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 26 - 15.10.7(수)
총 7일간의 여행 중 어느덧 4일째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이화령을 넘어 충주로 넘어간다. 남한강은 작년에 도보여행을 했던 곳이기에 마음이 절로 편해진다.
오늘은 오랜만에 기상미션을 한다. 월요일엔 모두 늦게 나오는 바람에 하는 의미가 없었고 어젠 캠코더를 찾으러 가느라 하지 못했다. 어제 저녁에 아이들에게 “내일은 7시 40분부터 8시까지 순차적으로 기상미션을 할 거야. 그리고 8시가 넘어서 나오면 5분 당 -20점씩의 벌점도 받게 되니, 아침에 신경 써서 나와야 해”라고 말하며 기상미션을 한다는 것을 알렸다.
7시 20분부터 거실 쇼파에 앉아 기다린다. 그랬더니 현세는 7시 30분에 나왔고 민석이는 38분에 나왔다. 나머지 두 명은 8시가 넘도록 나오지 않는다. 네 명이서 한 방을 썼는데도 이렇게 다르다.
이번 자전거 여행을 하며 민석이와 현세는 기상미션, 용돈미션과 같이 성실히 해야 하는 미션을 열심히 했다. 그에 반해 재익이와 준영이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부터 ‘난 등수 같은 것엔 관심 없어’하는 태도로 대부분의 미션들을 제대로 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재익이는 한 번씩 승부욕이 생길 때마다 하려는 자세를 보이긴 했지만, 준영이는 아예 그런 마음조차 없었다.
여긴 8시 30분까지 아침을 제공한단다. 그래서 기상미션을 8시로 정한 거였다. 그런데 8시가 한참 지났는데도 나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보채야 했다. 그랬더니 8시 15분이 되어서야 나왔고 함께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아침은 스프와 접시 가득 담긴 간식거리들이다. 밥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뭔가 부족하고 양도 많지 않아 포만감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부담되지 않게 적당히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집주인 내외분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였다. 어제 이곳에 올 때 게스트하우스라는 특성 상 집주인과 이야기도 하고 친해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그러진 못했다. 어젠 저녁을 준비하느라 바빴고 오늘은 아침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별로 얘기할 수 없었다. 물론 무언가 부탁을 하거나 물으면 친절히 답해주시긴 했지만 편안하게 앉아 이야기를 할 순 없으니 아쉽더라.
그래도 어제 저녁에 잠시 이야기하며 알게 된 사실은 서울에서 일하며 살다가 연고도 없는 이곳에 내려와 게스트하우스를 열게 되었다는 거였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연고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게 신기해 보였다.
아침밥을 다 먹고, 우리도 떠날 준비를 했다. 거실에 들여놓은 자전거를 입구 쪽으로 빼놓고 미처 챙기지 못한 짐이 없는지 살펴봤다. 인사를 하고 나가려고 하니 입구까지 나와 배웅을 해주신다. 그러면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셔서 우리는 포즈를 취했다.
그 때 사모님께서 “힘드시겠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거다. 솔직히 이런 식의 반응은 처음이라 당황했다. 보통 이런 식의 여행을 다니면, “재밌겠어요”, “대단한데요.”라고 반응한다. 아무래도 사는 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며 반복되는 일상을 견뎌내야 하기에 무료할 수밖에 없다. 누군들 여행을 안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일상을 떠나 자유를 누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다 보니 여행을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난 이 작은 동네도 못 벗어나보고 살았어. 돈이 뭔지? 적당히만 벌면 어딘가 여행도 다닐 수 있을 텐데 욕심엔 끝이 없으니 늘 이렇게만 살아.”라는 체념 가득한 말을 하며, 위와 같은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모님의 반응은 그와는 전혀 반대의 반응이었기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힘들긴 하지만, 이렇게 여행을 다니는 건 좋아요”라고 말했다. 이건 솔직한 내 심정이다. 물론 아이들과 여행을 다니는 건 나 혼자 여행을 다니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힘도 들고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내가 꿈꾸던 삶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 기쁘기만 하다. 일이 곧 놀이가 되고, 놀이가 곧 여행이 되며, 여행이 곧 삶이 되는 흐름 속에 내가 있으니 말이다. 난 ‘참 복 많이 받은 놈’이라는 생각이 기본 밑바탕에 깔려 있기에, “여행을 다니는 건 좋아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사모님도 “아이들과 함께 여행하는 모습이 좋아 보여요”라고 대답해주시더라.
