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컴 ‘인성교육을 넘어 시민성교육으로’ 1
겨울이 끝자락에 걸려 서서히 봄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체감으로 느껴지던 2월 20일에, 고향 전주에 다시 내려간다. 이미 2월 둘째 주에 설날이 있어서 전주에 다녀왔으니, 겨우 10일 만에 다시 가는 셈이다. 이건 나에게 있어선 아주 서프라이즈하고, 언빌리버블한 일이다.
서울에 둥지를 틀었고 친구들도 거의 대부분이 서울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집 안 행사가 있을 때나 전주에 갈 뿐, 웬만하면 내려가진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 날은 내려간 것이니, 당연히 그곳에 ‘숨겨 놓은 애인’이 있거나, ‘황금 두꺼비’가 있거나 하다고 생각할 만하다. 나도 그런 이유 때문에 내려간 것이라면 오죽 좋겠냐만은, 슬프게도 그런 이유는 전혀 아니었다. ‘전주 사람이 전주에 간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불만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수련회 후기의 맛깔스러움은 사라지고 그저 밍밍한 글이 될 것이기에, 장황한 이야기를 계속 하려 한다.
때는 바야흐로 2016년 새해가 밝고서 29일이 지난 금요일 밤의 열기가 가득한 번화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불금’의 귀신이 거리를 배회하며 가슴 휑한 사람들을 집이 아닌 거리로 내몰던 밤, 나는 단재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준규쌤을 만나게 되었다. 평상시엔 지지학교에서 만나 간단하게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는데, 이때는 준규쌤이 모처럼만에 3주간 방학을 보내게 되어 중간 지점인 광화문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때 5만 년 된 나무테이블 이야기를 들은 건 행운이었고, 기숙학교 특성 상 아이들을 긴 시간동안 봐오며 느낀 이야기를 들은 건 축복이었다.
사람의 대화에도 맛이란 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며 상상력이 촉발되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대화는 ‘달콤한 대화’라 할 수 있으며, 첫사랑의 아픔 같이 가슴 시린 서글픔과 스산함을 남기는 대화는 ‘신맛 나는 대화’라 할 수 있으며,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느끼게 한 후 발분하게 만드는 대화는 ‘짠맛 나는 대화’라 할 수 있으며,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지만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대화는 ‘싱거운 대화’라 할 수 있다. 단연 준규쌤과의 대화는 ‘달콤하면서도 짠맛 나는 대화’였다.
긴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2월 20일에 전주에서 모임이 있는데, 집이 전주잖아요. 그러니 건빵도 청강하는 형식으로 한 번 참여해 보는 건 어때요? 뭐 잠이야 집에서 자면 되니, 좋은 기회가 될 거 같아요”라고 제안을 해주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고민하고 자시고 할 까닭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단재학교에서 4년을 보내며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어떻게든 정리하며, 다시 근본적인 물음인 ‘교육’에 대해 묻고 싶었던 까닭에 귀가 번쩍 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이건 작년 여름에 섬쌤이 갑자기 ‘눈덩이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용산모임을 하자고 할 때의 그런 설렘과 흥분 같은 거였다.
그러고 보면 우연한 만남, 갑작스런 모임을 좋아하게 된 것을 보니 요즘 되게 외롭긴 한가 보다. 외로운 사람에겐 반복되는 현실의 지루함이 아닌 새로운 충격을 원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엔 내 고향 전주에서 모임을 한다지 않은가. 물론 과한 해석이지만, ‘이건 나를 위해 예비하신 어떤 뜻이 있다’는 비기독교인이 기독교인처럼 생각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고나 할까.
이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라는 선언과 함께, ‘그렇기에 사람은 외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외롭다는 건 짐짓 충만한 척, 괜찮은 척 하는 가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공허함을 인정하고 끌어안는다는 것이다.
빔empty이야 말로 가능성이다. 참full은 고집을 낳지만, 빔은 무아無我를 낳는다. ‘모든 게 고통이다一切皆苦’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참에서 비롯되며, 나를 고집하려는 마음我執에서 시작된다. 그걸 그대로 인정해버렸으니 ‘외로운 그대를 위해 더 이상 외롭지 않도록 갖가지 것들을 준비했어’라며 자본이 촘촘히 쳐놓은 허영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고 돌파할 수 있는 저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신영복쌤은 『강의』라는 책에서 “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 경우, 그릇으로서의 쓰임새는 그릇 가운데를 비움으로써 생긴다. ‘없음’으로써 ‘쓰임’으로 삼는 지혜. 그 여백 있는 생각. 그 유원幽遠한 경지가 부럽습니다.”라고 말한 것이지 않을까.
