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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May 16. 2016

사람은 왜 생각해야 하나

17.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학교적이지 않은 학교, 세 번째

흔히 사람을 ‘생각하는 동물’이라 정의하고, 뭇 동물들보다 ‘영장靈長’이기 때문에 우월하다고 말한다. 즉 동물들이 하지 못하는 생각을 하며, 그 생각을 통해 자연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인위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모든 동물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식의 정의를 받아들이면 인간은 참 대단한 것만 같다.

그런데 정말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일까?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난 언제 생각이란 걸 해봤지?’라고 되물어보길 바란다. 그제야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을 듣기 전까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랄 것이다. 사람은 엄밀히 따지면 ‘생각하는 동물’이라기보다 ‘관성에 따라 살되, 어쩌다 한 번씩 생각하는 동물’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생각하는 동물’이란 정의는 전혀 나을 것 없는 인간을 한껏 띄우기 위한 부풀려진 정의라고도 할 수 있다.                



▲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앞에 서서 트위스트 교육학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늘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과연 언제 생각이란 걸 하게 되는 걸까?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생각한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보통은 습관, 관성에 따라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자동화되어 있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평상시엔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해오던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고, 생활을 해나갈 뿐이다. 그러니 골치 아플 필요도 없으며 그저 정해진 생활 패턴에 따라 맹목적으로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쯤 되면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냐? 정해진 방식대로만 살아가는 기계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탄성이 절로 나올 법도 하다.



▲ 일상을 살 때 우리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다. 당연함에 빠져들고, 익숙함에 젖어든다.



그렇다면 사람은 영영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일까? 물론 그것도 아니다. 간혹 생각을 할 때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다시피 ‘간혹’ 그렇다. 이에 대해 일상적인 예를 들어보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

잠을 자던 사람이 아침에 눈을 뜬다. 당연히 시계를 확인하고 일어나야할 시간인지, 더 자도 될 시간인지 확인한다. 이 순간엔 정해진 패턴에 따라 흘러갈 뿐이지 생각을 하진 않는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되었기에, 일어나 방에 불을 켠다. 그리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의 물을 틀고 몸을 씻기 시작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 어디에도 생각을 할 겨를은 없다. 그저 해오던 방식대로 몸이 자동적으로 해나가니 말이다.  

그렇다면 언제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그건 일상이 무너지고 당연함이 사라진 환경에 처할 때에야 비로소 하게 된다. 일어나자마자 방에 불을 켰는데 불이 켜지지 않을 때, 수도꼭지를 틀었음에도 물이 나오지 않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세면도구가 보이지 않을 때 생각하게 된다. 무언가 변화가 있을 때 사람은 그 순간 멍해지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라고 물음을 던지며 상황을 정리하려 한다. 사람에게 생각이란 미지의 혼란스러움을 지의 익숙함으로 바꿔, 예측 가능한 상황으로 만들려는 발버둥이라 할 수 있다.                



▲ 전주 풍남문 세월호 광장. 일상이 깨질 때, 익숙함이 무너질 때야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생각한다는 것과 호접몽

     

그런데 웃긴 점은 비로소 생각하게 될 때, 자신이 처한 환경이 어떤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습관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는지 자각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제야 메타인지Meta Cognition가 작동하며 자신의 상황을 1인칭 시점이 아닌 3인칭 시점으로 객체화하여 볼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런 상황과 똑같은 이야기가 『장자莊子』에 나온다. 『장자』라는 책을 알진 못해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호접몽胡蝶夢(나비가 된 꿈)’이 그 이야기다.          



옛적에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체 유유자적 즐기면서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깨어보니 틀림없이 장주가 아닌가?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지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물화라고 한다.

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遽遽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 胡蝶之夢爲周與? 周爲胡蝶, 則必有分矣. 此之爲物化. - 『莊子』「齊物論」


          

나비가 되어 천지사방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그래서 꽃에 있는 꿀을 빨아먹고, 바람에 따라 산들산들 날갯짓을 한다. 당연히 그 순간엔 ‘나=나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몸이 바르르 떨리더니, 의식이 돌아온다. 그제야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꿨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이 순간엔 ‘나=장주(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 사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꿈에서 깰 때에야 비로소 그게 한낱 꿈이었음을 알게 되고, 나는 나비가 아닌 장주라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시 날개가 바람에 따라 흔들거리더니, 의식이 돌아왔으니 말이다. 그 때가 되면 나비가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때엔 ‘나=나비(장주가 되어 나비의 꿈을 꾼 나비)’임을 알게 된다. 꿈에서 깼다곤 하지만, 그 또한 꿈일 수 있음은 또 다시 깨어나야만 겨우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작은 깨우침小覺에 머물면 안 되고, 큰 깨우침大覺에 이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걸 복잡하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기에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이건 하나의 메타포로 깨어나야만 비로소 그게 꿈이었음을, 그리고 어떤 사회상에 갇혀 살았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꿈속에 있을 때는 그것 자체가 지극한 일상처럼 느껴져 더 이상 ‘꿈’이라 생각하지 않게 된다. 깨어나야만 우리는 자신이 어떤 문화적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고, 그게 내 생각을 어떻게 규정짓고 행동을 제한하며 습관을 형성했는지 알게 된다. 이 때가 중요한 때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꿈에 관해 영상으로 잘 다룬 영화는 단연 『인셉션』이다. 이 영화에선 ‘꿈속의 꿈’을 잘 표현했으며, 무의식의 영역까지 들어가야지만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인셉션의 한 장면, 꿈이 꿈임을 알기 위해선 깨어나야 하고, 일상을 깨기 위해선 생각해야 한다.




