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학교 교사 4년차의 각오
단재학교에서 4년 차에 접어들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이젠 이곳에서의 생활이 몇 년 입어 늘어진 옷만큼이나 편하게만 느껴진다.
1년 차엔 모든 게 낯설었기에 적응하기 위해, 전혀 다른 생명체였던 18명의 아이들과 조금이라도 친해지기 위해 분주했다. 나란 인간이 원래 모난 인간이고, 붙임성이 현격히 떨어지는 인간인데다 나름 고집까지 있는 터라 많은 사람에게 뜻하지 않게(?) 생채기를 내며 배워가던 시기였다.
그 시간이 지나 2년 차에 접어드니 이젠 나름 지낼 만 해졌다. 교사라는 위치가, 그리고 아이들과 친구처럼 격 없이 지낼 수 있는 대안학교라는 풍토가 금방 적응할 수 있도록 한몫했다. 그리고 1년간의 아웅다웅으로 아이들과도 어느 정도 접점을 찾았다. 역시 누구나 한 순간으로 평가 받는 건 당연히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여건인가, 아닌가가 결국 핵심이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갈등이 생기든, 자신의 모남이 드러나든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 함께 견디어 나갈 시간이 주어졌느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단재학교에선 나의 한계를 직시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해주었기에, 함께 옥신각신하며 1년이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덕에 교사가 되기 전, ‘교사가 되면 이런 것들은 꼭 해봐야지’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할 수 있는 시기였다.
3년 차엔 학교 내부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표교사인 준규쌤이 초등대안학교로 자리를 옮기셨고, 학교는 강동구에서 송파구로 이전했다. 내부조직의 변화는 나 자신에게 위기임과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대표교사쌤이 정신적인 지주였기에 그분에게 배울 수 있었고, 무언가 새로운 비전을 꿈꿀 수 있었는데 그 대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에 있어서는 위기였다. 이상과 현실을 매치시키고, 상상 이상의 꿈(실패할 각오로 해보세요)을 꾸기 위해서는 아름드리 나무도 필요한 법인데, 2년간의 가르침을 끝으로 더 이상 배울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그래서 비정기적으로 만나며 여러 가르침이나 상상을 듣고 있긴 하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단재학교에서 나의 입지는 더욱 커졌다. 초임교사이던 시절엔 적응하며 학교는 어떤 철학과 방침으로 운영되는지 이해하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이젠 학생에 대해 어떤 비전을 그리는지, 어떠한 학교를 만들고 싶은지 거시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적응의 단계를 지나 적용의 단계로 진입한 것이고, 앞으론 적용의 단계를 지나 상상의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학교이전으로 교육 환경이 바뀌다 보니 분위기도 180° 바뀌었다. 둔촌동에 있을 땐 빌딩 내에 자리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학원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뭔가 활동적인 수업보다 강의식 수업을 하기에 알맞은 공간 구성이었다. 하지만 송파동은 단독 주택이기에 좀 더 학생 친화적인 대안학교 분위기가 물씬 풍기며, 공간 활용이 자유로워 생각의 전환만 가능하다면 다양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공간 구성이다. 인간은 ‘틀이 바뀌면 꼴이 바뀐다’고 하던데, 이에 ‘공간이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를 추가해야 한다. 바뀐 공간에서 어떠한 단재학교를 만들어 갈 것인지 그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러한 시간을 단재학교에서 지내왔기에 이젠 학교생활이 어색하지도, ‘이 길이 나의 길이 맞나?’ 고민하지도 않게 되었다. 이렇게 편해진 만큼 오히려 평소에 그려왔던 것들을 해나갈 수 있는 시기이며, 새로운 것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뭔가 술술 풀리고 모든 것이 ‘합심하여 선을 이루어 간다’고 생각될 때, 자칫 잘못하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매너리즘의 기본 심리는 ‘다 갖춰졌다’는 생각이다. 그건 곧 스스로가 완벽하다고 생각하기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떤 분야에서 단기간의 성취를 이룰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장기간으로 봤을 땐 자신이 있는 공동체에게나 학생들에게나, 자신에게나 크나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렇다면 단재에서의 4년은 어떤 식으로 만들어 가고 싶은 걸까? 1학기가 끝나가는 이 시점에 한 번 정리를 하고 싶었다. 나는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으며, 어떤 꿈을 꾸며, 이상과 현실을 어느 정도 일치시키며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서다.
두 가지에서 영향 받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5년이 지나도 지금과 똑같을 것이다.
그 두 가지란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우리가 읽는 책이다. -찰스 존스
오늘 아침에 라디오를 듣던 중, 위의 말을 듣는 순간 귀가 확 열리는 듯한 체험을 했다. 위의 얘기는 사람의 성장이 어떤 것들의 영향으로 이루어지는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자신을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 고백하기도 했지만, 찰스 존스는 ‘책과 사람’이라고 단호하게 고백하고 있다. ‘책’은 곧 타자의 의식이 활자로 굳어진 것이며, ‘사람’은 활발발한 의식의 흐름이 개체로 표현된 것이다. 결국 두 가지로 나누어 표현했을 뿐, ‘나 외에 다른 존재와 만나라’라는 메시지라고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하게 들 때쯤, 어느 정도 기틀이 잡혀 안정적이 될 때쯤, 어떤 고민도 없이 일이 술술 풀릴 때쯤 한 자리에 머물려 하지 말고 외부로 의식의 촉수를 펼치라는 조언이다.
