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학습발표회 스케치
단재학교는 매년 12월에 학습발표회를 하고 있다. 어떤 때는 한 해에 학기별로 두 번의 발표회를 한 적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 발표회 준비에 많은 시간이 들어가기에, 지금은 한 해에 한 번의 발표회를 하고 있다. 2학기엔 ‘학습발표회’를 하고 1학기엔 ‘작은 발표회’라 하여 학교에서 아이들이 만든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아카펠라 공연을 보여주는 식으로 꾸미고 있다.
이쯤 되면 당연히 궁금할 게, ‘그럼 단재학교는 평가를 어찌 하나요?’라는 걸 거다. 제도권 학교는 한 학기에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와 같은 정기적인 평가가 있으며 중간 중간에 도학력고사, 일제고사 같은 비정기적인 평가가 있다. 여기에 덧붙여 교사가 개인적으로 수행평가를 실시하고, 쪽지시험을 볼 수도 있다. 시험을 통해 학생이 제대로 학업을 하고 있는지, 학교는 공부를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재학교는 그와 같은 평가를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개인의 성장과 학력신장은 크게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학력주의사회’라고 부른다. 그래서 ‘학력 높음=능력 있음=지혜로움=인간성 좋음’이란 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업계고에 가려는 학생에게 “거기 가면 나쁜 얘들이 많을 텐데, 얘 망치면 어찌해요?”라고 말해도 아무렇지 않게 된 것이다. 거기엔 ‘공부 못하는 학생=인성이 좋지 못한 학생’이란 생각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나 또한 이런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건 전혀 별개로 작용하는 것일 뿐인데도 우린 모두 다 얼버무려 그렇게 평가해온 것이다. 이에 대해 우치다쌤의 이야기는 이런 현실을 꼬집고 있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머리가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공부와 같은 시시하고 지루한 일에 한해서 특정 리소스를 아끼지 않고 쏟아 부을 수 있다는 일종의 ‘광기’에 걸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타츠루 너는 정신이 이상한 것뿐이야.”
그렇게 말하고 형은 입시공부에 매진하는 나에게 동정의 눈길을 던진 적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선구적인 통찰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형의 지적은 제대로 ‘학력사회’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말의 진짜 의미를 꿰뚫고 있었다.
-박동섭, Facebook, 2015.11.09.
공부를 잘한다는 건 모든 것을 잘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그만한 권한을 누리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일 중 ‘시시하고 지루한 일’을 잘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치다쌤의 형은 그런 일에만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은 광기일 뿐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예전부터 동양의 교육은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예악’의 ‘예’는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소통을, 음악은 감수성을 기름으로 정감을 함양하는 것이며, ‘사어’는 활을 쏘고 말타기를 하여 몸이야말로 타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서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정신을 다듬고 몸을 단련하여 존재의 역량을 키운 후에야 비로소 실용적인 학문이라 할 수 있는 글쓰기나 수를 익히는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근대화 이후 서구의 잘게잘게 쪼개지고 나눠진 학문이 도입되고 학교의 정규 과목으로 정해지면서, 우리가 하는 공부란 ‘서수’에만 갇히게 되었다. 그러니 ‘서수’만으로 평가하는 상황에서 개인의 성장은 더욱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성장과 학력은 크게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상반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시험이 개인을 한계에 가두기 때문이다. 아이들마다 언어능력이 뛰어난 학생, 신체능력이 뛰어난 학생, 감정교류가 잘되며 감수성이 뛰어난 학생 등 다양하다. 그런데 학교의 평가시스템은 그런 것들은 모두 등한시하고 오로지 텍스트로 한정된 평가를 하여 학생을 평가하며 ‘잘하는 학생’, ‘못하는 학생’을 나누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분명 다른 부분에선 뛰어난 아이인데도, ‘지필평가에서 나쁜 성적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공부엔 젬병’인 사람이 되고 만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다른 가능성은 충분히 많음에도 학교에서 ‘공부엔 젬병’인 학생으로 평가되는 순간, 다른 모든 장점들도 묻혀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런 평가를 받은 학생은 ‘나에겐 다른 장점이 있어’라고 생각하기보다 ‘난 안 돼!’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엊그제 교사 커뮤니티에서 진행된 수련회에 갔었는데, 뒷풀이를 할 때 광주에서 온 초등학교 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쌤은 심양에 있는 국제학교에 다녔는데, 그곳의 평가가 특이했다고 한다. 평가는 절대평가처럼 Pass 여부만을 가리며, 그게 A~F 등급으로 평가되긴 하지만, 그걸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 같으면 “넌 왜 국어만 잘하고 다른 과목은 못하냐? 좀 더 분발해서 다른 과목도 성적을 높여”라고 말할 것을, 그곳에선 “넌 국어분야에 관심이 많고 가능성이 많아”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차이 같지만, 그 안엔 ‘하나만 잘 해도 된다’와 ‘전부 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의 차이가 있으며,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해 준다’와 ‘문제를 얼마나 빨리 정확하게 푸는 능력만을 인정해 준다’는 생각이 기본에 깔려 있었다.
