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빵 Jan 29. 2016

겨울방학에 새로운 숙제를 받다

엘리시안 강촌 스키여행 1 (16.01.25~27)

2016년 1월 25일은 단재학교의 겨울방학이 끝나고 2016학년도 1학기가 시작되던 날이다. 한 달여의 아쉬운 겨울방학은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 올겨울은 기록적인 한파가 찾아왔고, 남부지방엔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그 기간동안 난 뭘 했지?




나에게 던진 겨울방학 숙제

     

방학이 시작 될 때만 해도, 이걸 해볼까, 저걸 해볼까 생각은 많았지만 막상 시작되면 별 것 없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어렸을 때 방학계획표를 짤 때의 모습도 딱 이랬다. 계획표를 짠다고 거의 하루를 다 보내곤 했었는데, 야심차게 24시간을 시간대별로 나누어 배치했다. 그 중 단연 ‘공부’에 제일 많은 시간을 할당했고 자는 시간은 11시, 일어나는 시간은 6시로 정할 정도로 ‘바른 생활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게 지켜질 리는 만무했다. 작심삼일은커녕 6시간 동안 계획표대로 살기도 힘들었으니 말이다. 어찌 보면 그 땐 계획표를 세우는 게 하나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시행착오를 어린 시절에 이미 경험해봤기에 지금은 방학이라고 해서 계획을 세우진 않는다. 그저 ‘이번 방학엔 이걸 해야지~’ 정도의 큰 테두리만 정한다. 그래서 이번 방학엔 야심차게 ‘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기를 쓰자’고 계획을 세웠다. 2015년에 했던 가장 큰 프로젝트이니만치 그 과정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 국립생태원에 갔다 왔다. 그러곤 쭉 방콕을 하며 여행기를 썼다지.




미완의 숙제, 그리고 새로운 숙제

     

지금까지 장시간 여행을 했던 적은 2009년과 2011년에 한 달 동안 국내를 걸어 다녔던 국토종단사람여행, 2013년에 3주간의 카자흐스탄 여행, 6일 동안 지리산 종주여행, 2014년 남한강을 따라 4일간 충주까지 걸었던 남한강 여행이 있다. 이 중 남한강 여행만 빼고 여행기를 썼는데, 하루 당 한 편씩 쓴 것이다.

그런 경험 때문에 이번에도 하루 당 한 편의 여행기를, 좀 더 쓰고 싶으면 하루 당 두 편의 여행기를 쓸 생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쓰다 보니, 좀 더 자세하게 그 때의 감상을 담고 싶어졌고 그러다 보니 급기야 하루 당 4편의 여행기를 쓰게 되었다. 방학 기간 중 4일째 여행기까지 썼으니, 총 16편의 여행기를 썼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무한정으로 양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너무 자질구레한 이야기로 여행기의 흐름을 깨는 건 아닌가?’라고 경계하게 된다. 무조건 글이 길다고 좋은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 여행기의 흐름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유지하되, 그 때의 상황이나 생각을 잘 묘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새로운 숙제를 받고 잠시 동안 ‘멘붕’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렇게 달라진 상황 때문에 방학동안에 여행기를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런데 그 때 우연처럼 새로운 숙제를 받게 된 것이다. 삶은 한 치 앞도 모른다고 하던데, 정말 지금의 상황이 그렇다. 새로운 숙제를 받고 잠시 동안 ‘멘붕’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연히 깊이 생각해봤어야 할 일이었는데, 적응한다는 핑계로, 삶에 만족한다는 합리화로 그저 미루어왔던 일이 이제야 터졌을 뿐이다.                



▲ 스스로에게 낸 숙제도 다 마치지 못했는데, 새로운 숙제를 받다.




새로운 숙제 1 - 동섭쌤의 강의가 던진 숙제

     

여름방학 땐 친구가 아무 계획 없이 갑자기 불러내 여행을 떠났는데, 뜬금없기에 무척이나 행복한 순간이었다. 워낙 계획대로 사는 걸 좋아하고 정해진 것만을 하던 인간인지라, 그런 식의 우발적인 사건은 내 안에 깊이 묻힌 호기심, 무모함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우발적인 사건은 겨울방학에도 계속되었다. 난 그걸 ‘삐딱선’이라 표현하는데, 이번엔 한 번도 아닌 두 번의 삐딱선을 탈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 삐딱선은 동섭쌤의 강의를 듣게 되면서 찾아왔다. 2012년에 비고츠키 강의를 들으면서 동섭쌤을 알게 되었는데, 그 땐 ‘다른 관점의 비고츠키도 있나 보다’라고만 생각했다. 아무래도 초임교사로 단재학교에 왔고 이제 교육현장에 첫 발을 내디딘 시기라, 모든 게 생소했고 모든 게 신기했다. 그 와중에 들은 강의는 그런 생소함을 더욱 생소하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비고츠키와는 많이 다른 걸’이라는 정도로 이해될 뿐이었다.




