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형무소 탐방기 3
차가운 건물을 안내도에 따라 걷는다. 형무소는 역사가 박제된 공간이다. 분명 그 곳에서 여러 감상을 느끼는 게 정상일 테지만, 박물관 자체가 그렇듯 그냥 휙 보고서 지나치니 어떠한 감상도 어리지 않는다.
서대문 형무소보단 『남영동 1985』
지하에 재현된 고문하는 광경이나 고문 도구들은 ‘아플 것 같다’는 피상적인 느낌만 주었을 뿐, 그다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건 오히려 그만큼 지금 사람들이 영상이 주는 시각(청각)적인 충격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누군 그러더라 영상으로 본 베이징 자금성의 위용은 어마어마한데, 막상 현장에서 직접 보니 초라하더라고 말이다. 나 또한 제주도 성산일출봉을 보면서 ‘에게’하고 느꼈던 적이 있었다.
이에 반해『남영동 1985』는 고문의 현장감을 시각적으로 충실히 보여줬다. 이 영화는 김근태 의원이 남영동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으며 점차 인격이 무너지고 피폐해져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 묘사된 고문 장면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옥죄고 그 통증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도록 만든다. 물을 입에 들이부을 땐 숨이 가빠오고, 전기를 통할 땐 온몸이 감전된 양 저려온다. 영화임에도 그걸 보고 있으면 현재적인 아픔으로 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영상이 주는 현실감을 온몸으로 맛본 터라, 오히려 실제 역사가 있고 아픔의 상흔들이 남아 있는 공간에서는 무덤덤해지고 말았다. 이게 바로 영상이 실제를 압도하는 역효과라 할 수 있다.
『남영동 1985』보단 서대문 형무소
그렇게 관람방향에 따라 건물과 건물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12옥사에 이르러선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들어간 방향에서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은 백기완 선생님이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라는 책을 통해 어린 소년이 맞선 시대의 참상을 보았고, 온갖 고초로 인간이하의 대우를 받으면서도 그걸 이겨낸 정신의 오롯함을 보았다. 집회현장에서 백기완 선생님을 먼발치서 볼 때마다 그가 걸어왔던 삶과 지금도 걸어가고 있는 삶에 대해 존경이 절로 일어나곤 했는데, 그 분을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이곳에서, 그것도 처음에 볼 수 있다는 게 꿈같이 느껴졌다.
서대문 형무소 내의 12옥사는 백기완 선생님을 비롯해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인물들이 전시된 곳이다. ‘이곳에 투옥되었던 많은 독립투사의 정신이 민주화투사에게 이어졌고 그런 정신은 현재진행형이다’라고 서대문형무소에선 스토리텔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대문 형무소에 와서 ‘역사가 어떤 현재적인 관점으로 서술되고 있나?’를 보고 싶었는데, 12옥사에선 그와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와 같은 스토리텔링에 보수단체들은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백기완 선생, 김근태 의원, 이소선 여사 모두 정당한 역사적인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이념에 따라 평가가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이들의 활동이 이념에 따라 나누어질 필요는 없음에도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대문형무소는 이념의 소용돌이에서 중심을 잘 잡고 역사를 현재적인 이야기로 잘 풀어내고 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대문에서 만난 리영희 선생님 1 – 상위 10%를 위한 나라
12옥사를 천천히 둘러봤다. 평소에 관심 있던 분들이 많았기에 하나하나 곱씹듯이 둘러본 것이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의 인터뷰 내용이 나의 두 눈을 붙잡아 두었다. 바로 리영희 선생님의 인터뷰 글이었는데, 그건 어쩌면 지금과 같은 ‘삼포시대’, ‘청년실업 100만명 시대’에 울림을 주는 말이었다.
리영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 네가 실업자인 건 자유의 대가니까 혜택이야. 넌 야생마 같은 아이잖니?
스스로 항상 잉여인간이고 청년백수라고만 생각했는데 야생마가 되니 어쩐지 신이 난다.