꿈에 머물 것인가? 깨어날 것인가?

     

‘호접몽’이 보여준 꿈의 메타포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살아가고, 생각 없이 살아가는 현실이야말로 꿈이 아니냐?’는 일침이기도 하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한국 사회의 문화는 있었기에, 내가 자라는 과정 속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뿐인가, 가족의 풍토 또한 나의 성격과 생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어찌 보면 날 키운 건 팔할 이상이 한국적인 문화와 가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문화의 영향과 가풍의 영향이 내 생각과 방식을 구성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심한 경우엔 ‘난 어느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나만의 오리지널한 생각을 하고 있어’라고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생각을 너무도 확고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세상은 원래 그래’라고 얼버무리며 남에게 강요하고 절대 불변의 법칙처럼 고수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호접몽식으로 말하면, 한낱 꿈에 불과한 것임에도 그 꿈을 현실이라 믿고 그 꿈에만 머물려 하는 유아적인 발상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 [매트릭스]의 한 장면. 한낱 꿈에 갇혀 살면서 그걸 현실이라 착각하며 살 것인가?



당연히 이 때 필요한 건, 자신이 어느 문화와 가풍에 갇혀 있는지 깨달아야 하고, 어느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지 자각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자신이 처한 환경이 당연한 일상이 아니라, 지금껏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해갈 상황임을 아는 게 중요하다.

우린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너무도 당연히 이 체제만을 보고 느끼며 행동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가 영원히 이어질 거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태동한지는 겨우 200년을 약간 넘었을 뿐이며, 그에 따라 언젠가 전혀 다른 사회 체계도 등장할 거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끊임없이 변해갈 것이기에, 우린 지금의 상황이 어떤지, 그리고 나는 그에 따라 어떤 영향을 받는지 면밀히 기술해나갈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어떤 편견에 갇혀 사는지 알게 되어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래서 김영민 선생은 “삶의 층층면면과 복잡성을 깊이 살아내는 글쓰기는 종종 기술적descriptive인 고백에서 멈출 도리밖에 없다.”면서 그걸 ‘섬세의 정신’이라 표현했다. 이처럼 우리도 ‘섬세의 정신’으로 삶의 층층면면과 복잡성을 기술하다 보면 그 때 비로소 내가 어떤 문화적인 환경의 제약을 받으며 살았고, 그게 나의 무의식에 어떤 영향을 끼쳐 행동을 하게 하는지 알게 된다. 그 때서야 당연하게만 여겨졌던 것들이 이상하게 느껴지며, 발 딛고 선 사회가 뭔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그 순간이야말로 꿈에서 깬 상태가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 2013년에 카자흐스탄 여행기를 적으며. 생각하기 위해선 깨어나기 위해선 '섬세의 정신'으로 기술할 수밖에 없다.




꿈에서 깬 그대여, 현실을 어색하게 바라보라

     

그러면 우린 왜 꿈에서 깨려는 것일까? 그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누군가에 의해 디자인된 사회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다.

우린 너무도 당연히 능력이나 장애할 것 없이 개체 안에 이미 있는 것이라 생각하여 그렇게 대우한다. 모든 사회적인 것들을 개체의 특성인양 생각하는 ‘개체환원주의’를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그래서 능력주의 사회를 만들었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대우해주며, 장애를 개체의 특성으로 여겨 그들에게 ‘끌어안는 배제’를 하면서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학교의 주요한 기능이 평가와 선발이기 때문에, 교사와 학생 간에 ‘질문Initiation-대답Response-평가Evaluation’의 방식으로 대화하는 것을 거북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이 외에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누군가에 의해 디자인한 대로 흘러가고 있으며 우리도 그 영향을 시시때때로 받고 있으면서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생각하는 동물’답게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게 얼마나 문제가 되고 어색한 일인지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린 ‘학교를 학교적이지 않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후기는 마지막 편으로 우리가 어떤 현실에 발 딛고 있는지 살펴보고 학교를 학교적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들이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 '섬세의 정신'으로 기술하며 풀어나가는 동섭쌤의 트위스트 교육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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