이 때 강의를 들으며, 4년 동안 무언가 열심히 해왔던 내가 붕괴되고 거부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4년 가까이 지나며 어느덧 이 생활에 적응되었고 그에 따라 호기심은 진부함으로, 생소함은 익숙함으로 변했다. 동섭쌤은 스타 강사가 되어 전국을 누비며 강의를 하기에 좀처럼 강의를 들을 기회가 없었는데, 오랜만에 수도권에서 강의를 한다기에 인사도 드릴 겸 찾아가게 된 것이다. 그 때만 해도 ‘예전에 들었던 강의이니, 별로 새로운 건 없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오만이었다. 4년 전에 들었던 강의도 100% 이해한 것도 아닌데, 그저 한 번 들었다는 이유로 다 안다고 생각한 것이니 엄청난 착각이라 할 만하다. 이 때 강의를 들으며, 4년 동안 무언가 열심히 해왔던 내가 붕괴되고 거부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니체의 말처럼 ‘멸망시킬 태풍’을 가지고 있냐고 묻는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예전엔 교육과 나, 사회와 나를 생각할 때 나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교육이 잘못되었거나, 사회가 이상하면, 그런 교육의 잘못된 부분만, 사회의 병폐만 고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좀 더 쉽게 얘기하면, 자동차가 고장 나면 차만을 고칠 수 있듯이 교육이든 사회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때 강의를 들으니, ‘나-교육’, ‘나-사회’는 떨어질 수 있는 관계도 아닐뿐더러, 아주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교육이나 사회는 자동차처럼 나와 동떨어진 게 아니라, 내 몸의 장기처럼 붙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육이든 사회든 바꾸려면, 나의 생활습관, 심지어는 사고방식까지 완전히 고쳐야만 된다. 왜냐 하면 그런 사회의 모순, 교육의 부조리를 지탱하고 있는 게 바로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간 강연장에서 한 방 세게 얻어맞고 넉다운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것이 이번 방학에 새롭게 받은 첫 번째 숙제다.                



▲ 그저 인사 드릴 겸 찾아간 강의에서 뜻하지 않게 숙제를 받아 왔다.




새로운 숙제 2 - 공교육 교사들이 던진 숙제

     

한 때는 공교육 교사를 꿈꾸다가 그게 좌절되자, 출판사 편집자가 되기 위해 준비했었다. 그러다 운 좋게 대안학교인 단재학교에 교사로 오게 되면서 다시 교육자의 꿈을 꿀 수 있게 된 것이다.

‘군자는 그 자리에 처하여 그 자리에 합당한 행동에 최선을 다할 뿐, 그 자리를 벗어난 환상적 그 무엇에 욕심내지 않는다(君子 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중용』 14장’라는 경구(경구 관련 글 보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생각도 달라지고 고정된다. 지금은 교사이기에 교육에 대해, 배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사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자연스럽다.

섬쌤은 민들레 모임 때 얼핏 보기만 했을 뿐 얘기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작년 8월에 ‘눈덩이 프로젝트’를 제안해서 알게 되었고 모임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며 좀 더 친해졌다. 그러고 나서 이번 겨울방학에 다시 한 번 모임을 제안하여 섬쌤을 포함한 초등학교 교사 3명과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 날의 주제는 교육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도 어느덧 단재학교에서 근무한 지 4년이 흘러 5년 차에 접어드는 만큼, 교육에 대해, 배움에 대해 어느 정도 강냉이를 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3명의 교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나의 생각은 한 여름의 아이스크림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말았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좁은 물에서 지내오며 경험한 것들이 일반화될 수 있는 양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의 좁음은 말의 빈곤을, 말의 빈곤은 행동의 부자연스러움으로 이어졌다.




‘지금이 가장 만족스러워’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단재학교에 지낸 시간은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고 그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니 ‘지금이 가장 만족스러워’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현실에 만족을 느끼는 걸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좁은 물에 살면서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나만의 완고한 틀을 만들고 있다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실상 현장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여러 가지를 배우면 배울수록 혼란이 사라지거나 앎이 체계화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례에 혼란스러워지고, ‘내가 아는 건 거의 없구나’라는 체념으로 앎은 더욱 희미해질 뿐이다. 그런 상황에 이르러선 자민쌤의 말처럼 “어떤 게 옳은지,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이것이 이번 방학에 새롭게 받은 두 번째 숙제다.                     



▲ 에이드와 커피는 달콤했지만, 그 때 던져진 숙제는 쓰고도 썼다.




