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학교적이지 않은 학교, 두 번째
트위스트 교육학 4강의 제목은 ‘학교를 학교적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이다. 이 제목은 얼핏 들으면, ‘학교’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들어가서 묘한 느낌을 준다.
공교육이 붕괴되고 사교육 시장이 팽창하면서, 누구 할 것 없이 ‘공교육 정상화’를 외치게 됐다. ‘공교육 정상화’라는 주장은 이미 너무 닳고도 닳은 말이지만, 그렇다고 그 주장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누구나 ‘지금의 학교 교육은 무언가 잘못됐다’라고 느끼고 있으며, 그에 따라 ‘비정상적인 부분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의 밑바닥에 ‘학교를 학교답게 해야 한다’는 말이 깔려 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은근히 공자의 ‘정명론正命論(이름을 바로 잡는다)’과 겹쳐 보인다. 『논어』라는 책엔 여러 키워드들이 나오는데, 그 중 저번 후기에서 살펴본 ‘인仁’도 중요하지만, 핵심 키워드는 뭐니 뭐니 해도 ‘정명론’이라 할 수 있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춘추시대(BC 770~403)로 전통적인 가치들이 무너지고 이익을 위해서면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신하가 임금을 죽이며, 제후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시대였다. 비록 전통적인 가치를 지닌 주나라가 여전히 남아있기에 제후국들이 방자하게 날뛸 수는 없지만, 주나라가 점차 기울어지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런 혼란 상태는 더욱 심해질 것이며, 그에 따라 이상적인 가치들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이런 혼란의 시기였기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顔淵」 11)’는 정명론을 내세웠다. 각자에겐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적으로 주어진 역할과 그에 따른 책임이 있다. 그러니 그런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다면, 가정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나라는 혼란스러워지지 않을 것이며, 천하는 태평해질 것이라는 게 정명론의 핵심이다. 정명론을 드라마식의 대사로 표현하자면, “너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이야”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원문은 ‘AA’식의 같은 글자 두자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단순히 같은 글자를 나열한 것은 아니다. 앞 글자 ‘A’는 현실의 역할을 나타내며, 뒷 글자 ‘A’는 이상적인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실의 역할이 이상적인 모습에 가까워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모습을 사람들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공자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걸 알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고 봤다. 그러니 자신을 부단히 닦으면(克己), 천성적으로 타고난 이상적인 모습에 가까워진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정명론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중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 것이, 바로 계급주의 모순을 타파하기보다 아예 순응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계급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으니, 그 계급에 맞는 역할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천자는 천자로, 제후는 제후로, 노비는 노비로 태어난 것이니, 그걸 억울하다고 할 게 아니라, 정해진 계급에 따라 그 역할만 충실히 하면 된다. 물론 그 당시엔 계급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렇다 해도 묵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하니 문제라는 것이다.
두 번째 비판은 기독교의 소명론처럼, 역할이 이미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봤다는 것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자신의 역할이 정해져 있기에, 그에 맞춰 행동하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존재보다 역할이 앞서게 되고, 그러한 역할이 나를 대변하게 된다. 하지만 역할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유전자에 새겨지듯 찍혀 나온 것이 아니라, 살다 보니 이러 저러한 영향을 받으며 그런 역할을 도맡게 된 것이다. 아래의 시는 역할이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한 옷걸이가 한마디 했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거라.”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 거죠?”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봐왔기 때문이지.”
역할이 개체 내에 이미 아로새겨져 그런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존재라는 것을 잊고(옷걸이라는 것을 잊고), 역할(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신이라 착각)에만 집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상 그 역할(옷)이 벗겨져 존재(옷걸이)만 남는 순간에 자신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런 혼란스러움에 빠지기 전에, 역할이란 개체 내에 있는 것이 아닌 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영화 『Good & Bye』의 주인공은 오케스트라 단원이었지만, 오케스트라가 해체되면서 의도치 않게 장의사가 되고 만다. 그는 다른 직업을 찾던 도중 여행 가이드를 모집하는 줄만 알고 찾아간 곳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장의사가 된 것이다. 직업을 하나의 역할로 볼 수 있다면, 역할이 정해져 있다기보다 어떤 우연들과 마주치며 어쩌다 보니 그런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세 번째 비판은 공자가 생각한 것만큼 이상적인 모습이란 게 단순하게 하나로 결론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자 살아온 방식이 다르고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상이 다르다 보니, 당연히 사람의 수만큼 많은 이상적인 모습이 있게 마련이다. 학교 교사로서 이상적인 모습은 ‘따뜻한 말과 온화한 미소로 학생을 존중하고, 학생의 드러난 가치보다 잠재적인 가치에 집중하여 끌어줄 수 있으며, 친구 같지만 위엄 있는 교사’일 것이다. 하지만 단재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며 느끼는 것은, 이상적인 교사상을 현장에선 철저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은 하나하나가 소우주라 할 만큼 완벽하게 다르며, 들끓는 열정을 가지고 있어 감정의 기복도 심하다. 그런 아이들을 만나면서 이상적인 교사상으로 대할 경우 꼭 연기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변화무쌍한데 교사는 단단히 굳어진 상으로 대하니, 통하기보다 어긋나고, 이해되기보다 답답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선 완고한 상을 버리고, 상황에 따라 아이들을 대하는 게 훨씬 낫다. 그러다 보면 때론 아이들에게 싫은 소리도 할 수 있어야 하고, 때에 따라선 모르는 사람처럼 냉정하게 대할 수도 있어야 한다. 좋은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기에, 학생의 성장을 위해서면 이상적인 교사상과는 완벽하게 다른 교사가 될 수도 있어야 한다.
