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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May 17. 2016

성적평가와 능력주의라는 허상

18.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학교적이지 않은 학교, 네 번째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란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웬만하면 ‘생각하지 않는 동물’이다.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대로 순응하며 살다 보니, 어느덧 당연함과 익숙함에 물들고 말았다.                



▲ 생각하지 않는 동물에게 붙인 생각하는 동물이란 수식어의 아이러니.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을 해야 한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머니의 된장국’만은 아니고 생각하려 노력하는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을 하려 애쓰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전사 같은 비장함이 감돌지만, 사실 이 말은 김승희 시인이 쓴 시에서 따온 것이다.           



아침에 눈뜨면 세계가 있다, 

아침에 눈뜨면 당연의 세계가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거기에 있다,      


(중략)

     

그러므로, 당연의 세계는 물론 옳다, 

당연은 언제나 물론 옳기 때문에 

당연의 세계의 껍질을 벗기려다가는 

물론의 손에 맞고 쫓겨난다, 

당연한 손은 보이지 않는 손이면서 

왜 그렇게 당연한 물론의 손일까,      


당연한 세계에서 나만 당연하지 못하여 

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선 나는 

물론의 세계의 말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 

물론의 세계 또한 

정녕 나를 좋아하진 않겠지      


당연의 세계는 물론의 세계를 길들이고

물론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를 길들이고 있다,

당연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물론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하략)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2」, 김승희


          

동섭쌤 강의를 듣는 도중에 김승희 시인에 대해 여러 번 들을 수 있었다. 평소에 알지 못했지만 두 편의 시를 소개받고 읽어본 것만으로도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과 전율을 느꼈다. 「<일상>에서 ㄹ을 뺄 수만 있다면」이라는 시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2」라는 시는 생각하게 되면 일상이 어떻게 보이는지 시적인 언어로 담담하면서도 발랄하게 풀어냈다. ‘일상’에서 ‘ㄹ’을 빼면 이상하게 보이고, ‘당연’과 ‘물론’과의 싸움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이며 전혀 승산이 없는 싸움이지만, 그럼에도 ‘당연과 물론을 양손에 들고 아삭아삭 내가 먼저 뜯어먹었어’야만 한다. 

뜯어먹는다고 ‘일상’이 붕괴되거나 ‘당연’이 깨지거나 ‘물론’이 박살나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일상에서 ‘ㄹ’을 빼야 하고,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을 계속 해야만 한다. ‘작은 차이가 크나큰 어긋남을 빚어낸다毫釐之差 千里之繆’는 말처럼, 일상을 낯설게 보고 의문시하며 생각을 해보는 작은 행동 하나가 나의 삶을 바꿀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식으로 디자인되어 있는지, 그런 디자인이 우릴 어떻게 억누르고 한계 짓는지, 그 디자인을 살짝 바꾸는 행위를 통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아봐야 한다.               



▲ 너무 당연하기에, 더 이상 물을 수 없는 물론이기에 어려운 싸움이다.




당연의 세계에 소송 걸 수 있는 힘, 24초 룰 

    

‘아침에 눈뜨면 세계가 있고, 아침에 눈뜨면 당연의 세계가 있다’는 시구처럼, 우린 당연의 세계에서 태어난다. 이 말을 동섭쌤의 표현으로 바꾸면 ‘우린 태어나면서부터 디자인된 세계에 살게 된다’는 말이다. 처음 디자인될 당시엔 그게 수많은 사회 중 ‘하나의 사회 모습’에 불과했겠지만, 시간이 지나며 어느 순간엔 ‘유일한 사회 모습’이 되었다. 그래서 다른 여러 사회의 모습을 억압하고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유일한 사회’도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 테지만, 권좌에 오른 이 순간만큼은 절대적으로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만 보인다. 이런 상황이니 부조리하게 느껴지고 이상하게 느껴지더라도 거기에 대해 불만조차 제기할 수 없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을 하며 일상을 이상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을 부적응자나 불만세력으로 폄하하며 옥죄려 하니 말이다. 그건 모든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당연의 사회’를 유지하려는 발버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의 저자인 오자와 마키코小沢牧子의 아들이자 싱어송라이터, 오자와 겐지小沢健二(1962~)가 쓴 「<24초 룰>이라는 환상 혹은 환세계幻世界」라는 글은 ‘당연의 사회에 소송을 걸’ 수 있도록 힘을 준다.               



