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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May 23. 2016

학교적이지 않은 학교 만들기

20.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학교적이지 않은 학교, 여섯 번째

비니어드 섬에 사는 할머니는 청각장애인을 몇 명이나 만나봤냐는 인류학자의 질문에, “오! 그들은 장애인이 아니었어요. 단지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요.”라고 강하게 대답했다. 이건 사회의 디자인에 따라 사람이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 에듀니티에서 시작된 강의는 벌써 4강의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비교육적이며, 성장을 방해하는 공간으로서의 학교

     

이처럼 학교도 마찬가지다. 학교의 디자인에 따라 학생에게서 가시화되는 능력은 천차만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학교의 디자인은 어떤가?’라는 질문은 던지지 않고, 학교의 평가시스템에 따라 성적이 높게 나오는 학생을 ‘능력 있는 학생’으로 받아들이는데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일상처럼 딱 달라붙어 이미 지극한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 몸 안에 있는 장기들도 아파야만 그 존재를 확연히 알 수 있듯이, 일상 또한 낯설게 보거나 의심하려 할 때에만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트위스트 교육학 4강의 제목은 ‘학교를 학교적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이다. 일상처럼 너무나 굳어져 이상하게 볼 수조차 없던 학교 현장의 당연한 모습들을 낯설게 봄으로,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학교가 비교육적인 공간이 되었으며, 학생의 성장을 오히려 방해하는 공간이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그래야만 학교가 생긴 원래 취지인 ‘배움의 열정’을 찾을 수 있고, ‘학생의 성장’을 도모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근대 학교의 모습은 10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용은 바뀌었으나 구조는 그대로다.




온실 같은 학교 1 - 세속의 가치관만이 판을 친다

     

학교를 학교다운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학교를 개혁하자는 논의로 급물살을 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를 정상화 하려하면 할수록 오히려 학교는 학교다워지지 않고 취업 준비기관으로 전락한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 되었고, 대체 가능한 인간만을 길러내는 곳이 되었다는 것을 두 번째 후기에서 밝혔다.

이렇게 학교가 교육의 본질은 사라지고 상업적 요소(교육상품을 사고파는 것)만 가득해지는 현실에 대해 우치다샘은 철저히 비판하며,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를 곱씹을 수 있어야만 학교적이지 않은 학교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학교는 아이들을 바깥 세계로부터 격리해서 보호하는 것을 그 본질적인 책무로 삼아야 합니다. 학교와 바깥 세계 사이의 ‘벽’, 즉 아이들을 바깥으로부터 지키는 벽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학교는 본질적으로 ‘온실’이 되어야 합니다. 이론이 있는 분도 많겠지만-반 이상이 반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양보할 수 없는 제 교육관입니다.

학교가 하는 일, 교사의 일은 무엇보다도 외부를 향한 욕망을 자극하는 것입니다만,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속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세상은 어차피 욕망으로 점철된 곳’임을 가르쳐주는 것이 외부와의 회로를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부모와 주위 어른, 대중매체가 선전하는 세속의 가치관과는 다른 문법으로 만들어지고, 다른 측정법으로 잴 수 있는 ‘예지叡智의 경위涇渭’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육의 첫 번째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교육이 무너진 것은 학교와 사회를 격리해온 이 ‘벽’이 붕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교사도 부모도 교육행정도 그리고 아이들도 모두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신봉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일부는 스스로 알아서, 일부는 싫다고 고개를 흔들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학교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온도차가 거의 없어져 버렸습니다.

-우치다 타츠루 저, 박동섭 역, 『교사를 춤추게 하라』, 민들레 출판사, 2012년, pp 156~157      


    

우치다쌤은 ‘학교가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자본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지 않고 예지의 경위에 대해 믿도록 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외부의 요구(기업 & 사람들의 욕망)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걸 교육정책으로 만들어 추진하는 곳이 아닌,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이상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온실과도 같은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구조가 이런 식으로 되어 있기에, 학교도 사회의 요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근무하는 단재학교는 대안학교이기에,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운영자금은 학부모들의 학비에서 충당할 수밖에 없고 그로인해 학비가 비싸다. 이런 상황에서 늘 뜨거운 감자처럼 등장하는 말이 ‘학부모의 학비로 운영되는 만큼 학부모들의 바람을 완전히 거부할 수 없다. 그러니 커리큘럼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의 철학이나, 교사의 교육방법 등이 있지만, 그런 이상적인 것만을 추구하다가는 학부모들이 기피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예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건 바로 ‘세속의 가치관 / 예지의 경위’와의 대립이라 할 수 있고, 그럴 때마다 세속의 가치관은 더욱 뿌리 깊게 커리큘럼에 파고들어 반영된다는 사실이다.

