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 30 - 15.10.8(목)
어느덧 자전거 여행을 떠난 지 4일이 지나고 5일째에 접어들었다. 6박7일의 계획으로 여행을 떠났으니, 이제 후반부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오늘부터는 작년 도보여행 때 걸었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익숙한 길을 간다는 안도감이 든다.
그러고 보면 새로운 길은 설렘을 주기도 하지만 그 설렘은 여차하는 순간 두려움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아는 길은 자칫 지루할 수 있지만 그건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여행은 어떤 설렘으로 시작하여 점차 익숙해져 가는 과정으로, 두려움에서 시작하여 안정감으로 변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충주의 찜질방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찜질방이다. 빌딩의 한 층은 목욕탕으로 쓰고 다른 층은 찜질방으로 쓰는 일반적인 구조다. 도보여행을 다닐 때도 여러 찜질방을 가봤었기에, 당연히 찜질방하면 대중목욕탕처럼 목욕시설이 갖춰져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번 자전거 여행을 통해 찜질방에도 여러 형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월요일 저녁에 가본 찜질방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그 때는 아이들의 자전거부터 내 자전거까지 연쇄적으로 펑크가 나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추위까지 견뎌가며 펑크를 때우다 찜질방에 도착하니 이미 11시가 넘었다. 그래서 당연히 ‘뜨거운 탕에 들어가 지친 몸을 풀어야겠다’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목욕탕 문을 여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거기엔 탕은 없고 그저 샤워기만 있어서, 탕에 들어가 몸을 풀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그런 황당(?)한 경험을 통해 숯가마나 황토가마처럼 색다른 찜질방은 목욕탕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찜질방에 올 때도 긴가민가했는데, 여긴 그나마 일반적인 찜질방이어서 다행이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목욕시설이 잘 갖춰진 찜질방과 찜질을 위한 찜질방의 차이점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목욕시설이 잘 갖춰진 찜질방은 접근성이 좋도록 도심 한 복판에 있으며 빌딩에 있는 경우가 많지만, 찜질이 주가 되는 찜질방은 도심 외곽에 위치하며 건물 또한 개인이 만든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욕도 하며 맛보기 찜질을 하는 정도라면 도심의 찜질방이 제격이고, 제대로 된 시설에서 찜질을 하고 싶다면 외곽의 찜질방이 제격이다. 자신이 원하는 목적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모처럼 탕에 들어가 몸을 풀고 나니, 긴장이 풀어져 잠이 솔솔 온다. 이제부턴 아이들도 자유시간이니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다가, 아침 기상미션 시간만 지키면 된다. 솔직히 찜질방은 그다지 할 게 많지 않아(스맛폰도 압수당해 더욱 더 할 게 없음), 아이들은 잠시 얘기를 나누다가 수면실로 들어가더라. 나도 여행기를 정리하고 수면실로 들어갔다. 수요일 저녁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더라. 이미 꽉 차 있었지만, 구석에 한 자리가 비어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
좀 자다 보니 어찌나 뜨겁고 답답하던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수면실 문이 닫혀 있어 공기는 통하지 않고 바닥은 뜨거웠기 때문이다. 도무지 잘 수가 없어 거실로 나왔는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만 자더라.
거실은 바닥 온도도 적당하고 답답하지도 않았지만, 새벽 2시까지 거실불과 TV가 켜져 있어 깊이 잘 순 없었다. 이래저래 찜질방에서 자는 건 힘든 일이긴 하다.
기상미션은 9시까지 하기로 했다. 오늘 달려야 할 거리도 그렇게 많지 않고, 더욱이 작년에 왔던 길을 달리는지라 걱정보단 반가운 마음이 앞서기에 여유 있게 출발하기로 했다. 그래서 기상미션 시간을 최대한 뒤로 미뤘고 8시 30분부터 체크를 하겠다고 했다.
거실에서 눈을 떠 보니 7시쯤 되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7시 20분에 우르르 일어나더니 목욕탕으로 가더라. 평소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찜질방은 아무래도 푹 잘 수 있는 환경은 아니기에 그랬을 거다. 그래서 나도 목욕탕에 가서 살짝 샤워를 하고 출발할 준비를 마친 후 입구 쪽에서 기다렸다.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긴 시간동안 목욕을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더라. 민석이만 탕에 들어가 씻었을 뿐, 재익이나 현세는 옷만 주섬주섬 챙겨 입고 바로 나왔다.
세 명의 아이들이 나온 시간은 8시였고, 준영이는 30분에 나와 애초의 계획보다 30분이나 기상미션이 끝났다.
재익이가 그 때 기상미션의 규칙을 바꾸자고 제안하더라. 지금까지는 출발하기로 한 시간 30분 전부터 체크하기 시작하여 나오는 순서대로 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분명히 함께 준비했지만, 조금이라도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선 혼자만 서둘러야 하는 일이 생긴다.
