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 29 - 15.10.7(수)
소조령은 이화령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 할만하다. 이화령을 넘으며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은데’라는 것을 느꼈으니, 소조령을 오를 땐 마음이 가벼웠다.
보통은 한강을 따라 낙동강까지 달리는 코스를 많이 가니, 소조령을 먼저 넘고 이화령을 넘게 된다. 소조령을 넘으며 ‘역시 힘들구나’라는 것을 느낀 후에 더 높은 이화령을 올라야 하니 절로 기운이 팽길 테지만, 우린 반대 코스로 소조령을 가는 것이니 기운이 샘솟았다.
이 때는 아이들도 이화령을 넘을 때와 다르게 한결 여유로워진 듯 하더라. 이화령을 오를 때 민석이와 준영이는 잘 달리는 편이었지만, 재익이와 현세는 많이 힘들어 했다. 하지만 소조령을 넘을 땐 재익이의 장난기가 발동한다. 카메라로 찍고 있는 나를 향해 달려오더니, “뭘 찍어?”라는 농담과 함께 손을 번쩍 드는 동작을 선보이고 유유히 사라졌으니 말이다.
자전거 여행을 하다 보니 가장 힘들 땐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약간의 기운가 있을 때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현세는 첫 날 저녁과 둘째 날 저녁에 엄청 힘들었는지 장난도 치지 않고 말도 하지 않았지만, 조금 기력이 회복되었다 싶으면 먼저 와서 “부엉이”와 “딱 좋다”와 같은 말장난을 쳤다. 이처럼 이화령 때 재익이는 힘든 나머지 말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먼저 와서 장난을 친 것이니, 소조령을 넘는 것에 대해 얼마나 부담을 느끼지 않는 줄 알만 하다.
이로써 알 수 있는 사실은 누군가 불평 가득한 소리든지, 과잉된 행동이든지 할 때, 그걸 주의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 그걸 표현하는 게 그나마 어떤 힘이라도 있는 것이기에 그 때 그런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통 그런 메시지를 보낼 때 ‘저러다 말겠지’하는 심정으로 흘려보내곤 한다. 그러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되거나, 차분해지면 ‘괜찮아 질 줄 알았다니까’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모든 표현을 멈춘 순간이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다 아예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행동을 멈추게 됐을 때, 그 때부터 안은 곪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교육이든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자기표현을 통해 안에 감춰지고 억눌러진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식으로 표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자기표현을 해야 한다고 하면 겁부터 내게 마련이지만, 서서히 라포를 형성한 후에 함께 생활하다보면 자연히 자기의 이야기를 하게 되며 닫혔던 마음을 열게 된다.
작년 2월에 재익이와 우리 집에서 일주일간 생활한 적이 있었다.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나는 그저 재익이가 학교에 잘 나올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생각만으로 그와 같은 제안을 하게 된 것이다. 사내 두 명이 원룸에서 함께 생활하는 게 얼마나 어색하고,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하지만 일주일이란 시간을 어떻게든 함께 보내며 생활하다 보니 어느 부분에선 동지의식 같은 게 싹텄나 보다. 그러더니 마지막 날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나하나 이야기해주더라.
난 그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날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나와 하등 관계없는 사람에게 나의 이야기를 하는 건 어찌 보면 쉽다. 그 사람과 얽히고설켜 찌질했던, 비루했던 이야기가 흘러보내는 이야기는 될 지언정, 한낱 가십거리가 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답답함이 느껴질 때 채팅이나 번개톡을 통해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건 반대로 말하면 자신과 얽혀 있는 사람에겐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재익이도 처음엔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동안 생활하며 어떤 공감대가 생기며 나름 신뢰도가 쌓이다 보니, 결국 마지막날엔 그러한 이야기를 해주게 된 걸 테다.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된 후론 전보다 서로 대하기가 훨씬 편해졌고, 그건 오늘처럼 “뭘 찍어?”라는 장난을 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이다.