일요일에 낙동강 자전거 길에 도착했을 때, 스마트폰 사용에 대해 규칙을 정했다. 사용할 수 있는 건 음악을 듣거나, 지도를 찾는 것뿐이며 한 명이라도 다른 용도로 사용할 경우 스마트폰을 압수하겠다고 한 것이다. 원래는 여행 시작부터 스마트폰을 압수할 생각이었는데, 민석이가 “지도도 봐야 하고, 쓸 데가 많은데 그건 너무한 거 같아요”라고 이의제기를 해서 그와 같이 규칙을 정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전화도 하고, 인터넷도 하게 되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게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게 된 것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스마트폰 사용을 자제했으면 하는 이유는 작은 화면에 나의 의식이 갇혀 주위의 풍경을 보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무관심해지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평소엔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들에 마음을 뺐기고, 일상처럼 흘려보내던 내 감정을 맘껏 느끼며, 늘 같이 있어 무뎌진 상대방의 다른 면모를 보기 위해서다. 그러려면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고 정신적인 자유가 필요하다. 빈 공간이 있을 때 비로소 어떤 감정들이 어릴 수 있으니 말이다.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삼십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이는데 바퀴통 속이 비어있음에 수레로서의 유용함이 있다.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그릇이 비어있음에 그릇으로서의 유용함이 있다. 『노자』 11장)’
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 경우, 그릇으로서의 쓰임새는 그릇 가운데를 비움으로써 생긴다. ‘없음’으로써 ‘쓰임’으로 삼는 지혜. 그 여백 있는 생각. 그 유원幽遠한 경지가 부럽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돌베개출판사, 2010년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마인드는 ‘소유하라’다. 지식을 끊임없이 소유해야 하고 자본을 끊임없이 소유해야 하며, 관계를 끊임없이 소유해야 한다.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유능한 사람으로 대우받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능하며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이런 사회야말로 『전우치』란 영화에서 전우치가 말한 것처럼, “우환이 많은 세상”일 수밖에 없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
하지만 무언가 새로운 생각이 어리고, 새로운 관계를 창안하며, 현실의 무게가 아닌 쾌활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비워낼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한 법이다. 그릇의 쓰임은 그릇을 비워냄으로 생기고, 바퀴의 쓰임도 바퀴통의 중앙을 비워냄으로 생긴다. 이처럼 사람도 자의식을 지우고, 앎을 버리고, 지식의 파편을 비워내며, 관계를 끊어낼 때 비로소 쓰임을 찾게 된다. 비워냄으로 여유가 생기고 여백을 지님으로 생각이 넉넉해질 수 있기에, 되도록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쓰지 않았으면 했던 것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 속에 아이들의 시선이 머물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들이 의식을 지배하면서 아이들은 여행을 떠났으면서도 여행을 떠나지 않은 것과 같아지고 말았다. 그래서 이젠 결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망설였다. 분명히 압수한다고 하면 아이들과 부딪힐 건 뻔했기 때문이다. ‘감정싸움으로 번져 기분까지 상해가면서 여행을 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나도 어느 순간부턴 분란을 만들기 싫어하게 됐다. 그래서 아닌 걸 알지만 그냥 놔둘 때도 있고, 그냥 인정해버릴 때도 있다. 더욱이 지금처럼 스마트폰을 빼앗지 않아도 여행을 하는 데엔 전혀 지장이 없을 땐 더욱 더 ‘뭘 굳이 그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어느 부분에선 포기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이들도 이미 자신들의 행동이 도를 넘어섰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걸 그대로 놔둔 상태로 여행을 했다간 이도저도 아닐 것 같아서 압수하기로 맘먹었다. 그래서 살짝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대놓고 쓰는 상황이 되었으니, 오늘부터 펜션에 도착할 때까지는 스마트폰을 압수할 거야”라고 운을 뗐다.
아이들의 반응을 지켜보니, 가장 극렬하게 거부할 거 같던 민석이는 오히려 쿨하게 “너무 막 쓰긴 했어”라며 바로 줬고, 현세도 “그러면 지금 좀 더 웹툰을 봐둬야지”라며 그 상황을 받아들였으며 준영이는 오늘 리더이기에 스마트폰을 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오히려 재익이가 극한 반응을 보이더라. 자신은 음악만 듣고, 지도만 찾았는데 억울하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음악도 못 듣고, 지도도 못 보면 자전거는 무슨 재미로 타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미 모두 다 내는 분위기였기에 재익이도 불퉁불퉁 대다가 결국 스마트폰을 냈다.
어쨌든 이 때 스마트폰을 압수한 건 ‘신의 한 수’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각자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자전거를 탔기 때문에 비트가 강한 음악이 하루 종일 나와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는데 이 때부턴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자전거를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이뿐인가? 이젠 음악을 듣질 못하니, 준영이가 가져온 라디오를 들으려 몰려들기도 하고, 그조차 여의치 못할 땐 아카펠라를 부르며 가기도 했다. 스마트폰이 사라지며 눈과 의식이 놓여나자 비로소 아이들의 이야기소리와 웃음소리가 되돌아온 것이다.
중반기에 접어든 자전거 여행은 스마트폰에서 해방된 채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늘은 가장 고난이도라는 이화령과 소조령 두 개의 산을 넘어야 한다. 신나게 달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