오늘 같은 경우 민석이와 재익이, 현세가 함께 일어나 준비했고 재익이와 현세는 씻지 않아서 바로 나갈 수도 있음에도 탕에 들어가 씻고 있는 민석이를 기다려 함께 나왔다. 이 와중에 순위를 체크해야 하니, 차이를 두기 위해 “자전거 짐받이에 짐을 빨리 묶고 나오는 순서대로 점수를 주겠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곧 같이 준비한 관계임에도 위화감을 조성하여 ‘남 신경 쓰지 말고 점수 받고 싶으면 너만 열심히 해!’라고 재촉하는 모양새였다. 이런 규칙을 정하지 않았으면 서로가 서로를 챙겨주고 기다리며 우의를 돈독히 할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도록 강제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부당함이 있었기에 재익이는 먼저 나오는 순서대로 점수를 줄 게 아니라, 몇 분까지 나오면 몇 점을 주는 식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무작정 무한경쟁에 몰아넣고 ‘너가 빨랐네, 너가 느렸네’ 따위로 생채기를 내며 경쟁심을 부추기며 평가하지 말고, 서로 챙겨주며 함께 나오더라도 정해진 시간 내에만 나오면 똑같이 평가해야한다는 취지였다.
평가방식은 크게 상대평가와 절대평가로 나누어진다. 상대평가는 학교에서 하는 평가를 생각하면 쉽다. 각 등급별로 정해진 프로테이지가 있어서(1등급 4%, 2등급 7%) 아무리 내가 열심히 했다 할지라도, 4.01%에 걸리면 1등급이 아닌 2등급을 맞아야 한다. 그래서 심한 경우엔 겨우 한 문제를 틀렸을 뿐인데, 2등급을 받는 경우도 생긴다.
그에 반해 절대평가는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같은 수준으로 평가하는 방식으로, 95점 이상이면 1등급, 90점 이상이면 2등급하는 식으로 평가한다. 이 경우 다른 사람의 성적은 상관없고 오로지 나의 노력 여하에 따른 점수만이 중요하다. 그러니 남을 의식하여 남보다 더 잘하려 할 필요가 없이 그저 자신의 목표에 따라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상대평가에 비해 절대평가가 좀 더 인간적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절대평가만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상황에 따라 둘 중에 적합한 것을 쓰면 되니 말이다. 정해진 인원을 뽑아야만 하는 시험에선 당연히 상대평가를, 그 사람의 역량을 평가하고 싶을 땐 절대평가를 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철저한 경쟁만을 부추기는 사회다. 그러다 보니 절대평가로 개인의 성장이나 성취 정도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남보다 앞서는 정도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니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남과 끊임없이 비교를 당하며 ‘엄친아’라는 신조어까지 만들 정도이며, 이런 경쟁적인 구조는 사회 구석구석에 자리 잡아 ‘효율’이란 미명으로 무한경쟁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폐해를 여러 곳에서 봤고 그건 어찌 보면 공부라는 것과는 완벽히 배치되는 것(그렇기에 진정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은 경쟁의식을 지워내야만 한다)을 알고 있었음에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나 보다. 그래서 이번처럼 기상미션을 만들며 아이들의 경쟁심을 부추기고 이기심을 키우도록 방조했으니 말이다.
역시 고민하지 않으면 이미 사회적으로 디자인된 현실이 불변의 세상인양 다른 사람에게 유포하게 된다. 왜냐 하면 나 또한 그렇게 디자인된 세상에서 살아왔기에 내가 본 그대로 느낀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게 되며, 그 사람도 그런 사회에 살고 있기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되어 ‘일상’, ‘당연함’, ‘세상은 원래 그래’라는 생각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아래에 인용한 박노자씨의 분석을 들으면, 이런 생각은 더욱 명확해 진다.
국가적 살육은 폭력성의 극단적인 형태지만 전쟁 이외에 자본주의 세계에 내재돼 있는 폭력 장치들은 무수하다. 예컨대 사회적 자원(신분 상승, 위신 등)을 놓고 벌이는 경쟁은 인간의 폭력화에 가장 많이 기여하는 제도적 폭력의 형태다. 학교에서의 성적 경쟁도 ‘남들은 다 잠재적인 것’이라는 폭력적 의식을 주입하지만, 유치원 때부터 하는 대항적인 스포츠도 경쟁이라는 형태의 규범화된 폭력을 내면화 한다.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 2』. 한겨레 출판, 90pp
어쩌면 무서운 것은 말이나 글로 세뇌를 하는 것보다, 현실을 보여주고 현실을 경험하게 하여 아이들에게 ‘세상은 이토록 살벌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경험을 통해 약육강식의 법칙을 체화하며 조금이라도 강자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것을 당연하다고 느끼며 전혀 불편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노자씨는 학교의 성적경쟁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유치원에서 하는 남과 싸워 이겨야만 하는 스포츠를 권장하는 것을 보며 ‘규범화된 폭력을 내면화 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우리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했던 놀이들이 이미 경쟁에 대한, 폭력에 대한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내면화하는 과정이었다는 진단이다.
드디어 기상미션도 순조롭게 끝나고 5일째 여행을 시작한다. 출발하기 전에 찜질방 근처의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기로 했다. 배불리 먹을 순 없지만, 그래도 배가 조금이라도 든든하면 여행할 맛이 난다. 드디어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남한강을 거슬러 가는 여행을 시작한다. 아마도 나 또한 박노자씨의 진단처럼 이미 그런 규범화된 폭력을 내면화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아이들과 활동을 할 때조차 그런 규범화된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별로 자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재익이가 앞에 나와 그런 나의 현실을 일깨워주니, 부끄럽기도 하면서 한 편으론 되게 고맙기도 하더라. 적어도 자각하고 고칠 수 있는 실마리를 재익이가 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