똑같이 청년 실업에 잉여인간이라는 기분으로 괴로워할 젊은이들에게 뭔가 충고해주실 말씀이 없냐고 여쭙자 계속 사양하시다가 괴테 이야기를 꺼내셨다.
- 괴테도 말이야. 그런 요청을 받고 계속 거절을 했다지. 부탁을 받으니까 거절하고 또 거절하다가 이렇게 말했지. 그래 알겠다. 충고를 하겠다.
단, 내 충고를 따르지 않겠다는 충고 하에서만 충고를 하겠다. 나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Simple life, high thinking’ 즉 생활은 간소히, 하지만 생각은 높게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군.
하지만 ‘부자 되세요’의 주문이 여전한데 생활은 간소히 하는 것이 가능할까. 선생님 역시 아버지가 호강하라는 뜻으로 지어주신 이름대로 살지 못하고 평생을 지내셨으니 개인적으로 앞으로의 목표이기도 한 ‘돈 없이 잘 살아갈 수 있는 법’을 여쭈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자기 생활의 주인이 되어야지, 물질은 중요하지 않아.
설령 모자 500개, 넥타이 300개를 가진다고 해서 그 물질의 주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나? 오히려 물질이 주인이 되고 물질의 예속물이 되는 거야.
정신의 혁명이 필요해. 자기의식의 전환을 이루어야지.
물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는 착취와 강압과 사치와 타락이라는 부작용을 낳게 되는데 이 타락이 중대한 병이야.
이 타락은 스스로 거부하는 만큼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성장하고 정신적 기품이 높아지게 되지. 악덕한 제도, 정치, 사상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인간을 목표로 해야겠지. 풍요 속에서 매몰되지 말고, 시시한 물건 따위에 만족하지 말고 스스로의 사상과 행동과 결정의 주인이 되는 거야.
자기를 상실하고 의식 없이 생활하면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말지. 물론 자발적으로 이런 노예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 자본주의에서는 그저 소비에서 낙을 찾으려고 하는 풍습이 많으니까.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나의 인생은 그저 낙오자일 수밖에. 계속 낙오자의 길로만 걸어왔고,
선생님, 그럼 저도 낙오자 할게요.하고 손을 들자 또 웃으신다. 낙오자로, 실업 자유 야생마로, 더 용감하게 살아야겠다.
『리영희 프리즘』, 김현진의 인터뷰 글 중
위의 글을 읽으며 선생님의 통쾌한 일갈에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해주지 않는 말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솟구쳤다.
지금 한국 사회는 누가 뭐라 해도 ‘상위 10%가 지배하는 사회’다.
상위 10%가 되기 위해 어린 아이들은 조기교육으로 영어나 한글을 먼저 떼고, 학생들은 학원을 전전하고, 대학생들은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렇게 상위 10%에 안착한 후에도 그들은 불안에 떨며 어떻게 그 자리를 유지할 것인지, 어떻게 더 많은 돈을 축적할 것인지 분주하다. 그렇다면 상위 1%라고해서 다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대기업은 지네발 확장으로 골목상권이 죽어나가든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선 물불 가리지 않고 사업을 확장하고, 사회지도층은 땅 투기나, 부동산 투기로 서민들의 고혈을 쪽쪽 빨아먹는다.
누구 할 것 없이, 상위 10%가 되기 위해 바득바득 애써야만 하는 세상, 그리고 그 상위 10%는 그들이 누려온 것을 함께 나누기보다 지키고 늘리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살아야만 하는 세상은 이미 지옥일 수밖에 없다. 상위 10%든, 그렇지 않든 두려움과 불안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은 어찌 살아야 하는 걸까? 상위 10%가 되기 위해 열정적으로 위기를 기회 삼아 애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신세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눈높이를 낮춰서 어느 곳에서든 자신의 역량을 키워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리영희 선생님은 “네가 실업자인 건 자유의 대가니까 혜택이야”라고 말씀을 해주신다. 비꼬는 것이라 오해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서대문에서 만난 리영희 선생님 2 – 상위 10%를 위한 나라에서 살아남기
대부분의 어른들에게 ‘지금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라고 묻는다면, “여러분들이 조금 눈을 조금 아래로 낮추면 아직도 일자리는 많다”라거나, “청년들이 패기를 가지고 벤처기업을 창업하고, 중소기업과 해외 일자리에 더 많이 도전하는 것이 해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라는 천편일률적인 대답이 나올 것이다. 사회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닫히고, 누구 할 것 없이 하나의 목표만을 위한 달려가는 세상이 되었음에도 젊은이들의 열정을 탓하거나, 이상만 높다고 탓하기만 한다.