모든 가능성과 다양한 언어들을 품을 수 있을 정도로 텅텅 비어 있는 상태의 나였기에, 준규쌤의 말에 “당연히 가야죠”라고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 보면 건빵은 결단력이 있는 사람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이 때 상황과 상황이 맞아 떨어졌기에 그런 것일 뿐, 평소엔 그저 흐리멍덩하기만 할 뿐이다.
준규쌤과의 만남이 끝나고 어느덧 시간이 하루 이틀이 지나 수련회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당연히 갈 생각이었지만, 정식으로 등록한 것은 아니기에 ‘정말 가도 되는 걸까?’하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모임 당일 아침에 준규쌤께 “오늘 전주에서 하는 교컴연수 갈까 하는데 가도 되나요?”라고 확인 차 문자를 보냈고, 준규쌤은 “물론~ 오세요. 저는 군산공항에 2시 도착. 전주로 이동하면 3시 좀 넘겠네요”라고 답문이 왔다. ‘물론’이란 말에 안도했지만, 문자를 끝까지 읽고선 막막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등록할 때 준규쌤이 계시면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고 청강할 수 있도록 부탁을 드려볼 생각이었는데,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어색함을 무릎 쓰고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어중간한 입장에서 불청객처럼 떠나게 되니, 심장은 콩닥콩닥 거리고 가슴은 두근두근 거렸다. 이쯤 되니, 수련회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9시 버스를 타고 가니 막히지 않고 2시간 40분 만에 전주에 도착하여, 한옥마을까지 천천히 걸어서 갔다. 전주 한옥마을이야말로 ‘갑자기 유명해진다’는 게 뭔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6년 사이에 어마어마한 변화가 있었던지,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곳이 되어 버렸다. 나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홈그라운드이기에 한 편으론 변화된 위상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씁쓸하기도 하다.
거기서 전주천을 따라 올라가니 완판본 문화관 바로 옆에 전주향교문화관이 있더라. 바로 이곳이 오늘 내일 이틀간 수련회가 진행되는 곳이다. 바로 앞엔 인쇄된 종이로 ‘제26회 교컴 겨울 수련회’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시간은 1시 20분이었는데,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거렸다. 1시 30분부터 등록하기 시작하여 2시부턴 일정이 시작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45분까지 서성이다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이미 몇 분의 선생님들이 와서 자리에 앉아 계시더라. 짐짓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둘러보니, 한 선생님이 “뒤에서 등록하세요”라고 알려주신다.
이젠 맞닥뜨려야 할 시간이다. 호기롭게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큰 걸음으로 뒤쪽으로 걸어간다. 거기엔 함영기 선생님과 然在 선생님이 계셨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성함은 가나다순으로 되어 있으니 찾아서 싸인해주세요”라고 말씀하시더라. 그래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는 등록은 하지 않았고 청강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왔습니다. 대안학교인 단재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하셨는지 잠시의 침묵이 흘렀고 그 때 함영기 선생님이 “단재학교라면 박준규 선생님이 일하시던~”이라 말문을 여셨다. 그래서 집이 전주이기에 숙박은 집에서 하고 강의만 청강하겠다고 확실히 말했더니, “그래도 우선은 이름을 쓰고 싸인을 해주시고, 준규 선생님이 오시면 그 때 이야기를 나누는 걸로 하죠”라며 일사천리로 일이 해결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에 올 때까지만 해도 무슨 모임인지 제대로 알아보진 않았다. 그저 ‘눈덩이 프로젝트’를 통해 알게 된 이은진 쌤이 ‘교실 속 인권 이야기’라는 주제로 1시간 30분 동안 무대에 서서 강의를 한다는 것과 섬쌤이 ‘복지국가와 시민성을 바라보다’라는 주제로 15분간 강의를 한다는 것, 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교사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라는 것만 알고 왔을 뿐이다. 이런 모임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 정도는 알고 참여하는 게 예의인지는 모르지만, 전혀 모르고 현장에서 느껴지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왔다.
현장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민들레 1박 2일 모임’ 같은 포근함이 있었다. 여기에 온 분들이 서로 친한지, 얼마나 깊은 인연이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곳을 찾아온 사람에게 냉대하거나, 자기들만의 친분을 과시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안정되었다.
조금 지나니 섬쌤이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온다. 섬쌤은 아는 사람이 많은지 여기저기 인사를 나누며 바삐 왔다 갔다 한 후에 자리에 앉는다. 그래서 무려 두 번이나 만났다는 인맥(?)을 과시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섬쌤의 문제의식은 ‘교육은 교육의 일로만 바뀔 수 없다. 사회와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인데, 내일 강의에서 그게 어떻게 여행이야기와 함께 풀어져 나올지 기대된다.
