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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18. 2016

서대문 형무소와 독립선언

서대문 형무소 탐방기 2

서대문형무소는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들어오던 길목인 의주로義州路에 설치된 감옥이다. 영은문迎恩門(황제의 은혜를 영접하는 문)이 헐리고 독립문이 세워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독립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중화세계로부터의 독립선언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건 일본의 의도가 숨겨있음을 알 수 있다.      



▲  의주로는 조선시대에 주요 간선 도로 중 하나였다. 특히 중국 사신이 오던 길로 그들을 맞이하는 영은문이 있었고 모화관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조금은 특이한 강화도조약 제1 

    

조선은 1876년에 최초의 근대조약을 맺는다. 지금 각 국가와 FTA를 체결하는 것처럼 조선은 주권을 가진 나라로 다른 나라와 동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그게 바로 조선 최초의 조약으로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朝日修好條規이다. 강화도조약의 제1조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라는 내용이 그것인데, 이 조약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일본이 제일 먼저 선언해 준 꼴이니 황당할 수밖에 없다.



▲ 제1조의 내용이 선명히 보인다.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왜 강화도조약의 제1조가 황당한지는 그 뒤에 맺은 조약들의 제1조를 확인해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임오군란의 여파로 맺어진 제물포조약(1882)의 제1조는 “지금으로부터 20일을 기해 조선국은 흉도를 포획하고 수괴를 가려내 중벌로 다스릴 것”이라는 내용이다. 구식군인들은 별기군 군인과의 차별에 항의하며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고 별기군 대장인 호리모토를 살해하였다. 이에 일본은 조약을 통해 그런 일을 주도한 사람을 명백히 처벌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제물포조약 제1조는 일본이 조선에 무엇을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1884) 후에 일본과 맺은 한성조약의 제1조는 또 어떤가? 제1조는 “조선국은 국서를 일본에 보내 사의謝意를 표명한다”라는 내용이다. 즉, 갑신정변으로 인해 일본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 국왕이 직접 사과를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조약의 내용을 시작하고 있다. 이렇게 제1조에서부터 확실히 조선의 잘못에 대해 언급한 후에 배상금 문제랄지, 공관 신축 문제랄지 하는 실제적인 문제를 얘기하고 있다. 

‘제1조’는 위의 조약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조약을 자기의 나라에게 유리하도록 전개하기 위한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강화도조약만 유독 실질적인 내용을 담기보다 선언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다.                



▲ 신식군인들을 대우 해주느라 구식군인은 봉급도 받지 못했다. 그러다 받은 쌀자루엔 모래가 한 가득 있었기에 그들은 들고 일어났다.



서대문 형무소가 보여주는 조선 독립의 실체


왜 일본은 조약을 맺으며 자기 나라에 유익한 것들을 제 1조에 배치하기보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먼저 챙겨주고자 했던 것일까? 설마 이 당시 일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정한론征韓論을 외치며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을 외치던 나라가 아니었던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일본은 어디까지나 자국의 이익에 충실했을 뿐 한 번도 조선의 운명에 대해, 타국과 공존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강화도조약 이후로 맺은 어떤 조약도 일본과 조선이 동등한 입장에서 맺어진 것은 없으며, 억압적인 상황에서 일본의 이익에 충실하도록 맺어졌다.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먼저 선언한 이유는 바로 ‘중화세계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떼어내고 맘대로 요리하기 위해서’였던 셈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문안보다 맥락이, 텍스트보다 콘텍스트가 더 중요한 게 바로 외교 분야다. 조선이 자주 국가라는 점을 명시했다는 것은 바로 그전까지 조선이 자주 국가가 아니었음을 뜻한다.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은 전통적으로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 아니며, 따라서 중국은 조선에 대해 종주권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물론 문안상으로는 좋은 말이다. 그러나 그 문안의 맥락을 해석하면 앞으로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한다 해도 독립국이 독립국을 대하는 것이니까 중국을 포함해 어느 나라도 전혀 간섭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일본은 교묘하게 정한론의 근거를 만들어낸 것이다. 

남경태, 『종횡무진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5, PP 395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조선의 독립은 결코 한 나라의 자긍심을 세우는 차원의 접근이 아닌, 일본의 이익을 위해 강제적으로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로 만들기 위한 차원의 접근이었던 것이다. 

독립국 지위에 맞게 영은문은 헐리고 독립문이 1897년에 세워졌고 그 후 10년이 지난 1907년에 한국통감부가 서대문형무소(당시 경성감옥)를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데 썼다. 

