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모든 것이 메시지, 첫 번째
처음 트위스트 교육학 강의를 들으러 갈 때만 해도 넘치는 열정, 그리고 무언가 해보겠다는 결의로 신났었다. 그 땐 의지가 굳셌고 기운이 왕성하여 어떤 강의내용일지라도 씹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여포와 함께 전장을 달려 어떤 것에도 잡히지 않고 어떤 피해도 입지 않는 적토마처럼 바람을 가르며 맘껏 강의시간을 누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강의가 시작되고 3강도 채 끝나기도 전에, 가쁜 숨을 내쉬며 급속히 열정은 사그라들었고, 기진맥진하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가 강의 내용을 천리마의 날렵함처럼 종횡무진 풀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저 조랑말의 아둔함에 불과하여 하나하나 써나가기도 힘들었다.
동섭쌤의 강의는 2시간 동안 쉼 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동섭쌤은 “저번 강의도 노검(녹음의 부산사투리)을 하느라 노검기를 켜놨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노검기를 끄고 시간을 보니 글쎄 1시간 58분이 찍혀 있더라구요”라는 말을 하신 것이다. 어찌 보면 1시간 58분은 꼭 길다고만은 할 수 없다. 강의 도중에 여러 예를 들고 사적인 얘기도 함께 하다 보면 시간은 금세 흘러가기도 하니 말이다. 분명히 2011년에 동섭쌤의 강의를 들었을 땐 그래도 영상을 보여준다던지, 재밌는 예화를 들려준다던지 하는 등의 다양한 이야기로 주제를 부각시켜줬는데, 이번 강의엔 그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녹음기에 1시간 58분이 찍혀 있으면, 정말 1시간 58분 동안 다양한 강의 내용으로 꽉꽉 채웠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상황이니 ‘모든 강의내용을 잘게 씹어 먹어주겠어’라고 호기롭게 달려들던 마음은 싸그리 사라지고 ‘과연 저 많은 내용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풀어내야 하지?’하는 걱정만 하게 됐던 것이다. 호기롭게 도전했다가 순식간에 한 대를 얻어맞고 겁에 질려 초라하게 돌아서는 아주 싱거운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당연히 소화불량에 걸릴 수밖에 없고, 그럴 땐 억지로 게워내는 게 더 현명할 수도 있다. 나 또한 많은 강의 내용을 들어서 머릿속은 새하얘졌고, 전혀 정리가 되지 않아 복잡해져만 가고 있었다. 그 순간 나의 이해력의 한계를 실감했고, ‘과연 후기를 쓸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에 한숨만 나왔다.
그런데 단순히 강의 내용이 많다 적다의 문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강의 내용이 많더라도 오히려 이론적인 것만 얘기하거나, 완전히 생소한 얘기만 할 경우엔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 땐 사실을 전달하는 차원에서 그걸 나의 언어로 정리하여 풀어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동섭쌤의 강의는 낯선 것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이론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너무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 그래서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니 말이다. 그 때 ‘알고 있는 이야기’를 ‘알고 있는 방식’으로 말해주면 그나마 좋을 텐데, 동섭쌤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해주니, 자연히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글로벌 인재 육성’, ‘학생의 눈높이에 맞추는 교사가 되자’, ‘가치 있는 것만 배운다’, ‘칭송받는 교사가 필요하다’, ‘학교를 잘 가동시켜 세상을 바꾸자(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의 패러디)’와 같은 말들은 너무도 당연한 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을 처음 들으면, ‘이게 뭐가 문제라는 거야?’라는 살짝 어이없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동섭쌤의 강의를 듣다 보면, 분명히 그런 말들의 기본전제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만 보였던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이건 좋은 말로 하면 ‘앎의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라 할 수 있지만, 달리 말하면 ‘나의 일상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기반 자체가 허물어진 순간’이라 할 수도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네가 노예란 진실. 너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모든 감각이 마비된 채 감옥에서 태어났지”라고 현실이라고 믿는 세상이 디자인된 세상인 매트릭스임을 알려준다. 그러고 나서 “파란 약을 먹으면 여기서 끝난다. 침대에서 깨어나, 네가 믿고 싶은 걸 믿게 돼. 빨간 약을 먹으면 이상한 나라에 남아 끝까지 가게 된다. 명심해! 난 진실만을 제안한다!”고 말하며 선택하도록 하는 장면이 있다.
동섭쌤의 강의는 꼭 모피어스의 속삭임 같은 느낌이었다. “네가 일상과 당연의 노예란 사실. 너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일상과 당연에 갇힌 감옥에서 태어났지”라고 내가 놓인 상황을 알려준다. 그 후에 역시나 “강의를 듣지 않으면 여기서 끝난다. 침대에서 깨어나, 건빵 니가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된다. 강의를 들으면 일상이 무너진 나라에 남아 끝까지 가게 된다. 명심해! 난 트위스트(일상적인 말을 하다가 지평을 달리하며 그 일상을 관조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을 말한다”는 말로 결단을 요구한다.