▲ 위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계간지의 사진을 보여주는 동섭쌤.




득점이 많고 적음은 단순히 실력의 탓일까? 

    

우린 너무도 당연히 스포츠를 볼 때 득점을 많이 하면 실력이 우수한 선수로, 득점이 적거나 없으면 실력이 형편없는 선수로 생각한다. ‘득점=실력’이라 보는 관점은 ‘성적=능력’이라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학교에선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능력이 출중하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많은 혜택(우등반, 여러 경시대회에 지원할 기회 등)을 주더라도 찍소리도 내지 않는다. 즉, 개체 내부에 실력의 높고 낮음이 이미 형성되어 있어서, 성적이 높으면 실력이 좋은 사람으로, 그렇지 않으면 실력이 낮은 사람으로 보는 것을 당연시한 것이다. 이걸 바로 개체의 내부에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는 ‘능력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것이 문제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이익을 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문제가 있다고 느끼지만 문제제기를 할 수는 없다. 아니, 문제를 제기해봐야 ‘그게 부당하면 너도 성공해’라는 조롱을 받거나, ‘역시 능력도 없는 것들이 불만만 많아’라며 비꼬임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동섭쌤이 말해준 ‘24초 룰’이란 건 능력주의 사회가 허구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에 따라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에서 농구는 1891년에 처음 발명되었고, 1898년에 프로농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프로농구가 생겨 시간이 흐르며 ‘더블 드리블 금지’와 같이 룰이 다듬어져 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당시 프로농구의 점수는 겨우 ‘18:19’하는 식으로 낮았다고 한다. 지금은 점수가 100점이 넘어가기도 하니, 능력주의적인 시각으로 보면 ‘초창기 때 선수들은 실력도 좋지 않고 체력도 좋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정말로 그럴까?               



▲ 지금 농구경기에선 선수들이 활발하게 경기를 진행한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디자인 속에 산다그러니 재디자인을 하면…… 

    

프로농구가 1898년에 시작된 이후 꽤 시간이 흘렀지만, 20점대의 스코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큰 변화가 없던 스코어는 1953-54시즌을 기점으로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몇 십년간 높아지지 않던 점수가 갑자기 높아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전까지의 경기에는 공을 가진 팀에게 공격 제한시간 같은 게 없었다고 한다. 지금의 축구처럼 공격 제한시간이 없다보니, 공을 마구 패스하며 시간을 때우면 됐다. 그러니 그 당시의 전술이란 일점이라도 이기고 있으면 상대편이 공을 채가지 못하도록 자기들끼리 패스를 하며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그러니 게임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게임의 진행속도는 현저히 느려지고, 박진감은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어, 점차 관객들은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너들은 ‘음..뭔가 큰 소리로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재미없는 스포츠다’라는 생각이 짙어졌고 관객들은 “정말 재미없다. 드리블로 도망가기만 하고.”라며 야유를 보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조차도 선수든, 감독이든, 관객이든 누구 하나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 위 사진에 지워진 하나의 룰이 농구의 양상을 바꾼다.



그러던 1954년에 프로 팀 오너 중 한 사람이 공격팀 제한 시간을 생각하게 되었고, 제한시간은 24초로 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적용하게 되었단다. 단순히 하나의 룰이 바뀌었을 뿐인데, 그로인해 전략이 완전히 바뀌었으며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뺨칠 정도로 선수들의 기량 또한 눈에 띄게 향상됐다. 더 이상 무한정 시간을 끌며 공을 돌릴 수 없기에 어떻게 최대한 빨리 빈틈을 찾아 공을 넣을 것인가를 연구하게 된 것이다. 

우린 디자인된 세상에 던져진 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디자인은 나의 몸에도 맘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내가 어떤 디자인된 세상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프로농구가 처음 시작됐을 때의 선수들도 자신이 어떤 룰에 영향을 받으며 경기를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스코어가 낮을 때마다 ‘나는 왜 이리 실력이 없지?’라며 자신을 탓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디자인된 세상에 던져졌음에도 그 디자인을 알게 된 사람에겐 새롭게 디자인할 수 있는 특권이 주워진다. 그래서 룰을 바꿀 수 있었고, 바뀐 룰로 인해 농구의 경기 양상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급격한 변화가 있기까지 60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안 비밀’이다.                



▲ 이와 같은 점수가 나올 수 있었던데엔 'shot clock'의 개입이 있다.




