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빵 Nov 21. 2015

이상을 더욱 단단히 벼리라

단재학교 2013년도 1학기를 준비하며 - 단재 교사 1년차 후기

단재학교에 11년 10월부터 근무하기 시작했으니, 이제 갓 1년을 근무한 셈이다. 누구에게나 1년의 기억은 뜻 깊듯이 나에게도 그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1년의 경험으로 교육에 대해 말하는 건 역시나 시기상조다. 햇병아리가 닭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글에선 단재학교에서 1년을 보내며 느낀 소감과 1월 19일에서 20일까지 있었던 학부모 회의에 대한 후기를 적도록 하겠다.                



▲ 방학 중 모인 단재 가족들의 모임. 이 날은 특히 평소엔 잘 나오지 않던 아버님들도 자리를 함께 하여 더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무색무취한 교사를 양성하는 공간, 사범대학 

    

누군가는 ‘사대를 졸업했으니, 교육에 대해서는 전문가급은 아니어도 준전문가급은 되지 않겠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학은 더 이상 고민을 안겨주는 장소가 아닌, 현실을 받아들이고 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장소로 전락해 버렸다.

적어도 내가 1학년 때엔 조금이나마 놀기도 하고, 중앙 동아리에 들어 평소에 하고 싶던 것을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군에서 제대하고 돌아온 대학은 확 달라져 있었다. 신입생들은 학교에 들어오자마자 다양한 것들을 접하려 하기보다 임용을 준비하기에 바빴다. ‘1학년부터 차근차근 준비해도 임용에 합격하기 어렵다’는 비관이 삶의 진리인양 캠퍼스를 짓누르며 너나 할 것 없이 밑도 끝도 없는 맹목적인 질주를 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웃기게도 시험에 집착하는 만큼 교육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임용이 되는 순간 교육자가 된다고 생각했지, 교육에 대한 고민을 해야 교육자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살기 팍팍해진 사람들은 사는 것에만 연연할 뿐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게 된다. 그저 하루하루 버티어내는 삶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육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예비 교사, 그저 가르치는 기술자로 전락한 예비 교사를 사대에선 양산하고 있었다.                



▲  고등학교가 미션스쿨이었고 중창단 단원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합창단에 들어갔다.




삶이 배반한 자리에서 고민이 싹트다 

    

그렇기에 내가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임용에서 떨어지고 난 뒤였다. 맘처럼 풀리지 않은 인생의 비의를 온몸으로 감내하며 ‘왜 교육자가 되려 하는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삶이 생각을 배반한 그 자리에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삶이 순조롭게, 계획대로 진행될 때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다. 계획에 따라 삶이 진행된다고 착각하기에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 양 거만해지며 맘껏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이 생각을 배반한 그 순간에 생각들이 비로소 끼어든다. 지금껏 무의식적으로 해왔던 생각들이 더 이상 나의 삶을 정의할 수 없음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 새로운 생각의 틀로 삶을 재정의 하려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고 살려는 발버둥이다.                




교사는 따르는 사람? 고민하는 사람?     


그래서 예전엔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의식 때문에 교사가 되려 한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정리했던 데 반해, 그 때에 이르러선 좀 더 진실하게 ‘왜 교사가 되려 하는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나 자신은 교사를 될 만한 사람인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첫 술에 배부를 리 만무하듯이, 그저 첫 발을 내디딘 것에 불과한 물음이기에 모든 게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그런 식으로라도 고민하게 되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할 수 있을 터다.

교육은 속내는 ‘어떤 인간을 길러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포함하고 있다. 국가가 정해놓은 인간상이 있고 교사는 그걸 충실히 이행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문제는 국가가 정해놓은 인간상이 잘못되었을 때다. 일제 강점기 때 종군위안부가 되도록 종용한 교사들, 군부시대 때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부추기며 폭력과 사회억압을 묵인하던 교사들, IMF 이후 ‘게으른 자들은 실패한다’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충실한 하수인 역할을 하던 교사들이야말로 충실히 교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들이라 할만하다.

과연 이들을 탓할 수 있는가 없는가? 탓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역할에 충실했던 피해자(아이히만도 이런 케이스다)’였다고 보는 사람일 것이며, 탓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교육을 하는 사람이므로 가치 판단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나 또한 바로 임용이 되는 횡재를 누렸다면 필시 위에서 예로 든 교사처럼 행동했을 것이며, 그게 삶이라 떠벌리며 합리화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삶이 엇나가며 뒤돌아보게 됐고 교육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다. 그저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한 건 자신의 책임을 져버린, 교사로서의 영향력을 폄하한 ‘생각없음’일 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만 ‘생각없음’이면 크게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가 만나는 사람이 생각이나 행동이 형성되어 가고 있는 학생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 이 모습이 어떤 교사에겐 아름다운 모습으로, 또 어떤 교사에겐 이상한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그게 교육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라 할 수 있다.