2016년은 지적폐활량을 키우는 해 

    

그런 두 번의 삐딱선을 타며 혼란스러움과 답답함을 안은 채 2016학년도 1학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쯤 되면 어떤 분들은 ‘교사가 그렇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면서 어떻게 아이들 앞에 서겠어요’라고 불안해할 것이다. 나도 예전엔 ‘앞에 선 사람이 중심을 잘 잡지 못하면 따르는 사람들에게 안 좋은 영향만 끼친다’고 생각했으니, 그런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교사의 행동과 말투, 그리고 정신 상태는 이제 커 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교사는 우람한 나무처럼 확신이란 땅에 뿌리 내리고 꼿꼿하게 서서 아이들에게 어떤 확고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교사도 한 명의 사람이고, 늘 흔들리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애써 ‘멀쩡한 척’, ‘확고한 척’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거짓을 보여주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러운 대로,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그걸 그대로 간직할 필요도 있다. 그 속에서 어떻게 생각이 정리되어 가는지, 어떻게 다시 기초를 쌓아 가는지를 보여주면 된다. 동섭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에 둘러싸여서 초초함과 불만과 위화감으로 숨이 막히면 그 사태를 벗어나기 위하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기 쉬운 논리로 감싸버리려고 한다.”라고 조급하게 혼란을 정리하고, 불안을 해소하는 행위를 지적하며, “곤란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는 곧바로 결론을 내리지 말고, 문제가 자신 안에서 입체적으로 보일 때까지 계속 몰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하고 있다(원본 글 보기). 이를 동섭쌤은 ‘지적폐활량’이라 표현했는데,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도 지적폐활량을 키워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러운 대로,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그걸 그대로 간직할 필요도 있다




그래서 2016년 한 해는 ‘지적폐활량’을 키워가는 해로 정했다. 이게 그저 빈 구호처럼 선언하는 것에만 그칠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지적폐활량을 키워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될 것인지는 몇 년이 지나봐야 알 것이다.

개학여행기를 쓴다고 하면서 이상한 소리만 했다. 하지만 나의 상황을 말하지 않고 그냥 여행기만 쓰면 너무 사실 위주의 글이 될 것만 같아(몇 시에 일어나 밥을 먹고, 몇 시에 스키 타고, 몇 시에 잠을 잤다는 식의),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턴 혼란스러운 건빵이 단재 친구들과 떠난 개학여행에서 어떻게 지적폐활량을 키워가고 있는지, 순간 순간에 무엇을 느끼고 보았는지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 이제 본격적으로 2박 3일간의 개학여행기 시작.






목차     


1. 겨울방학에 새로운 숙제를 받다

나에게 던진 겨울방학 숙제

미완의 숙제, 그리고 새로운 숙제

새로운 숙제 1 - 동섭쌤의 강의가 던진 숙제

새로운 숙제 2 - 공교육 교사들이 던진 숙제

2016년은 지적폐활량을 키우는 해     


2. 단재학교 개학여행을 가다

1월 마지막 주에 개학과 동시에 여행을 떠나는 이유?

올겨울 최악의 한파가 찾아온 날 떠나다 1

올겨울 최악의 한파가 찾아온 날 떠나다 2

백양리역에서 가방을 놓고 내린 사연

깔끔한 숙소, 하지만 비싼 음식 가격

장갑이 없으시다구요? 우리에겐 양말이 있잖아요~     


3. 도전엔 늘 불안이 따른다

스키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실력에 따른 복장이 있을 뿐

도전 보드 1 - 두 번째 스키장 방문에 보드를 타게 된 사연

도전 보드 2 - 필수 준비물, 그리고 스키슈즈 신는데 30분 걸리다

도전 보드 3 - 보드와 티익스프레스의 공통점

도전 보드 4 - 새로운 도전엔 언제나 불안이 따른다


4. 처음으로 보드를 타다

도전 보드 5 - 육체는 타자이기에 지배하려 하기보다 이해하려 해야 한다

도전 보드 6 - 타자성, 무계획성에 몸을 던지다

도전 보드 7 - 타자성, 무계획성에 몸을 던진 경험들

실전 보드 1 - 보드에서 일어서기

실전 보드 2 - 처음이란 어색함과 어설픔을 끌어안기

실전 보드 3 - 실력을 키우며 천천히 갈 것인가, 엄청난 난이도로 한 번에 비약할 것인가?

여행 중 가장 조용했던 밤을 지내다


5. 단재학교의 2016학년을 말하다

2016년 학사일정, 예술과목에서의 선택

교사 없는 학교 1 - 2012년에도 진행되었으나 시기상조였다

교사 없는 학교 2 - 실패가 아닌 시기상조인 이유

교사 없는 학교 3 - 자유를 누려봐야 누릴 줄 안다

봉사활동 1 - 학사일정 중 봉사활동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다

봉사활동 2 - 강제를 통해 의식을 바꾸려는 어리석음을 범하다


6. 두 번째 보드 도전기

두 번째 하면 어찌 되었든 첫 번째보다는 익숙해진다

두 번째로 보드를 타는 이의 각오

실전 보드 4 - 바보는 빠름을 추구하고, 실력자는 완급조절을 추구한다

실전 보드 5 - 넘어지면서 배우고, 한계에 직면할 때 배운다



매거진의 이전글 흔들리는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