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학교적이지 않은 학교, 첫 번째
이제 트위스트 교육학 강의는 반환점을 돌아 2강만을 남겨두고 있다. 1강 마지막 후기에서 이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동섭레스트를 오르는 일과 같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정상에 오르는 이유는 정상에 머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내려오기 위해서다. 애써 올라가서 높은 시좌를 확보했고 현실을 한 걸음 빗겨 서서 관조할 수 있게 되었는데, 우린 거기에만 머무를 수 없고 다시 원점으로 복귀해야만 한다. 그러니 누군가는 “올라가면 또 내려가야 할 것을 뭐 하러 애써서 올라가냐?”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정상에 오르는 동안 느꼈을 수많은 감정과 두근거림, 그리고 정상에 오르는 순간의 성취감이 나를 휘저어 놓는다. 그 순간 여태껏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비로소 생각하게 되고, 누리지도 못한 것들을 누리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3강 첫 번째 후기에선 반환점을 돌고 나면 이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동섭쌤은 이런 이야기에 덧붙여 존재가 달라진 후엔 어떻게 되는지, 김영민 선생의 글을 인용하며 밝힌다.
매사, 친숙해지면 매력을 잃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문학에 골몰하는 것은, 아마도 가장 친숙한 것 속에서 느끼는 가장 낯선 매력 때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늘 반복되면서도 진지하고, 늘 언급되면서도 쉽사리 그 속내를 보이지 않는 것
-김영민
위에 인용한 글을 읽어 보면, 우리가 너무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친숙함’이란 단어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여태껏 친숙하다는 걸 ‘친하다’는 뜻처럼 긍정적이며 가치중립적인 말로만 생각했었는데, 위 인용문에선 대단히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기 때문이다.
친숙하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뻔해졌다는 말이다. 뻔해졌다는 건 타인의 변화에 눈을 감고, 자신의 들끓는 감정을 무시하며, 세상의 변화무쌍함에 관심을 닫아버렸다는 것이다.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이 그렇다. 사귄 횟수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어느덧 여자 친구의 표정만 봐도 말만 들어도 감정이 모두 이해되고 어떤 마음인지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지 안다는 생각이 드니 여자 친구의 깊은 마음까지 들여다 볼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결국 헤어지고 나서야 ‘다 안다’는 생각이야말로 얼마나 큰 착각인 줄을 알게 됐다. 여자 친구는 수시로 나에게 미세한 표정과 말투로 여러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음에도 나는 그런 것들을 친숙하다는 이유로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 때의 나처럼 세상과 사람을 뻔하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온갖 무료함을 맛본 듯 입을 최대한 벌리고 하품을 할 것이고, 사람에 대한 관심을 잃은 듯 썩은 동태눈마냥 흐리멍덩하게 바라볼 것이며, “사람은 다 똑같아”, “세상은 늘 그 모양이야”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을 것이다. 그가 보는 것들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을 것이기에, 어떤 기대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 하루하루 지루함을 참아내며 살아간다는 게 곤욕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자 친구와 헤어진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말했다시피, 그건 어디까지나 스스로 눈을 감고, 감정을 끊고, 관심을 닫아버렸기에 그리 된 것일 뿐이다. 세상은 언제고 똑같은 적이 없었으며, 사람은 한시도 그대로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우린 눈으로 다채롭게 변화하는 현실을 보면서도 보고 싶은 대로만 보려했고, 귀로 수많은 말들을 들으면서도 듣고 싶은 대로만 들으려 한다. 그런 상황이니 ‘매사, 친숙해지면 매력을 잃’게 된 것이고 그에 따라 동영상처럼 끊임없이 흘러가는 세상이 한 컷의 사진처럼 현장의 생생함은 제거되고 비현실적인 고정된 느낌만 남은 것이다. 이건 김영민 선생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말하자면 사진snapshot(영원한 아이)이 아니라 개방성과 갱신성更新性을 매개로 하는 데생(순간순간을 사는 아이)에 비유할 수 있겠다.”라는 말과 같다.
바로 이렇게 모든 관심을 끊고 동일성에 기반하여 세상과 사람을 고정된 실체로 보려는 것을 ‘불인不仁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인仁’이라 하면 단연 공자孔子(BC 551~479)가 떠오를 것이다. 공자의 말을 제자들이 기록한 『논어論語』라는 책에선 ‘인’이란 단어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알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몇 구절을 살펴보며, 인이란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느껴보도록 하자.
1.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민 낯빛을 하는 사람치고 인한 사람은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 「學而」 3).
2. 오직 인한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고, 남을 미워할 수 있다(唯仁者能好人, 能惡人. 「里人」 3).
3. 번지(공자 제자)가 인에 대해 물으니 “어려운 것을 먼저하고 그로인해 얻게 되는 혜택을 뒤로 미룬다면, 인이라 할 만하다”고 말했다(樊遲問仁. 曰:“仁者先難而後獲, 可謂仁矣.” 「雍也」 20).
