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 21 - 15.10.5(월)
불행은 겹쳐서 찾아온다고, 그게 시작일 뿐이었다. 그저 현세 자전거 뒷바퀴의 펑크만 잘 때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자리를 옮기고 나니 여러 군데서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발생했으니 말이다. ‘너희들이 어느 정도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보자꾸나?’라고 신이 놀리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 땐 되게 민감해져 있었고, 그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겨웠다.
분황1교 쪽에서 갓길로 내려와 일반도로에 진입하니 가로등이 켜져 있더라. 그곳이라면 수리하기 편할 것 같아서 자리를 잡았다. 혹시 ‘펑크를 확인하기 위한 물’을 구할 수 있는지 살펴보니, 그런 건 없더라. 그 때 내 자전거를 잠시 살펴보면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 핸들 중앙에 늘 있었던 캠코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캠코더를 고정하고 있었던 고릴라포드스탠드의 윗부분이 빠져버린 것이다. 아마도 국도에서 내려오는 길에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불행이다.
곧 아이들도 자전거를 타고 내려왔다. 그 때 재익이도 비보를 하나 알려주더라. 자신의 자전거 앞바퀴도 펑크가 났다는 거였다. 세 번째 불행이다. 그러나 재익이 같은 경우 예비 튜브를 준비해서 왔기에 고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캠코더를 찾아보도록 하고, 나와 현세는 자전거 바퀴를 때우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니 기온도 급속도로 내려가 삶의 비극을 온 몸으로 느끼게 했다. 몸은 춥지, 캠코더는 사라졌지, 자전거는 펑크 났지 이래저래 최악의 상황이었다.
재익이 튜브는 갈았지만, 현세 자전거의 펑크는 도무지 고칠 수가 없었다. 보통 한 군데만 펑크가 나는데 현세 자전거의 경우엔 여러 군데 동시다발적으로 펑크가 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기에 어떻게든 때우려 애썼다. 그 때 캠코더를 찾으러 간 아이들이 돌아오더라. 그러면서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동한 거리는 고작 300미터 정도도 되지 않기에 다시 찾아보도록 하고 나는 현세 자전거 펑크와 씨름해야 했다. 그렇게 두 번째로 세 명이서 대대적인 수색을 해봤는데도 없다는 것이다. 그 상황이 믿기지 않아 내가 샅샅이 찾아봤지만, 정말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의 허탈감을 맛봤다.
그건 절망적인 감정이었다. 삶의 가장 극단에 몰려, 어떤 희망도 꿈꿀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이번 자전거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리얼버라이어티 자전거 여행 이야기’를 찍자는 것이어서 어제 오늘 촬영한 영상들이 꽤 많았다. 그런데 그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점은 고작 조금 이동한 것이기에(자전거 고치는 곳에선 민석이가 캠코더를 촬영했음), 그 중간 어딘가에 있어야 하는데 세 번이나 찾아보아도 없었다는 점이다. 어쩔 수 없이 내일 아침에 해가 뜬 다음에 혼자 와서 찾아보기로 하고, 그쯤에서 정리해야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어나는 상황들을 대처하다 보니, 8시가 넘어버렸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봐야 나아질 것은 없었기에 그냥 출발하기로 했다. 출발하려던 그 때 내 자전거를 확인해 보니, 내 자전거의 앞바퀴도 펑크가 나 있더라. 네 번째 불행이다. 그래도 예비 튜브가 있어서 재빠르게 갈고서 출발할 수 있었다.
완벽하게 어둠이 내린 시골길, 가로등조차 없어 우린 희미한 자전거 불빛에 의지하며 달려야 했다. 이제 달려야 할 거리는 13.61km다. 원래는 1시간 30분이면 넉넉히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어둡고, 현세 자전거엔 펑크가 나있어 몇 시간이 걸려 목적지에 도착할지 모른다.
현세는 펑크가 처음 났을 때와 달리 말수가 현격하게 줄었고 온 몸으로 힘듦을 표현하고 있었다. 거의 스스로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민석이나 재익이는 아직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 때 가장 힘이 되었던 녀석들이다. 만약 민석이와 재익이까지 현세처럼 한계에 다다라서 온갖 힘겨움을 표정과 온몸으로 표현했다면, 나 또한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위기의 상황에서, 불행이 겹쳐오는 상황에서도 짜증을 내지 않고 힘을 북돋워주니, 여러모로 고마웠다.