그렇기에 그런 대부분의 어른들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나는 무능하다고 느끼게 되며, 도전하지 않고 현실에 머물려 한다고 자책하게 된다. 분명 살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음에도, 그렇게 애쓰는 마음이 늘 평가절하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어른들의 덕담’이 횡행하고 있기에, 리영희 선생님의 말씀은 오히려 더 빛을 발한다. 선생님의 말씀은 일반적인 얘기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가지기 위해서 애쓰라고 하며, 당당히 살기 위해 현실에 맞게 살 뿐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오히려 당당히 ‘생활은 간소히, 생각은 높게’라고 조언해주고 있다.
상위 10%를 숭상하는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로 그와 같은 획일적인 욕망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러려면 자본주의 사회가 부추기는 ‘소유에 대한 욕망’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건 단순히 조금만 가져도 된다’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닌, 아예 ‘가지려는 마음을 없애겠다’는 적극적인 마음가짐으로 이어져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행동할 수 있으려면 당연히 생각은 더욱 높게, 이상은 더욱 크게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대로 흘러가게 되니 말이다. 바로 이와 같은 마음가짐을 갖는 걸 ‘정신혁명’, ‘자기의식의 전환’이라 선생님은 표현하신 것이다.
서대문에서 만난 리영희 선생님 3 – ‘낙오자’라는 화두 받아들이기
결국 의식의 전환은 단어의 재정의와 함께 온다. 단어의 뜻을 재정의하지 못하면 기존의 언어에 갇혀 생각이 닫히기 때문이다.
‘낙오자’라는 단어는 이미 ‘실패’, ‘절망’, ‘막장’이란 부정적인 이미지와 겹쳐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선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아등바등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패한 사람을 구제해줄 기관이나 새로운 삶을 보장해줄 관계망이 없기 때문에 실패는 곧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리영희 선생님은 ‘낙오자’를 칭송했다. 획일화된 사회에서는 낙오자일지 모르지만, 좀 더 다층적인 사회에선 오히려 자유를 구가하는 야생마이기 때문이다. 판에 박힌 생활, 판에 박힌 생각으로 기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자유로운 생각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야생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말씀은 누구에게도 쉽게 듣지 못하기에, 스님의 할喝과 같았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는 힘이 솟았고, 지금의 내 삶을 좀 더 재밌게 살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선생님 말마따나 ‘실업자’라는 혜택으로 자유를 구가는 야생마가 되어 보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가르침으로 힘을 얻고 12옥사를 나왔다.
목차
볼거리는 많지만, 억지 비감을 강요하다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 안에 어떻게 따뜻한 인간미를 채워 넣을 것인가
조금은 특이한 강화도조약 제1조
서대문 형무소가 보여주는 조선 독립의 실체
서대문 형무소는 왜 의주로에 만들어졌나?
서대문 형무소보단 『남영동 1985』
『남영동 1985』보단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에서 만난 리영희 선생님 1 – 상위 10%를 위한 나라
서대문에서 만난 리영희 선생님 2 – 상위 10%를 위한 나라에서 살아남기
서대문에서 만난 리영희 선생님 3 – ‘낙오자’라는 화두 받아들이기
정체성은 무엇으로 보장되는가?
역사가 추억으로 밀려나느냐, 기억으로 계승되느냐의 갈림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