2시가 넘어서 도착하시는 분들도 있어서 5분 정도 있다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주제는 무려 ‘인성교육을 넘어 시민성 교육으로’다. 역시 아는 게 없으니, 어떤 얘기를 들어도 귀에 쏙쏙 잘 들어올 거란 낙관적인 생각을 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 행복감이 밀려온다. 세상 삼라만상의 진리를 터득한 부타처럼, 어떤 것도 부러울 게 없는 ‘배부른 돼지’처럼 부담이나 걱정이 전혀 없이 행복하기만 했다. 그러니 맘 편하게 강의 하나 하나를 맛있게 먹어볼 생각이다. 어떤 맛인지, 그리고 강의가 나에게 어떤 이야기로 다가오는지, 어떤 미세한 떨림들이 나를 촉발시킬지, 이 상황에 빠져볼 생각이다. 이럴 때야말로 ‘강의가 나를 듣는다’는 표현이 제격인 것 같다.
이제 본격적으로 교컴 1박2일 겨울 수련회의 풍성한 이야기 속으로 거침없이 빠져보자.
목차
대화에도 맛이 있다
전주에서 교컴 수련회가 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의 반응은?
외로운 사람이여, 그대 통하였느냐
불청객 1 -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길을 나서다
불청객 2 - 불청객이 청객이 되기까지
교컴도 몰라요, 교실밖교사커뮤니티도 몰라
강의를 맛볼 준비가 되셨나요?
앎의 유쾌한 여정을 선사해주다
세월호 사건은 인성의 결여 때문에 발생한 것인가?
교육만능주의에 기댄 인성교육
교육은 장기적인 안목을 요하지만, 즉각적인 해결책만을 제시하려 한다
한껏 무르익어가는 분위기
인성교육은 어떻게 등장했나?
인성교육의 뿌리는 반공교육이다
‘마을이 학교다’라는 부정적인 뜻
교육개혁은 고장 난 자동차를 운전하며 수리하는 일
인성교육은 실패한다 1 - 지식교육/인성교육의 이분법이 낳은 왜곡
인성교육은 실패한다 2 - 교육목표를 스스로 위배하며 등장하다
인성교육은 실패한다 3 - 교육 효과에 대해 합의된 내용이 없다
권재원쌤에게서 발견한 우치다쌤의 향기
지적 폐활량으로 알쏭달쏭함에 머물라
결론이 아닌 한 모퉁이를 끌어안도록 일러준 강의
은진쌤과 첫 만남의 기억
강의라는 흐름에 몸을 맡기며
13년 차 교사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강의
역할극을 통해 내 안에 감춰진 본심을 보다
학생들에게 선언함으로 나를 다잡다
통제가 아닌 지켜볼 수 있는 힘이 있는가?
학교 현장이 아닌 삶이란 현장에선 그대를 응원하며
저렴하면서 맛있는 저녁 식사 시간
아이 엠 그라운드 자기소개 하기
토론 1 - 주제를 듣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다
토론 2 - 화려한 말잔치, 하지만 그걸로 끝!
토론 3 - 인성교육에 대해 시민성 교육을 이야기한다는 것
뒤풀이 1 - 어떤 평가를 할 것인가?
뒤풀이 2 - 도덕수업이 역사수업에 도움이 된다?
뒤풀이 3 - 너무 열심히 하려 하지 마세요
뒤풀이 4 - 학생이 교사를 때렸다는 것에 대해
전주한옥마을 1 - 관광지가 아닌 삶의 공간
전주한옥마을 2 - 한옥마을이 건빵에게 던진 메시지
교육을 바꾸는 15분 1 - 자신이 살아온 결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가
교육을 바꾸는 15분 2 - 72일간 북유럽 4개국을 돌아보고 난 소감
교육을 바꾸는 15분 3 - 핀란드의 교육을 체험하고 난 소감
교육을 바꾸는 15분 4 - 민주적 환경과 혁신학교
교육을 바꾸는 15분 5 - 교사의 한계가 느껴지던 그 순간이 뛸 수 있는 그 순간
교육을 바꾸는 15분 6 - 차별은 체계적으로,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교육을 바꾸는 15분 7 - 열정, 다양성, 그리고 선입견
자의식을 버리고 해방감을 맛보다
교학상장의 역동적인 흐름에 빠져들다
해방감을 느낀 그대, 교학상장의 가르침을 따라 거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