이처럼 의주로 통하는 길목에 만들어진 감옥은 조선의 독립이 어떤 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어떤 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서대문 형무소가 만들어질 당시의 모습.




서대문 형무소는 왜 의주로에 만들어졌나?    

 

그렇다면 일본은 형무소를 왜 한양으로 들어서는 의주로의 초입길에 만든 것일까?

일본은 청나라를 향해 시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의 사신이 들어오던 길목에 버젓이 감옥을 만들어 놓고 “청나라 너희들 이젠 조선에 대해서 감 놔라 배 놔라 하지마!”라고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보고 있으니, 연암이 쓴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황제가 왜 열하로 피서를 떠났는지 밝힌 대목과 정조의 능행 장면이 떠올랐다. 

연암은 삼종형三從兄을 따라 황제 고희연의 축하사절단 자격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몇날 며칠을 고생한 끝에 북경에 도착했지만, 황제는 북경에 없었다. 열하로 이미 피서를 떠난 뒤였던 것이다. 더욱이 황제는 북경까지 오느라 이미 진이 다 빠진 사절단에게 하루 빨리 열하로 오라고 전갈을 보냈다. 그 때문에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너一夜九渡河記는 천신만고를 경험해야 했다. 

그런데 ‘열하’라는 지명으로도 알 수 있듯이, 여름에 피서를 할 만한 곳은 아니다. 더욱이 그곳은 몽골과의 접경 지역으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도 없다. 열하에 도착한 후, 열하의 지세를 본 연암은 황제가 왜 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열하까지 피서를 오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번에 내가 열하의 지세를 살펴보니 열하는 천하의 정수리 같았다. 황제가 북쪽으로 거동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골통을 깔고 앉아서 몽골의 숨통을 움켜잡자는 것이었을 뿐이다. 

今吾察熱河之地勢, 葢天下之腦也. 皇帝之迤北也, 是無他, 壓腦而坐, 扼蒙古之咽喉而已矣. 

『熱河日記』 「黃敎問答」 


    

황제가 열하로 피서를 떠난 이유는 바로 몽골에게 ‘쳐들어오면 가만 안 둔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더운 여름에 열하에 피서산장을 만들어 그곳에서 피서한다는 명목으로 몽골을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 열하일기는 황제가 북경이 없었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던 책이다. 물론 연암의 호기심어린 시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정조의 능행陵幸을 들 수 있다. 노론세력이 득세하는 한양에선 자신의 정치적 기반, 군사적 기반이 미약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수원화성을 건설했다. 표면적인 명분은 효심이었지만, 실제로는 미약한 정치적 기반을 정비하기 위한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노론세력들은 정조의 능행을 보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고, 장용영 군사들의 열병식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무언가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 <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노론은 결코 이 군사훈련을 편안히 보진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이러한 행동을 하는 데엔 표면적인 이유와 실제적인 이유가 분명히 달랐다. 표면적인 이유는 피서이고 효도하려는 마음이었지만, 실제로는 호시탐탐 자신들의 권력을 노려오는 세력(몽골, 노론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의주로에 형무소를 설치하여 무언의 시위를 함과 동시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만방에 드러내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12옥사를 걸어가고 있는 상현이의 뒷모습. 3부에선 12옥사에서 만난 리영희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목차     


. 여는 글: 과거를 오래된 미래로 만드는 방법

볼거리는 많지만, 억지 비감을 강요하다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 안에 어떻게 따뜻한 인간미를 채워 넣을 것인가     


서대문 형무소와 독립 선언

조금은 특이한 강화도조약 제1조

서대문 형무소가 보여주는 조선 독립의 실체

서대문 형무소는 왜 의주로에 만들어졌나?     


차가운 형무소 안엔 따뜻한 사람이 있었다    

서대문 형무소보단 『남영동 1985』

『남영동 1985』보단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에서 만난 리영희 선생님 1 – 상위 10%를 위한 나라

서대문에서 만난 리영희 선생님 2 – 상위 10%를 위한 나라에서 살아남기

서대문에서 만난 리영희 선생님 3 – ‘낙오자’라는 화두 받아들이기     


. 닫는 글: 역사를 기억으로 남게 하는 법

정체성은 무엇으로 보장되는가?

역사가 추억으로 밀려나느냐, 기억으로 계승되느냐의 갈림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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