소조령에 오른 지 20분 만에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이화령처럼 정상에 휴게실이 있고 전망대가 있진 않지만, 정상이라고 적힌 팻말이 보이자 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다. 이렇게 순식간에 어려운 고비들이 끝나니 기분이 좋았다. 지금 시간은 12시 53분밖에 되지 않았다. 이젠 거의 평지만 달리면 되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페달을 밟아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화령의 내리막길을 달릴 때 캠코더로 찍고 싶었는데,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가 날 거 같아 찍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선 찍어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다운힐의 짜릿한 순간을 남기지 못하면 후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캠코더를 끈으로 동여 매 바람 저항에도 날아가지 않도록 단단히 묶은 후에 촬영을 시작했다. 내려가는 속도가 있다 보니 공기 저항으로 캠코더가 자꾸 옆으로 돌아가려 하기에 한 손으로는 캠코더를 붙잡고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내려간다. 위험한 상황임을 알기에 최대한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다행히도 촬영도 순조롭게 잘 되었고 나름 다운힐의 짜릿함도 느낄 수 있었으니 이석이조다.
오늘은 드디어 작년 도보여행의 종착점이었던 충주에 들어가는 날이다. 도보여행이 끝난 곳에서 자전거 여행이 시작된다는 상징성이 있고, 어찌 되었든 한 번 왔던 곳이기에 낯섦이 아닌 친근함이 있다.
수안보에 와서는 잠깐 회의를 했다. 이미 준영이는 이곳에 가족여행을 와본 적이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음식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게스트하우스에서 출발 전부터 계획해놓고 있었다. 메뉴를 정하는데, 서로의 의견이 쉽게 일치하지 않아 수안보 근처를 돌아다니며 음식점을 찾기로 했다. 그 때 맘에 드는 백반집을 찾아 그곳에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을 시켜서 먹었다. 현세와 재익이는 밥 한 공기를 더 시켜서 먹었고, 준영이는 무려 네 공기를 더 시켜서 먹었다. 확실히 체력 소모가 많은 여행이다 보니, 아이들은 먹을 기회가 있으면 배불리 먹으려 한다.
현세의 경우 자전거 여행 중 식성이 바뀐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자전거 여행 전에는 밥은 거의 1/3 공기만 먹고 거의 군것질을 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그 땐 “식탐이 별로 없어요”라는 말을 했었고 ‘먹고 싶은 것은 언제든 먹을 수 있으니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는 밥 두 공기는 보통이고 반찬들도 어떻게든 많이 먹으려 하더라. 그래서 물어보니 “언제든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전거 여행이라 힘도 많이 드니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려구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바뀐 식성은 자전거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그대로 유지 되었다. 예전엔 피자를 시키면 한 두 조각 정도만 먹었을 텐데, 이젠 먹을 수 있는 만큼 많이 먹게 되었으니 말이다. 흔히 이런 경우 ‘키가 크려나 보다’라고 말할 테지만, 난 ‘여행이 먹는 것의 소중함을 알게 했다’고 정리한다.
밥을 먹고 2시 30분에 출발했다. 29.75km만 남았기에 아무리 천천히 가도 6시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4일간의 여행 중 3일 동안은 늘 시간에 쫓기며 여행을 해야 했다. 첫째 날엔 준영이 자전거를 고치고, 낙동강 자전거길을 찾느라 늦게 출발하여 늦었고, 둘째 날엔 연쇄적으로 펑크가 나는 바람에 무려 6시간을 고친다고 애쓰느라 늦었고, 셋째 날엔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둘째 날의 여파로 대부분의 자전거를 수리하느라 늦었다. 그에 비하면 오늘은 완전 수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날들에 비하면 오늘은 시간에 쫓길 이유도, 어떤 피치 못할 상황에 당황할 이유도 아주 무난한 날이다.
5시 20분에 탄금대에 도착하여 신립장군동상이 있는 곳까지 산책을 한 후에 근처 편의점에서 저녁을 먹고 찜질방에 들어왔다. 7시도 되지 않았는데 찜질방에서 뭘 하면 저녁시간을 보낼지가 은근 걱정이 된다.
여행이 중반에 접어들었다. 내일부턴 우리가 걸었던 길을 거슬러 달려간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한결 가볍다. 원래 여주에서는 도보여행 때 잠을 잤던 ‘남한강황토불한증막’에서 잠을 자려 했다. 그 곳은 현세 말로 정리하면 “1층에서 잠을 잤는데, 깨어보니 2층이었어요”라는 추억이 있다. 하지만 오늘도 내일도 찜질방에서 자면 피로가 전혀 풀리지 않을 것 같아, 내일은 여주에 있는 모텔에서 자기로 했다. 이래저래 편안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