위에서 쭉 살펴보았듯이 ‘정명론’은 이런 식으로 비판받고 있다. 그렇다면 정명론과 같은 ‘학교를 학교답게 해야 한다’는 논리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첫째, 학교 시스템이 지닌 문제점을 묵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교육이 붕괴된 데엔 아이들을 적게 나으며 애지중지 키우는 상황, 사교육이 팽창하며 공교육은 그저 졸업장을 따기 위해 수단으로 변질된 현실 등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런 외부적인 변화 외에 학교 시스템 자체의 문제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교사는 정해진 시간 동안 교실이란 한정된 공간에서 20~30명의 학생들을 앉혀 놓고, 하나의 정답만을 맞추도록 가르치고 있다.
“됐어(됐어) 이제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 그걸로 족해(족해) 이젠 족해(족해) 내 사투로 내가 늘어놓을래 /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 집어넣고 있어 /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고 우릴 덥썩 모두를 / 먹어 삼킨 이 시꺼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 너무 아까워 //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있는 / 그애보다더 /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해 / 좀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라는 가사의 노래는 1994년에 발표된 서태지와 아이들 앨범에 있다. 그 후로 무려 2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학교는 이 가사와 판박이처럼 닮아 있고, 아니 어쩌면 더욱 더 악랄한 공간이 되어버렸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학교 시스템은 지금부터 200년 전인 산업혁명기에 본격적으로 갖춰지기 시작했다. 공장이 대규모로 만들어지며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그에 따라 학교는 규율에 맞추도록, 정해진 일을 실수 없이 하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게 된 것이다.
둘째, ‘학교답다’에 대한 이상적인 모습이 정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위정자(or 기득권 세력)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육의 모습에 따라 교육정책은 수시로 바뀌어 왔다. 그런데 슬픈 것은 무수히 교육정책이 바뀌어 왔음에도, 그 방향은 완벽히 기업의 요구를 교육계에 반영하는 쪽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건 진보정권을 자임하던 노무현 정부 때든, 그 이후 급격히 보수화된 이명박 정부 때든 달라지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는 오죽하면 ‘교육인적자원부’라고 교육부의 명칭을 바꾸며 인간의 시장가치를 높이기 위한 교육이 전면적으로 펼쳐졌고, 이명박 정부 때는 ‘자율형 사립고’ 정책을 추진하여 일반고를 삼류학교로 전락시켰으며,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여 수능의 대입 체제를 무력화시켜 돈과 빽이 있는 아이들이 유리한 대입 전형을 만들었고, 박근혜 정부 때는 ‘프라임 사업’으로 대학을 내실화하겠다며 고등교육의 기업화를 부추겼다.
이처럼 ‘학교를 학교답게 해야 한다’며 여러 정책을 폈음에도, 오히려 학교는 더욱 혼란에 빠졌고 아예 붕괴될 지경에 이르렀다. 움직일수록 상황은 더욱 꼬이고, 그걸 풀기 위해 애쓸수록 완전히 엉켜버려 손조차 댈 수 없게 됐다. 그러니 이쯤에서 우린 ‘학교를 학교답게 해야 한다’는 말이 얼마나 학교 시스템의 문제를 은폐하고 묵인하며, 자본이 무한정으로 학교를 간섭하도록 방조하고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애초에 서술을 잘못했으니, 처방 또한 잘못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알기 때문에 동섭쌤은 이번 강의의 제목을 아예 한 단계 비틀어 ‘학교를 학교적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이라 붙인 것이다. 이렇게 제목을 정하고 보면, ‘학교적’이라는 단어를 유심히 보게 된다. 바로 ‘학교적’인 것이 문제임을 알 수 있으며, 너무도 당연하게 보아왔던 학교적인 모습을 돌아볼 수 있을 때 실마리도 찾을 수 있다.
다음 후기에선 ‘룰이 바뀌면 생활방식이 바뀐다(24초 룰)’는 일화를 통해 재디자인의 힘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며, 학교를 학교적이지 않은 학교로 재디자인할 수 있도록 여러 사례들을 소개할 것이다. 이 때 등장하는 것이 회화분석Conversation Analysis인데, 학교에서 일상으로 오고 가는 대화를 분석하여 그 안에 교묘히 숨어 있는 권력관계나 편견을 끄집어낼 것이다. 이를 테면 교사가 “지금 몇 시입니까?”라고 묻자 학생은 “12시 52분입니다”라고 대답하면, 교사가 “참 잘했어요”라고 대화하는 식이다. 이 대화는 매우 학교적인 대화라 할 수 있는데, 이 짧은 대화에도 엄청난 메시지가 숨어 있다. 이런 대화가 왜 문제가 되는지, 다음 후기에서 본격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