그런데 단순히 다른 존재를 만났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로 끝나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수 만권의 책을 읽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만나기 전과 만난 후가 완벽하게 똑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 또 다른 누군가는 면벽수행을 했을 뿐인데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이건 만남이란 행위 너머에 어떤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왜 이와 같은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팔기 위해 월나라로 갔다.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하고 있어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장자』 「소요유」
宋人資章甫而適諸越, 越人斷髮文身, 无所用之.
‘만났느냐’의 문제 이전에 가장 중요한 문제가 ‘소통할 마음이 있느냐’라는 것임을 위의 문장으로 알 수 있다.
위의 문장이 어떤 상황 속에서 나온 얘기인지 살펴보자. 송나라와 월나라, 두 나라가 있다고 치자. 하지만 송나라의 문화와 월나라의 문화는 근본부터 달랐다. 송나라는 성인이 되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이 되면 모자를 써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는 문화지만, 월나라는 사람이 자라면 머리를 자르고 몸에 문신을 하여 사회적인 지위를 드러내는 문화이다. 이 두 나라가 여태껏 그래왔듯이 교류하지 않고 고립되어 있었다면, 문화의 차이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장보라는 모자를 팔고자 하는 송상宋商이 등장하면서 차이는 현실적인 문제가 된다. 적어도 송상 자신에게는 말이다.
상인은 모자를 팔러 가면서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 월나라에 가면 모자 수요가 급증하여 자신이 거상이 될 거라 김칫국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 월나라에 가서 본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월나라 사람들이 모자라는 생소한 물건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고, 전혀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니 송상은 얼마나 그 상황이 황당했을까.
바로 이게 타자를 만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타자는 내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어떤 존재이기에 의식이나 지식으로 결코 단순화시킬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를 만났다고 하여 나에게 변화가 있거나, 상황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거나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송상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자가 팔릴 수 없는 문화’라고 멋대로 규정짓고 송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은 객관적으로 판단한 결과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송나라의 문화로 규정지은 것이기에 선입견에 따른 판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방법은 타자를 만났으되 만나지 않은 것과 매한가지라 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만나지 않은 것만도 못한 결과라고 해야 맞다. 만나지 않았으면 월나라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기에 언제든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만남으로 오히려 고정관념만 더욱 굳어져 소통의 가능성마저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다른 하나는 절망을 받아들이고 월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송나라에 살았기에 송나라의 문화에 익숙해졌다면, 월나라에 산다면 어느 순간 월나라의 문화에도 익숙해지게 될 것이다. 문화적 차이라는 것도 어찌 보면 공동체 양식에 따른 편견체계라고도 할 수 있다. 88올림픽 당시에 서양이 비판한 ‘개고기 식용 문제’는 윤리적인 차원의 비판이라기보다, 문화적인 차원의 비난에 가까웠다. ‘나와 다른 것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동양은 미개하다’는 생각이 기저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 서양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몇 년 정도 살았다면, 그리고 개고기 문화가 왜 생긴 것인지 알게 되었다면 그런 식으로 비난을 하진 못했으리라. 이처럼 송상도 월나라에 살면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송나라 문화 잔재를 점차 벗어버리게 되었다면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송나라에서 익숙해졌던 관념으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때에 월나라의 문화적 문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송상은 마침내 월나라 문화에 익숙해지며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할 수 있다.
난 월나라에 남아 그들의 문화를 점차 받아들이며 변해가는 송상이고 싶다. 단재학교에서 4년 정도 학생들을 만나고 있기에 이 문제는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학생들을 만나며 나의 생각에만 갇혀 그들에게 강요하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지식만을 가르치는 매뉴얼화된 교사가 될 것이냐? 학생들 개개인을 이해하며 그들의 문화적 맥락을 받아들이고 함께 변해갈 수 있는 교사가 될 것이냐?’하는 것이 4년차 이후의 교사상을 그릴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라 생각한다.
단재학교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교사 경력이 쌓이며 교육에 대한 전문가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식의 전문가는 오히려 월나라 사람들을 보고 기겁하여 송나라로 돌아간 상인처럼 편견과 고정관념만 가득한 사람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사 경력은 학생들과 만나 인생의 주름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 갔느냐에 따라 쌓인다고 생각한다. 긴밀하게 마주치고 공명하며 함께 변해갈 수 있도록 노력할수록 주름은 더욱 짙게 남으며 그게 곧 교사 경력이 되는 것이다.
1학기엔 어찌 보면 여태껏 해온 것을 반복하며 현실을 그대로 유지하기만 했다. 고민보단 일상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2학기엔 좀 더 심기일전하여 학생들과 함께 찐하게 뒤엉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