얼마나 달렸을까? 현세가 옆으로 오더니 말하더라. “건빵쌤 앞바퀴까지 펑크가 났어요” 다섯 번째 불행이다. 거기에 덧붙여 민석이도 옆에 오더니, “쌤 제 자전거도 서서히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드는 데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확인해 보니, 조금 바람이 빠지긴 했지만 충분히 숙소까지는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
현세 앞바퀴의 펑크를 때우기 위해 이미 늦은 시간임에도 모두 멈춰야만 했다. 그쯤 되니 모두 넋이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핸드폰 플래시 불빛에 의존하여 어떻게든 때워보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 때 진짜 문제가 뭔지를 알게 됐다. 바로 도로변에 있던 쓰레기를 밟고 달린 것이 문제라는 것을 말이다. 도로변엔 가시나무들이 있던 모양인데 우린 그 가시나무들을 밟고 달린 것이고 그러다 보니 모두 다 펑크가 난 것이다. 가시가 여러 군데 박혀 있어서 펑크패치로는 도무지 때울 수 없는 정도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현세는 두 바퀴 모두 펑크 난 상태로 달려야 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추위에 덜덜 떨며, 속도도 안 나는 자전거를 타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찜질방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20분이었다.
한참이나 더 가야 나오는 줄만 알고 그냥 달리고 있는데, 어느 순간에 갑자기 옆에 ‘~~찜질방’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그 때 ‘저 곳이 우리가 묵을 곳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지나치려 하는데, 유심히 살펴보니, 우리가 가려 했던 그 찜질방이었다. 아이들도 ‘설마 여기겠어?’라고 생각했다가, “바로 저기가 우리가 묵을 찜질방이야”라고 내가 외치자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라. 기대를 하면 실망하게 되지만, 기대를 하지 않으면 아주 작은 일에도 행복하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던 순간이었다.
준영이는 일찍 도착하여, 우리가 올 때까지 찜질방에서 시간을 때웠다고 한다. 현장에서 온갖 상황을 겪은 우리들도 고생이 많았지만, 낯선 곳에서 홀로 기다린 준영이도 고생이 많았다. 우리가 들어가니, 그렇게 반갑게 맞이하더라.
찜질방은 정말 찜질을 하기 위해 만든 곳이더라. 지금껏 가본 찜질방은 목욕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별도의 찜질방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곳은 찜질하는 걸 위주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목욕탕엔 샤워기만 설치되어 있고 탕은 없더라. 우린 추위에 덜덜 떨며 힘겹게 이곳에 온 것이기에, 탕에 들어가 노곤한 몸을 풀고 싶었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시간도 엄청 늦었기에 그냥 수면실 같은 곳에 들어가 바로 잠을 잤다.
현세 자전거의 펑크로 시작된 예상치 못한 상황은, 어찌 보면 ‘다시는 경험하기 싫을 정도’로 힘든 순간이었다. 그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 몰랐는데, 현세의 뒷바퀴 펑크를 시작으로 재익이 앞바퀴, 건빵 앞바퀴, 민석이 뒷바퀴, 현세 앞바퀴까지 소리 소문 없이 터지기 시작했다. 꼭 누군가 테스트를 하듯 그렇게 완벽하게 짜인 각본처럼 사태는 점점 커져 갔다. 거기에다가 이번 여행의 필수품인 캠코더까지 홀연히 사라졌으니, 어떤 순간이 이보다 더 비극적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극 속에 희극이 있다는 것도 안다. 아이들과 펑크를 때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순간, 그리고 완벽하게 어둠이 내린 거리를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달려간 기억은 절대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계획하여 그대로 따라가며 마무리 지은 여행은 어떠한 감상도 남기지 않고, 어떠한 정감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저 ‘여행 잘 마쳤다’는 뿌듯함만을 안겨줄 뿐이다. 그에 반해 순간순간 끼어든 어떤 예상치 못한 상황은 그 순간엔 비극을 느끼게 하고, ‘허메 힘들고만~’이라는 푸념이 절로 나오게 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것만큼 삶에 충실했던 순간도 드물다. 그러다 보니 그 당시에 함께 했던 사람들, 그리고 분위기 그 모든 게 기억에 선명히 남는 것이다.
예전에 라디오에서 재밌는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어느 청년들 3명이서 여행을 간 적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맘껏 그곳에서 놀며 시간을 보냈는데, 막상 놀 당시엔 돌아갈 차비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신나게 놀기만 했단다. 집에 돌아갈 때가 되어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기사 아저씨에게 “아저씨 저희를 태워주시면, 저희가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사람들을 즐겁게 하겠습니다”라고 통사정을 했다는 것이다. 어찌 어찌 하여 버스를 타게 되었고,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노래도 부르고, 개그쇼도 하며 그렇게 왔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한참 시간이 흐른 후 그 때를 추억하며 그들이 내린 결론은 “그 때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돈을 써가며 놀았던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버스에서 승객들을 웃기려 되도 않는 개그를 치고, 노래를 불렀던 일이예요”라 했다. 함께 어떤 힘든 순간을 해쳐나갔다는 기억이 그들에겐 둘도 없는 추억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이 날 저녁에 있었던 그런 예측치 못한 상황들 또한 우리에겐 둘도 없는 경험이자 심상으로 자리할 것이다. 그 당시엔 악몽일 수 있지만, 언젠가는 그 때를 회고하며 신나게 말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