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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19. 2016

문장이해의 국어교육을 넘어 시로 한바탕 놀자

단재학교 국어수업을 시작하며 - 13.2.7(목)

예전에 들은 말이다. “영상물에 익숙한 세대에게 책에 한가득 실려 있는 글들은 암호문 같은 느낌이예요”라는 말이었다. 학생으로부터 들은 말인지, 인터넷에서 본 것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말대로라면 아이들에겐 한글로 써 있는 글이 ‘Привет Я печенье учителя(러시아어)’라는 글처럼 깜깜하고 아득하게 보인다는 말이 된다. 한국에서 태어나 여태껏 한글을 보고 들으며 자라왔을 텐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건 마치 ‘물속에서 사는 물고기가 물을 두려워한다’는 것과 같은 황당한 말이니 말이다.                



▲ 아이들에겐 이처럼 책을 볼 때, 구멍이 송송 뚫린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인 걸까?




부인할수록 선명해지는 현실

     

그 날 이후로 그건 나에게 던져진 선문답 같은 거였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 봐도 이해할 수 없고 부인하려 해도 나를 따라다니는 선문답. 그런데 선문답이 꿈 속 상황이 아닌 실제현실이라니, ‘차 한 잔 마시다 가시오喫茶去’라는 화두를 던진 조주趙州(778~897) 선사처럼 나도 차 한 잔 마시며 모든 당황, 집착, 고정관념을 모두 다 내려놓고 싶을 밖에. 그래서 그 때부터 물끄러미 아이들이 글을 대하는 방식을 관찰했다. 여러 날 관찰하다보니, 그제야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감이 서서히 오더라.               



▲ 차 한 잔 마시다 가시오.




문자가깝지만 먼 그대

     

아이들도 글을 열심히 본다. 인터넷 스포츠 뉴스의 기사를 보고 친구가 보내온 카톡의 문자를 보며 국어 문제지의 지문을 본다. 이쯤 되면, 문자의 홍수 속에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왜 글과 멀어졌을까? 

아이들이 인터넷 뉴스를 볼 때, 기사를 집중해서 읽지 않는다. 제목을 통해 내용을 유추하거나 몇 단어만 보고 기사의 전체 내용을 안다고 착각한다. 카톡으로 나누는 대화는 몇 개 안 되는 한정된 단어로 수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전자기기의 특성상 빨리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다 보니, 제대로 모양을 갖춘 문자를 찾아보기가 힘들 지경이다(‘OTL’ 이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카톡 문자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일반적인 언어생활에선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학교의 국어 과목에 있다. 간단히 생각해보면, 국어를 잘하면 언어생활에도 능하고 문자로 된 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국어 과목은 글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과목이 아니라 푸는 과목이 된지 오래다. 문제를 풀기 위해 지문을 보지, 지문을 이해한 후에 문제를 풀지 않는다. 문제가 요구하는 답을 최대한 빨리 찾기 위해 숨은 그림 찾듯이 지문을 훑으며, 핵심어 몇 개로 주제를 유추하여 답을 적는다. 글을 이해하려 하거나 암기하는 것은, 현실 국어 교육에선 ‘바보 같은 짓’이 되고 말았다. ‘엽등躐等(겉 넘기)’을 부추기는 국어교육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글에 대한 흥미를 가지며 언어에 대한 감수성을 키울 수 있겠는가. 아이들이 글에서 멀어지게 된 데에 황폐한 국어교육으로 언어적 감수성을 싹뚝 잘라버린 교사들의 책임이 크다.     



▲ 우린 이것을 보면서 '공부 열심히 하네'라고 하지, 위화감을 느끼진 않는다.




Homo loquens(언어적 인간⇒ homo ludens loquens(놀이하는 언어적 인간) 

    

그렇기에 언어란 무엇이고 국어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국어교육을 왜 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언어를 가지고 놀 수 있는 인간’이라는 목표를 정한 데엔 그와 같은 고민의 시간이 있었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을 나타내는 명칭은 ‘호모 로퀜스’다.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하기에 그와 같은 학명이 붙여진 것이다(물론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하지만 언어적 인간만을 내세울 경우 위에서 예로 든 것과 같이 국어교육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우리가 다시 점검해 봐야 할 것은 개념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언어가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라면 ‘언어적 인간Homo loquens’에서 ‘놀이하는 언어적 인간homo ludens loquens’으로 개념을 재정립해야 한다. 언어를 가지고 놀 수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글을 마주치더라도 지레 겁먹지 않고 차근차근 이해하며 읽으려 할 것이다. 이들에게 글은 ‘놀이의 대상’이지 ‘풀이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풀이의 대상’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 타자를 대면하듯 글을 마주하고, 타자를 궁금해 하듯 글에 흥미를 느낄 수 있다면, 적어도 글이 암호문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누가 뭐라 하지 않더라도 글을 가지고 맘껏 놀 수 있는 ‘호모 루덴스 로퀜스’가 될 수 있으리라.               