많고도 많은 ‘인’에 대한 내용 중 세 구절만 살펴봤다. 이쯤 되면 인이라는 게 무엇인지 감이 오는가? 아마도 읽으면 읽을수록 감이 잡히기보다 더욱 아리송해지고 아득해지는 느낌만 있을 것이다. 다산丁若鏞(1762~1836) 또한 우리처럼 처음엔 『논어』를 읽으며 아마득했겠지만, 줄곧 읽다 보니 “인은 사람을 뜻한다. 두 사람을 인이라 하는데, …… 인이란 이름은 반드시 두 사람 사이에서 생긴다(仁者人也 二人爲仁 ……仁之名。必生於二人之間「論語古今註」)”라며 인이 사변적인 윤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관계학에 대한 이야기라 해석했다. 이런 해석은 ‘仁’이라는 한자를 쪼개어 ‘人+二(두 사람)’이라는 문자학적인 해석이라 알 수 있다.
이처럼 공자는 ‘인’을 하나의 개념으로 정립한 것이 아니라, 여러 관념을 포괄적으로 활용했고 그로인해 후학들의 해석은 다채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단어는 있되 개념은 없고, 용례는 있되 정의는 없으니, 각자 이해한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하며 썼던 것이다.
이처럼 해석이 다양한 가운데, 최고의 해석은 뭐니 뭐니 해도 의학서에 나오는 해석이 아닌가 싶다. 의학서에는 ‘손과 발이 마비되는 것을 불인이라 했다(以手足痿痹爲不仁)’고 해석하고 있다. ‘불인不仁=마비’라는 말은 ‘인仁=소통’이라는 말과 같다. 마비가 된다는 건 외부와 통하는 모든 소통의 통로를 닫고 모든 감각을 차단하여, 고립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감정적으로 매정해진 사람, 타인과 소통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만 침잠하는 사람, 다채롭게 변화하는 것들을 개념에 가둔 사람(‘역사적인 아이Historical Child→영원한 아이Eternal Child’로 인식하는 사람)이야말로 마비된 사람不仁之人이라 할 수 있다. 마비될 때 세상은 친숙해지고, 시큰둥해져 매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이 마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걸 푸는 일이다.
존재가 달라졌다는 건 어찌 보면 마비가 풀려 세상과 사람과 소통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수많은 것들과 소통하게 되며 이전에는 미처 느껴지지 않던 감정들이 느껴지고, 인식되지 않던 온갖 것들이 인식된다. 그러니 너무도 친숙하게 느껴지던 일상이 이상하게 보이며, 반복되는 것 속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얘길 들으니 우치다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우치다쌤은 자신이 임마누엘 칸트I. Kart(1724~1804),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1949~)처럼 매우 규칙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시며, 규칙적인 삶을 살 때 주변 환경의 변화에 민감해진다고 하셨다. 우치다쌤은 “다른 조건을 모두 똑같이 만들어야 조그만 변화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생활이 자주 바뀌면 자기 몸의 작은 변화를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변화도 눈치 채지 못하게 됩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길로, 똑같은 행위를 해야 작은 변화도 바로 알게 됩니다. 특히 계절의 변화, 같은 시간대의 어둡고 환한 정도, 몸 속 기의 흐름, 봉우리의 변화 등과 같은 것은 모든 조건을 똑같이 만들 때에만 비로소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반복적인 생활을 할 때 가장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생각이란 게 가장 미세한 꿈틀거림으로 느껴지는 것들입니다. 갑자가 뭔가가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그 무엇이 바로 새로운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오감이 민감해져 있어야만 비로소 미세한 꿈틀거림을 낚아챌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지금껏 창의력이란 ‘기존의 것과는 완벽하게 다른 제3의 무엇’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것이야말로 ‘해 아래 새 것은 없다’는 말을 깡그리 무시한 거짓부렁이 같은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반복된 행위를 통해 친숙함 속에서 낯섦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창의적인 일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친숙한 것 속에서 낯섦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어떤 부분에 대해 마비되었는지 계속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하며, 그걸 통해 당연함에 대해 의문시할 수 있어야 하니 말이다.
한참 여러 얘기를 꺼냈지만, 결국 우리는 뻔히 내려올 줄 알면서 동섭레스트에 오르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살펴봤다. 동섭레스트를 오르며 우리의 몸이 마비되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마비된 것을 서서히 풀며 세상과 비로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며, 소통한 후엔 친숙해진 일상에서 낯섦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특별하게 다른 삶을 살고자 해서가 아니라, 지금 발 딛고 선 현실을 잘 살고자 해서다. 그러니 지금 당장 숨이 벅차오르고 고산증이 온 몸을 덮쳐올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신나게 올라보는 수밖에 없다.
이번 4강의 제목은 ‘학교를 학교적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이다. 우린 이미 반환점을 돌며 마비가 풀렸고 그에 따라 친숙함을 낯설게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그런 시선으로 학교를 바라볼 차례다. 그러면 학교야말로 얼마나 낯선 곳인지, 그리고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교육이란 이름으로 학생을 억누르고, 평가한다는 명분으로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학생 개인의 능력으로 덮어씌우고 있는지 새삼 알게 된다. 다음 후기부턴 그런 학교의 민낯을 살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