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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May 21. 2016

장애, 능력이란 무엇인가

19.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학교적이지 않은 학교, 다섯 번째

우린 여태껏 능력은 개체 내부에 완비되어 있고 그에 따라 어떤 식의 평가를 하든지 능력은 드러날 것이기에, ‘학교 시험 성적 ↑ = 개인의 능력 ↑’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학교 성적이 높으면 사회적 지위도 당연히 높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저번 후기의 ‘디자인이 바뀌면 삶이 바뀌고, 수업 디자인에 따라 가시화되는 능력이 바뀐다’는 얘기는 위의 공식이 허상임을 폭로한다.                 



▲ 허상을 밝히며, 진상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사회의 디자인이 만든 욕망

     

디자인을 바꾼다는 건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바꾼다는 뜻이다. 지금 우린 스마트폰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스마트폰을 쓸 수 있으려면 기지국이 각 지역별로 설치되어 있어야 하고 그 전에 인공위성을 통해 전파를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하며, 스마트폰 기계를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도 설비되어 있어야 하는 등 제반 여건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이런 모든 요소들이 갖춰졌을 때, 우린 비로소 ‘스마트폰 혁명’이라 불리는 사회의 혜택을 누릴 수 있고, 그에 따라 ‘최신 스마트폰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도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동섭쌤은 “진정한 책이란 지금 당장 있는 독자를 만족시키는 책이 아니라, 새로운 독자를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또한 기업가란 이미 있는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있을 수요를 예측하여 수요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린 어떤 욕망이 미리 태어나기 전부터 있어서 그런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기보다 그렇게 디자인된 환경에 놓이면서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광경이 낯설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진 많은 제반여건들이 갖춰져야만 한다.




디자인과 장애의 가시화

     

이걸 좀 더 쉬운 예를 통해 살펴보자. 날개가 달린 사람들만 사는 사회가 있다고 가정해보면, 당연히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와는 많은 부분이 다를 것이다. 그 사회의 건물엔 계단이나 엘리베이터와 같은 것들이 없고,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다리나 배도 없으며, 자유낙하의 스릴을 즐길 수 있는 번지점프대와 같은 놀이기구도 없다. 그들에겐 날개가 달려 있기에 고저차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더라도 날아서 이동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걸 극복해야 한다는 욕망 자체도 생기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디자인된 세상에 우리와 같이 날개가 없는 사람이 살게 된다면, 우린 어떤 대우를 받게 될까? 각 층을 이동할 때에도, 강을 건널 때에도 날개 달린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의 도움 없이는 우린 원하는 곳으로 감히 갈 수 없다. 그러니 아마도 그들의 입장에선 우리들이 무언가 결핍된 존재로 보일 것이고,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 어떤 디자인으로 만들어졌냐에 따라 드러나는 능력이나 결핍도 달라진다



하지만 그런 사회가 아닌, 지금 우리가 디자인한 사회에 살게 되면 이동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너무나 편하고 익숙해서 무언가 부족함이 없다고 느껴지기만 한다. 당연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에게 맞춰 디자인된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디자인과 장애의 가시화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장애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장애 / 비장애’를 개체 내부의 일로 생각하여, 개체의 특성이라고만 받아들였다. 그러니 개인의 일로 치부하여 ‘끌어안는 배제’를 당당히 행하면서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쭉 살펴봤다시피 장애는 사회구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날개 달린 사람들이 사는 사회는 날개 달린 사람을 위해 사회구조, 건물구조, 제반 여건 등을 갖춰졌기에 날개가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적인 특성을 탓하며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일 뿐이다.                



▲ [주토피아]의 한 장면, 기차가 모든 동물이 이용하도록 디자인 되어 있다. 이럴 땐 누구도 결핍을 느끼지 못한다.




 질문엔 사회의 디자인이 숨어 있다

    

‘사회의 디자인이 장애를 만든다’는 생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가 2011년에 동섭쌤이 들려준 비니어드 섬Martha's Vineyard 얘기라 할 수 있다. 그 섬엔 건청인들이 꽤 있었는데, 여러 세대를 거치며 한 집 걸러 한 명씩은 건청인들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수화를 제2의 국어로 배우게 됐고, 그 사회에선 건청인이 낯선 존재가 아닌 친숙한 존재로 인식되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곳을 문화인류학자가 들어가 함께 살며 취재를 하게 된다. 그 때 그곳에 사는 할머니에게 “그러면 그동안 살면서 할머니가 만났던 청각장애인들은 전부 몇 명이었습니까?”라고 물었다. 문화인류학자는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는 완벽하게 다른 사회를 그 사회의 시각으로 풀어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자신의 자라온 환경에서 싹튼 편견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래야만 그 사회에서 배척당하지 않고 최대한 그 사회의 모습을 잘 담을 수 있으니 말이다. 