제도권 교육기관은 이런 대결구도에서 ‘세속의 가치관’에 방점을 찍는 것으며 교육을 하는 곳이 되었으나, 심지어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대안학교도 완전히 자유롭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우치다쌤의 바람이 반가우면서도 결코 가볍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 목공수업을 하는데, 아이들은 이런 수업을 가장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세속의 가치가 아니면 의미없다고만 생각하는 현실이다.




온실 같은 학교 2 - 예지의 경위를 알려줄 수 있는 곳

     

이런 현실적인 문제 외에, ‘온실’이란 말은 자칫 오해를 낳을 수도 있다.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학교는 사회적인 문제에 관여하지 않고, 비정치적인 교육만을 해야 한다는 말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 지금도 주구장창 세월호 관련 계기 수업을 하거나, 까르푸 파업 이야기를 담은 『송곳』 드라마를 보여줬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봐야 하는 세상에서, 우치다쌤의 말은 그런 세상에 대해선 학교에서 가르칠 필요 없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온실’이란 말을 오해해서 생긴 에피소드였을 뿐이었다. 나는 온실을 ‘복잡다단한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지 않아 선한 사회의 모습만을 부각시키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우치다쌤은 ‘자본주의의 마수에서 벗어나 배움의 본질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온실’이란 단어에 대해 오해가 풀리니, 우치다쌤의 이야기야말로 너무도 당연시하며 생각조차 하지 못한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가치를 환기시켜주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학교적이지 않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교육적’이란 네이밍을 붙이며 추구했던 모든 활동에, 그래서 지극히 좋은 정책이라 생각했던 것에 대해 의문시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치다쌤이 얘기하는 ‘벽’을 세울 수 있으며, 그에 따라 ‘대체 불가능한 학생’을, ‘순간을 사는 아이’를 길러낼 수 있는 곳으로 만들 수 있다.                



▲ 작년 영화팀은 6박 7일동안 자전거여행을 했었다. 그나마 이런 여행을 통해 예지의 경위를 맛볼 수 있기를.




IRE 대화 1 - 학교의 대화와 일상 대화의 차이점

     

학교는 매우 학교적이다. 그 중에서 단연 교사와 학생이 나누는 대화야말로 가장 학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때부터 수업을 할 땐 질문을 하는 게 좋은 수업의 표본이 되었다. 강의식으로 일방적으로 진행하기보다 질문을 하여 동기를 유발하고, 뇌를 활성화시켜 상호 소통을 하며 진행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이다. 이 말만 듣고 보면 ‘정말 맞는 얘기다’는 생각이 절로 들며, 다른 문제는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질문의 방식과 관련이 있다. 메한H. Mehan은 수업 중 던져지는 질문을 분석하며 「I-R-E」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아래의 구조도를 보자.                               





일상 대화의 질문은 질문자가 정말로 그 상황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Question). 그러니 질문을 하는 사람은 최대한 겸손한 자세와 싹싹한 말투로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응답자가 어떤 식의 대답을 해주든(Answer), 대답을 해준 그 자체로 감사할 수밖에 없다(Thanks).

하지만 교실의 질문은 아주 단순한 것일지라도 모르기에 묻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교사는 교실 안에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코스튬플레이를 해야 하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묻는 경우가 태반이다(Initiation). 그러니 태도는 위압적이면서도 아는 사람 특유의 너스레를 떨며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질문을 받은 학생은 쭈뼛쭈뼛 정답을 알고 있는 교사의 눈치를 보며, 반응을 하게 된다(Response). 이 때 그 반응이 정답이면 교사는 “참! 잘했어요”라는 말로, 정답이 아니면 “그 옆 사람!”이라는 말로 평가를 하게 된다(Evaluation).

이런 차이 때문에 일상대화에서의 질문은 진정 그 상황을 모르기에 묻는 것이지, 그 사람을 시험하는 게 아니기에, 편하게 대답을 해주면 된다. 하지만 교실에서의 질문은 이미 교사가 생각하는 정답이 있고 그걸 듣고 싶어서 하는 것이기에, 의도를 먼저 파악하고 그에 맞는 대답을 하려 애를 쓸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차이가 교실에서의 대화를 무겁게 만들고, 배움이 아닌 교사가 생각하는 답에 치우치게 만든다.               