삶을 재디자인하라 

    

이처럼 스포츠든 삶이든 디자인된 것들에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하지만 너무 밀착되어 살다 보니, 어느 순간 그건 단순한 디자인이 아닌 삶 자체라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 아무리 ‘우린 어떤 디자인에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지? 그리고 문제점은 뭐지?’라고 생각하려 한들, 삶인 듯 디자인인 듯 얽히고설켜 어리둥절하기에 밝혀낼 수가 없다. 

하지만 때론 ‘24초 룰’을 생각해낸 사람처럼 지극히 일상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상하다는 걸 발견해내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깝게는 세월호에 대한 여러 문제제기를 하여 대한민국의 비정상적인 시스템을 고발한 사람들(미친 김감독이 대표적)이 그랬고, 조금 멀게는 몸을 불살라 노동계의 비인간적인 착취를 고발한 전태일이 그랬으며, 더 멀게는 모든 자금을 털고 죽음을 감수하며 독립운동을 하여 일제 치하의 만행을 밝힌 이들이 그랬다. 

이들처럼 당연함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며, 일상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당연의 사회에 소송을 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우사기는 “스포츠는 룰이라는 보이지 않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져서 디자인을 하나 손대면 스포츠 전체가 바뀌지”라고 말했는데, 우리도 그에 따라 “우리 사회의 디자인을 바꿀 수 있다면, 사회의 모습도 바뀔 테지”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수업 디자인이 능력주의를 만든다

     

이와 비슷한 것이 바로 학교에서의 성적을 통한 실력 평가라 할 수 있다. 지금처럼 국영수의 정답 맞추기식 시스템이 장악하는 세상에서 능력이 있다고 평가받는 학생은 암기를 잘하고 짧은 시간 내에 실수하지 않고 정답을 맞출 수 있는 학생이다. 하지만 평가 시스템이 바뀌어 ‘체육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능력자’라고 한다면, 지금의 능력자들은 오히려 무능력자가 되고, ‘늘 공만 찬다’며 혼나던 아이들이 능력자가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능력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어떤 평가 기준으로 평가하느냐에 따라, 능력이 있는 것으로도, 능력이 없는 것으로도 평가될 수가 있다. 그래서 동섭쌤은 “혹 우리는 아이 ‘내부’에 붙박여 있다고 생각되는 소위 ‘능력’과 ‘능력차’라는 것을 가시화시키기 위해 ‘외부’에서 부단히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학교의 평가 시스템을 문제 삼으며 “‘공부를 잘하는 아이인가, 못하는 아이인가’하는 것은 아이가 내부에 갖고 있는, 즉 원래부터 갖고 있는 개체의 속성이 아니라 특정한 수업 디자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짚어주고 있다. 능력은 결코 개체 안에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어서 어떤 수업 디자인이든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디자인과 맞물려 보이게 되는 것뿐이다. 그러니 ‘24초 룰’이 적용되기 전의 선수들에게 “너희들의 노력이 부족해서 점수가 안 난다”고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지금의 이런 수업 디자인 속에서 능력 발휘를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에게 “그러니 밤새워 분초를 쪼개어 공부를 하란 말야”라고 마냥 요구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 [죽은 시인의 사회]의 장면. 수업 디자인과 능력은 매우 밀접하게 돌아간다. 능력이란 디자인과 따로 있지 않다.




이쯤에서 한 번 끊어가는 센스를

     

드디어 4강의 이야기가 본 궤도에 올랐다. 학교의 평가란 가장 객관적인 방법으로 개인의 능력을 가시화시키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깊은 내막을 살펴보니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목도할 수 있었다. 룰이 바뀌면 농구경기의 양상과 스코어가 달라지듯, 디자인이 바뀌면 수업의 풍경이 바뀌고 아이들의 재능도 튀어나올 것이다. ‘학교를 학교적이지 않게 하기’ 위해 디자인을 바꾸자는 이야기도 만만치 않은 내용이기에, 다음 후기로 넘기겠다. 

이제 동섭레스트의 제4캠프도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힘도 빠지고 정신도 오락가락하여 내가 앞을 향해 걷고 있는지, 꿈속을 헤매고 있는지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 한 고비를 넘고 나면 우린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던 제4캠프에 도착하여 몸을 녹이고 잠시나마 쉴 수 있다. 그 때까지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며 함께 힘을 모아 걸어가자. 



 ▲ 이제 4강의 마지막 후기만을 남겨 두고 있다. 그 순간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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