교육은 끊임없이 지적 허영, 거짓 자신을 벗어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교사가 되려 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왜 교육을 하려 하는가?’에 대한 고민쯤은 해야만 한다. 그게 성장해가는 학생들을 위한 길이며, 사회적으로 규정지어 놓은 교육이란 틀에서 한갓 기계로 전락하는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길이니 말이다. 교육에 대한 고민에 도움을 준 사람들은 고미숙씨와 고병권씨, 그리고 김용옥씨였다.


          

이 척박한 현실에서 희망을 일구는 길은 단 하나, 교사가 먼저 공부에 미치는 것뿐이다. 설령 입시를 위한 것일지라도 선생님이 공부에 미치면 자연스럽게 그 배움의 열정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따지고 보면 본래 교사란 그런 직업이다. 자신이 평생 뭔가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자신이 평생 공부의 즐거움을 누려야 마땅하다. 자신은 공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억압이고 명령에 불과하다.  

-『호모쿵푸스』, 고미숙, 그린비출판사, pp 177          



위의 글은 나에게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나에게 던져진 ‘시지프스의 바위’라 생각한 것이다. 그건 교사가 되려 하는 순간, 배움에 대한 열정을 평생토록 지녀야 하며, 고정된 틀을 매순간 깨야 한다는 의무감이었기에 신나면서도 무거웠다. 그러려면 고정된 인식을 지니기보다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만 하니 말이다.

예전엔 나의 가치를 만들기 위해, 남에게 뻐길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면(그게 임용합격이라 생각했음), 이젠 그렇게 쌓았던 허영들을 무너뜨리기에 분주해져야 했다. 그게 단번에 이루어질 수 없기에 나날이 애쓰는 수밖에 없다.                



▲ 첫 임용시험 보던 날 정문의 풍경. 첫 임용시험의 결과가 나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후 생각해보면 불행이 행운인 경우다.




단재학교의 장점: 이상을 멈추지 말고 더욱 단단히 벼리라  

   

이런 고민의 순간들을 보냈다고 해서 단재학교에서의 일 년이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서의 ‘Oh! Captain! My Captain!’하는 식으로 감동이 넘실대는 배움의 장이 되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고민을 통해 만들어진 이상과 냉혹한 현실이 첨예하게 부딪쳤고 그 속에서 수없이 좌절했다. 열정적으로 한 일인데 그게 학생들에겐 거북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고, 무언가 요구하게 되면 자신들을 믿지 못한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그런 상황이니 어느 순간엔 ‘내가 과연 교사로서 자질이 있나?’하는 비관적인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그런 식의 어려운 순간들, 힘든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게 어찌 보면 인생의 한 단면이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처음 만났는데 갈등 없이 어우러진다는 것도, 나의 의도가 왜곡 없이 전달된다는 것도 꿈에서나 가능한 얘기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좌충우돌하는 순간들이 있었고, 작은 몸짓에 크게 반응하던 때도 있었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능성마저 닫아버린 때도 있었다.

그 순간들을 지나고 보니, 예전엔 이상 속에서 고민하던 생각들을 어느 정도 현실에서 가다듬을 수 있었고, ‘잘 해야 한다’는 강박에 갇혀 한없이 무거웠던 내 자신이 좀 더 가벼워졌다.

바로 이와 같은 좌충우돌이 있고 그 안에 생각을 가다듬고 그걸 통해 깨닫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단재학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부분이다. 이상을 더욱 단단히, 그러면서도 뾰족하게 벼릴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아낌없이 줬다. 아이들과 좌충우돌하더라도 그걸 꾸짖고 어설프다고 나무라기보다 잘하고 있다고 힘을 북돋워줬고 오히려 ‘더 많이 실패할 수 있도록 하고 싶은 것은 맘껏 해보세요’라며 이상을 키워주었다. 만약 내가 일반학교에서 근무했다면 집단의 톱니바퀴가 되기 위해 나의 이상은 철저히 내려놓고 ‘조직이란 그런 거야’라며 맞춰가기 위해 애쓰는 1년을 보냈을 거다.

1년이란 시간은 그래서 뜻 깊었다. 그렇게 단재 구성원으로 자리를 잡아가며 2013년을 맞이했고 학부모회 주최로 교사와 학부모간의 진솔한 대화의 장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들, 그리고 나의 생각을 정리하여 이곳에 풀어놓고자 한다. 햇병아리의 치기도 보일 것이고, 어설프고 거친 느낌의 소감도 보일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 나의 생각이기에 여기에 남겨둔다.



▲ 1년동안 좌충우돌하며 다양한 활동들을 했다. 풋교사의 치기를 잘 받아주고 함께 해준 단재친구들에게 고마울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실패할 때 배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