한다. 오전에는 신륵사에 가서 미션을 진행할 것이고, 그 후엔 계속 달려 펜션에 도착하여 파티를 거하게 하면 된다. 내일이면 자전거 여행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오늘은 마치 덤으로 주어진 날처럼 느껴진다.



▲ 분명히 말하면 리더역할을 잘 했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은 없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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