▲ 언어는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걸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현재의 국어교육은 표현능력을 거세해 버렸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삶 

    

‘놀이하는 언어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글과 친해져서 일점이라도 더 받자’는 차원의 논의가 아니다.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그 욕구는 때론 글을 쓰는 것으로, 때론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때론 춤을 추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처럼 ‘놀이하는 언어적 인간’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라는 말이다. 

사회가 체계화되고 일이 분업화되며 전문직종이 다양화되면서 인간은 오히려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소외시키고 말았다.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는 작가에게,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욕구는 화가에게, 춤을 추거나 음악을 연주하고자 하는 욕구는 댄서나 뮤지션에게 넘겨주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열심히 활동한다하여 우리의 욕구가 해소되는 것일까? 만약 누군가에게 일임하여 나의 욕구가 해소되었다면, 우리 사회가 이토록 삭막해지고 행복지수가 낮은 사회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욕구는 남에게 일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만약 일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속 시원하게 나의 욕구를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모두다 욕구의 편차가 있으며 풀고자 하는 방법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쉬쉬하며 욕구를 감추고 드러내지 않도록 사회가 자꾸 요구하고 있다. 그로인해 나 자신 또한 그러한 욕구가 있었는지도 조차 모를 정도로 황폐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젠 잃어버린 나의 욕구를 되찾고 그걸 표현하려 노력해야 한다. ‘놀이하는 언어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서는 ‘놀이하는 언어적 인간’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내가 잃어버린 욕구를 선명하게 기억해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 앙리 마티스의 춤(1910)- 인간은 놀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




개념암기 교육의 한계

     

그렇다면 ‘놀이하는 언어적 인간’을 어떻게 길러낼 수 있을까? 어떻게 텍스트에 대한 부담은 내려놓고 맘껏 글을 가지고 놀며 글이 사람과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할 수 있을까? 일반 국어시간에 하는 것처럼 개념을 가르치고, 단어의 뜻을 외우게 하면 될까?

개념(문자)은 세상을 분절하여 파편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무지개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녔음에도 우린 ‘일곱 색깔 무지개’라고 표현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무지개를 볼 때에도 빨간색 다음에는 주황색이 올 거라 생각하고 옅은 불그죽죽한 색이 보이면 ‘주황색’이라고 단정 짓는다. 현실을 제대로 보려하기보다 파편화된 지식에 현실을 끼워 맞추기에만 급급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 암기교육의 한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개념을 익히는 것은 방편에 불과하다. 방편을 활용하여 앎의 본질에 들어가는 수단으로만 사용하면 되는 것이지 그걸 국어교육의 전면에 내세워선 안 된다. 부분이 전체가 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부분조차 알지 못하면 전체를 영원히 알 방법이 없으니 등한시해서도 안 된다. 개념 암기교육은 최소화하고 다른 방법을 고민해봐야 한다.      



▲ 개념이 본질에 앞서는 게 아니라, 본질이 개념에 앞선다




시로 한바탕 놀다

     

그런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 ‘시’였다. 시는 개념공부가 가진 파편화된 앎의 한계를 최대한 극복한 정제된 문학 장르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소소한 가치들에 관심 갖고 개념의 한계를 유희적으로 드러내며 한글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또한 시는 다른 장르로 전환하는 것도 쉽다. 시는 만화나 산문, 편지글로 바꾸어 표현하며 글의 다양성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기초자료가 된다. 이러한 시의 특성을 통해 한 바탕 푸지게 놀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런 경험을 통해 글에 대한 흥미가 생긴다면 그 이상 바랄 게 무엇이랴.

그렇기에 ‘시는 열쇠다’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다. 미지의 세계, 우리가 지금껏 안다고 자부해왔던 세계를 부수고 가려진 세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시를 통해 세상의 익숙하지만 낯선 이면을 보고 나 자신의 숨겨진 면모를 볼 수 있다. 열쇠를 손에 쥔 자, 그 아니 열어보겠으며 그 세계 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겠는가. 방 안에 콕 처박혀 세상을 그리는 사람은 ‘두려움’이란 감정으로 세상을 덧칠할 테지만 열쇠를 손에 쥐고 세상을 그리는 사람은 ‘설렘’이란 감정으로 세상을 한바탕 그려 제칠 테다.



▲ 한바탕 시를 가지고 그림으로 그리고, 자신의 시를 써보고 놀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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