셋째, 시험이 모든 교육과정을 집어삼키기 때문이다. 각 학교는 지역의 특성에 따라, 거주민들의 특징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교육과정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교육부 차원의 국가수준 교육과정이 있고, 각 학교급별로 교육과정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학교는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상급학교를 진학하기 위한 시험이 중요한 것이 되면서 모든 학교의 커리큘럼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교가 시험에 목을 매는 이유는 학생의 성장을 위해서라기보다 모두 다 선망하는 상급학교에 몇 명을 넣을 수 있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에 따라 모든 교과목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사들에겐 수업의 재량권이 있다. 분명 차시에 따른 계획이 있고, 수업 목표가 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수업 자체가 학생을 위해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시험이 중요해지면 수업의 재량권은 무색해지고 만다. 시험을 위한 공부, 그에 따른 시간 배정, 수업의 내용이 모두 하나로 정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단재학교는 시험을 보지 않고 학습발표회를 통해 일 년 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부모님들에게 뽐내며, ‘서술식 평가’를 통해 그 학생의 성장 내용을 기록한다. 사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변한다. 그게 긍정적 변화든, 부정적 변화든 그 변화의 양상을 서술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한 개인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교사의 공력이 배로 들 수밖에 없다. 학생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하며 적은 인원의 학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니 말이다. 단재학교가 소규모 학교를 지향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번 발표회는 ‘송파청소년수련관’에서 하게 되었다. 2011년에 발표회를 했던 곳인데, 4년 만에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롭다.
아카펠라는 2년 전부터 하게 된 수업이다. ‘악’이란 게 지금까지 들려온 음을 듣고 앞으로 들려올 음을 짐작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목소리의 타자성을 발견하고 너의 목소리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타자성과 자아성의 경계, 들려온 음과 들려올 음과의 어울림을 생각하며 조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초반엔 아이들이 힘들어 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노래를 부르며 서로 맞춰야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몇 개월 지나자 어느 순간부터 장난조차도 아카펠라로 하게 됐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도, 심심할 때에도, 서로 놀려줄 때에도 아카펠라로 화음을 맞춰 부르는 신공을 발휘했다.
물론 단순히 아카펠라를 한다고 이런 것을 바로 느끼게 되는 건 아니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서서히 알게 될 것이다. 무대에 서서 함께 화음을 맞춘다. 딱딱 맞아떨어질 정도의 수준 높은 아카펠라는 아니지만,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 함께 화음을 맞추려 노력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자전거 여행은 이미 30편의 여행기로 순간순간의 기록을 남겼기에 여기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단지 처음 편집한 영상이다 보니 많은 부분이 부족하긴 해도,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작품이라는 사실은 밝히고 싶다.
이번 학습발표회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연극이었다. 지금까진 영화팀은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여 상영회를 하고 연극팀은 한 편의 연극을 공연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날엔 특별한 연극이 공연되었다.
바로 연극팀과 영화팀이 모두 함께 한 연극공연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처음으로 연극을 해보는 것이라, 아무래도 대사처리나 행동 등 모든 게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아이들이 최선을 다해 대사를 외우고 연극을 하려 하면 좋은데, 그러지도 않고 무한정 시간만 흐르고 있으니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초이쌤은 고군분투해야 했다. 연습시간에 늦는 아이들을 채근하고 연습 때 장난치며 대충 하려는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안내를 해주고, 어색한 부분에선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들은 “난 영화팀인데 왜 해야 해요?”라는 불평을 얘기하지만, 그 속엔 ‘대충대충 하려는 자신의 마음’에 대한 문제 제기는 빠져 있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모두 다 무대에 섰다.
결론적으로 정말 재밌는 연극이었다. ‘라이어’를 학생들의 이야기로 꾸며, 거짓말이 어떻게 거짓말을 낳는지 유쾌하게 보여줬다. 아이들은 능청스럽게 연극을 잘했고, 자잘한 실수나 어색한 연기를 했던 승빈이는 오히려 뜻하지 않게 분위기를 확 띄워놓았다.
‘무대공포증’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무대에 서서 모두에게 보여줘야 하기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경험을 통해 한 번 넘어서고 나면 다음부턴 별 것이 아닌 게 되기도 한다. 연극무대는 그래서 언제나 기대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로써 학습발표회는 끝이 났다(사진전 보기). 한 해 동안 이 무대에 서기 위해 달려온 것은 아니다. 이 무대는 그저 한 해 동안 해온 것들을 종합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었을 뿐이다. 우린 때론 한 순간만으로 평가 받는 것에 민감해하며, ‘나 자신은 늘 변해가는 존재로 한 순간으로 기록해주지 말고, 긴 시간동안의 흐름 속에서 기록해주세요’라고 외친다.
그 말이 맞다. 지금 그대의 가슴이 뛰고 있고, 손에선 온기가 느껴진다면, 그대 그거면 됐다. 지금껏 나아왔던 그대로 어떤 지고지순한 목표를 향해서가 아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한 걸음씩만 나아가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2015년 한 해를 살아온 그대, 박수 받아 마땅하다. 2016년 새해도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 나아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