▲ 비니어드 섬의 할머니 인터뷰는 장애에 대한 생각을 기본적으로 붕괴시킨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노력한다 해도 자신이 어려서부터 자라온 환경이 있는 이상, 완벽하게 편견에서 자유롭기는 힘들다. 그러다 보니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위의 질문은 어찌 보면 전혀 문제가 없는 질문 같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편견이 가득한 질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건 바로 ‘건청인=청각장애인’이란 편견 속에서 질문을 던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도 아무렇지도 않게 편견이 가득한 말을 남에게 곧잘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게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동섭쌤이 예를 들어준 “민지가 너무 밝아서 아빠가 안 계신 줄 몰랐어요”라는 교사의 말이 그렇다. 교사는 민지의 밝은 표정에 활기차게 활동하는 것을 보고 칭찬을 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이건 칭찬이라기보다 교묘한 비난에 가까우니 말이다. 이 말에 어떤 편견이 담겨 있는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바로 알 것이므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단지 듣지 못하는 사람들인가청각장애인인가?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고 우린 편견에 가득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그런 대답을 강요하기도 하지만, 대답자는 아예 편견을 뛰어넘어 다른 경지의 대답을 하기도 한다. 당연히 다른 경지의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가치관 자체가 달라야 하며, 문화적인 풍토 또한 달라야 한다. 그래야 편견이란 늪에 빠져들지 않고 유유히 그 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인식의 협소함을 비웃어줄 수 있으니 말이다. 할머니는 문화인류학자의 질문을 듣고 무척이나 황당했나 보다. 그래서 그 순간 머뭇거리지 않고 그 질문 자체의 어리석음을 바로잡아주려는 듯 “오! 그들은 장애인이 아니었어요. 단지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요.”라고 짧고 간결하게 대답한다. 

장애인이란 말은 결코 가치중립적이어서 그냥 써도 되는 단어는 아니다. 이미 사회적으로 편견을 가득 담은 단어이자, 한 개체를 무겁게 낙인찍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할머니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장애’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감에 마음이 무거워졌을 것이고, 자신이 만난 사람들은 그런 범주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강하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그들을 만나오면서 ‘건청인=단지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 받아들였을 테니 말이다. 

‘장애인’이라는 인식과 ‘단지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인식 사이엔 엄청난 사회적인 디자인이 관여하고 있다. 그러니 우린 그 디자인에 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지금처럼 생각해왔으며, 의문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의 차이로 인해 우린 너무도 당당히 차별적인 말을 하고 차별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죄책감조차 없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대답은 감춰져 있던 사회의 디자인을 드러낸 것이자, 문화인류학자와 나의 ‘생각없음’을 일갈한 거였다.                



▲ [여기서는 모든 이들이 수화로 말했다]라는 책. 여기에 비니어스 섬의 일화가 실려있다.




능력은 학교가 만든다

     

그래서 동섭쌤은 “‘능력’, ‘장애’, ‘ADHD’, ‘평균’과 같은 용어들은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진 인공물일 뿐입니다. 그런데 학교에선 그걸 실체로 이해하며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덮어씌우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라고 문제를 제기하며,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디자인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그걸 우리들이 재디자인하여 바꿀 수도 있습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결국 디자인이 우리의 삶을 만들었고 우리의 생각을 규정짓게 했다는 말이다. 그건 당연히 학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디자인된 현실에 가장 최적화된 곳이 학교라고 보아야 맞다. 애초에 학교의 등장 자체가 사회시스템을 유지하고 지속시키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산업혁명기엔 노동자를 대량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국민국가 시기엔 국가에 소속감을 느끼는 국민을 양성하기 위한, 글로벌 자본의 시기엔 기업의 요구에 따르는 ‘분인이 아닌 개인’이 되어 언제든 해외로 떠날 수 있는 대체 가능한 사람을 키우기 위한 교육시스템으로 바뀌어 왔다. 



▲ 단어는 현실을 규정짓는다. '중2병'이란 문제아처럼 느껴지는 거지만, 오히려 활발발한 아이란 느낌이 든다. ADHD는 다른가?



하지만 아무리 학교란 곳이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라 할지라도 학교를 재디자인할 수 있다면, 학교를 지금과는 너무도 다른 곳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동섭쌤은 4강의 제목을 ‘학교를 학교적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이라 지은 것이다. 이미 두 번째 후기를 통해 ‘학교를 학교답게 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 지 살펴봤으니, 재론하진 않겠고 여기서는 ‘학교를 어떻게 하면 학교답지 않게 할 것인가?’만을 말할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이 현재 학교에 너무도 팽배하여 더 이상 문제라 여겨지지 않는 모습을 폭로하고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너무도 학교적인 모습이 오히려 학교를 무너뜨리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 학교의 디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며, 그 디자인을 벗어날 길도 알 수 있다. 

다음 후기는 4강의 마지막 후기로 ‘학교를 학교적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이란 제목으로, 학교적인 디자인은 무엇이며, 그 디자인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얘기할 것이다. 그리고 디자인이 바뀔 때 어떻게 배움의 파토스가 일렁이며,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길러내는 학교로 변모할 수 있는지를 얘기하도록 하겠다. 



 ▲ 이제 학교적이지 않은 학교로 만드는 이야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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