▲ [IRE 대화]는 너무도 당연한 학교의 이야기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IRE 대화 2 - IRE 대화의 문제점 극복하기

     

이런 상황에 덧붙여 동섭쌤의 삐아제Jean Piaget(1896~1980)의 ‘7살이 되어야만 보존개념이 생긴다’라는 연구결과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알려준다. 삐아제는 동일 연령대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여 각 연령대별로 어떤 발달상황에 놓이는지 객관적인 표로 만들었다. 그래서 삐아제의 실험결과에 따라 우리도 당연히 그 나이대가 되면 그와 같은 발달과정을 거치며 발달할 거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 삐아제의 인지발달단계. 이 이론에 따라 수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발달 단계가 정상적인지, 아닌지 체크 받는다



하지만 동섭쌤은 “이런 경우 오히려 우린 ‘아이에게 보존개념이 생겼다’라고 판단하기보다, 교사가 던진 질문에 따라 ‘아이는 [I-R-E의 대화]에 익숙해졌다’고 판단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라고 묻는다. 보존개념은 물의 양이 같을 때, 모양과 크기가 다른 컵으로 물을 옮겨 담아도 같다는 것을 아는 능력이다. 그래서 연구자는 아이를 놓고 컵의 물을 옮겨 담으며, “이 두 컵의 물의 양이 같나요?”라고 묻는다. 연구자가 물었다는 것, 그리고 그건 일반적인 대답과는 반대 대답을 요구한다는 것은 대화를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니 아이는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고, 속으로는 ’분명 다른데‘라는 생각이 들었을지라도, “같습니다”라고 대답하게 된다는 것이다. 



▲ 아이의 보존개념 획득은 7세 이후로 보고 있다. 실험결과에 따른 것인데, 과연 맞을까?



의도를 가지고 물어보는 질문은 오히려 그 반대의 대답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며칠 전에 학교에서 여행을 갔을 때, 학생 중 한 명이 “토마토는 과일일까요? 채소일까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과일을 산다며 토마토를 산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순간 머릿속으론 ‘과일’이라는 답이 떠올랐다. 하지만 너무 뻔한 답을 묻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그런 건 퀴즈로서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쯤 생각이 미치자 당연히 “채소야”라고 대답을 하게 됐고, 그 학생 또한 정답이라고 인정해줬다. 이게 바로 [I-R-E의 대화]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정답을 안 것도 아니지만, 그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정답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이고, 그건 대화라기보다 질문자의 의도를 파악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보존개념에 대한 실험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섭쌤은 학교에서 대답을 잘하는 아이를 “교사의 발문에 이끌려서 교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추측해서 그리고 교사가 이 시점에서 ‘대답시키려는 것’을 알아차려서 그것에 맞게 제대로 대답하는, 학교라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특수한 능력을 익힌 아이”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이야말로 교사의 질문에 학생들의 생각을 가두고 거기서만 생각하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우린 교사가 「I-R-E」의 구조로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동섭쌤은 “쿠마모토의 한 학교에 수업 참관을 갔었는데, 거기선 교사가 질문을 던지면 아이들이 자유롭게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그 때 교사는 평가를 하기보다 ‘감사합니다’라고 말을 하더군요”라는 예화를 소개해주며, 정답으로 수렴하기 위한 질문이나 결론으로 이끌기 위한 질문이 아닌, 생각의 폭을 넓혀주는 질문, 평가하지 않으려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4강 후기가 끝나고 간단한 뒤풀이가 있었다. 같이 참여한 선생님들의 고충과 생각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4캠프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마침내 우린 동섭레스트의 제4캠프에 도착했다. 첫 발을 뗄 때 까마득한 느낌에 두렵고 걱정이 앞섰지만, 이젠 정상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쯤 올라오면 오히려 맘은 누그러지고 달라진 시좌에 삶을 대하는 진정성도 훨씬 나아지며 활기가 더욱 생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몸은 고되고 산소는 급격히 줄어들어서 숨 쉬기조차 매우 힘들며, 정신은 더욱 몽롱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이걸 한계라 생각하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은 죽을 것 같아도, 막상 또 걷기 시작하면 금세 나아지고 희망도 어리기 때문이다.



▲ 드디어 우린 4캠프까지 올라왔다. 마지막 세이프라이프 지대라는 말이 보인다. 여길 지나 존재를 건 비약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트위스트 교육학 4강의 후기를 마치며 되돌아보면 정말 많은 말들과 단상들이 있었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일상에서 [ㄹ]을 뺀다면’이 아닐까 싶다. 그래야 내가 발 딛고 선 현실이 당연하게 보이지 않고 조금이라도 생각을 덧붙일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린 일상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냥 프로그래밍된 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하며 트위스트 교육학 마지막 5강의 이야기를 향해 힘차게 나가보려 한다. 마지막 여정을 떠나는 것이니만치, 부담은 내려놓고 여태껏 해오던 방식대로 마무리까지 잘 지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아무쪼록 마지막 강의 후기를 끝내는 그날까지 함께 힘을 보태주길 바라며, 5강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메시지’에서 다시 볼 수 있기를~



▲  9시부터 시작된 뒤풀이는 10시 20분에 끝났다. 짧아서 아쉽고, 밤을 새하얗게 불태우지 못해 미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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