그런 결단을 요구하는 것처럼, 난 모든 게 이미 디자인된 세상에서 태어나 그 디자인대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했고, 그에 따라 일상적인 말들을 되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생각이 바뀔 만한 기회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러던 차에 동섭쌤의 강의를 들으며 일상이 완벽하게 무너져 내리니 여태껏 느끼지 못한 새로운 충격에 몸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였으며, 극단적인 거부감까지 들기도 했다. 즉, 하나를 알았을 뿐인데, 그로 인해 지금껏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새로운 물음이 뒤따라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섰다 하는 자들은 넘어질까 항상 조심하라!”라는 성경구절처럼 천리마인 줄만 알았던 나는 조랑말에 불과했던 것이고, 그러다 보니 처음의 강단 있는 태도, 심지어 돌마저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을 것 같던 결기는 어느새 흐리멍덩해지고, 자신에 대한 한없는 자책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운 좋게 5강의 강의 중 4강까지는 어찌 어찌 정리할 수 있었다. 이건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초반엔 열정만으로 가능했으나, 중반부턴 동섭쌤의 응원과 준규쌤의 지지, 쓰다가 도무지 막혀 아무 것도 쓸 수가 없을 땐 황경민 시인의 아포리즘이 역동적인 힘을 주어 쓸 수 있었다. 초반만 해도 나의 힘으로 충분히 써나갈 수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런 마음은 금세 바닥이 났고, 갈피를 못 잡아 허둥지둥될 때 이끌어주고 당겨주고 안아주는 사람들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은 ‘천리마는 환상’이라는 거였다. 난 여태껏 경쟁을 당연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모든 건 나의 힘만으로 해나가야 하며, 그 열매는 나만의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벌 위주의 승자독식을 그렇게 비판했으면서도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승자독식의 욕망은 돌아볼 생각도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후기를 쓰다 보니 ‘천리마는 이상에나 존재하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자기 혼자 잘난 맛에 할 수 있는 건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람의 탄생조차 난자와 정자의 유기적인 흐름에 의해 이루어지며, 아이의 자람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에 의해 가능하다. 그 후 학교에서 공부할 때에도 지나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지식과 연구 성과 위에서 배우고 익히게 된다. 무엇 하나 자기 혼자서 이루어낸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치다쌤은 이런 생각을 논문을 쓴다는 것에 빗대어 “자네들이 질이 좋은 논문을 쓰면 그것에 의해서 이익을 얻는 것은 아직 만나지 않은 독자들이다. 자네들은 그 사람들을 향해서 ‘좋은 패스를 하는 것’이 기대된다. 논문쓰기에서 자네들은 end user(역자주: 논문쓰기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그리고 독점적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가 아니라 패스하는 사람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논문이라는 정형화된 작품조차도 선배들이 패스해준 지식과 도움에 의해 써진 것이니, 어떤 일을 할 때에도 자신이 최종수혜자로 남으려 할 것이 아니라, 아직 만나지 않은 후배들을 위해 패스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4강 후기까지 마치고 나니, 그제야 20편의 후기를 내가 쓴 것도 아니며, 이런 활동의 최종수혜자가 내가 아니라는 것도 알겠더라. 그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한 자 한 자 적어간 것이며, 아직 만나지 않은 독자들을 향해 패스하는 거였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난 천리마 같은 사람이 아닌, 조랑말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누군가 나에게 ‘너는 조랑말 같은 사람’이라 말했다면, 화가 났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선 누구 할 것 없이 천리마가 되고 싶어 하고, 조랑말은 혐오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 지금껏 휩쓸려 왔지만 20편의 후기를 쓰는 내내 그런 관념에 균열이 생겼고, 나 자신을 조랑말로 규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대해 도올 선생은 재밌는 이야기를 해준다.
순자는 그의 책 「修身」편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하였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간다고 뽐낸다. 그러나 조랑말이라도 열심히 가기만 하면 열흘이면 같은 목적지에 너끈히 도달할 수 있다. 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則亦及之矣.”
문제는 가는 목적지가 명확히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아무리 천리마라도 가는 목적지를 명확히 정하지 않고 천방지축으로 날뛰기만 하다 보면 골근이 다 상하여 도중에 뒈지게 되어 있다. 사실 순자가 이 말을 했을 때는 ‘천리마의 존재’를 사실상 부정한 것이다. 인간세에 천리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화일 뿐이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별 기능이 없다. 인간세의 참된 모습이라는 것은 조랑말들이 부지런히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착실하게 가고 있는 것일 뿐이다. 천리마처럼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조랑말들의 범용성의 위대함, 그 근원적 방향성을 파악하지 못하면 허공의 신화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땅에 아무런 임팩트를 주지 못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도 성적이 좋지 못한 범용한 소년이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중용, 인간의 맛』, 김용옥, 돌베개출판사, 2011년, pp 267
‘하루면 천리를 가는 천리마와, 열흘이면 천리를 가는 조랑말 중 어떤 말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의 답은 너무도 뻔하다. 지금처럼 치열한 경쟁사회에선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식의 인식을 도올 선생도 충분히 알고 있기에 그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려 한다. 하루에 천리를 가는 말이라 할지라도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독이 되어 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조랑말들은 올바른 목적지를 정하고 시나브로 자신의 길을 조용히 걸어간다고 한다. 그러니 조랑말들의 범용성의 위대함이 세상을 바꾸고,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천리마가 아닌 조랑말이 되자’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보니, 더욱 더 조랑말인 내 자신을 자부할 수 있게 되었으며, 범용한 사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뿐인가,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조랑말이 꾸준히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응원해주던 뭇 사람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도올 선생의 말과 동섭쌤의 강의는 기본적인 부분에서 공명하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리마를 칭송하는 것을 당연시하던 세상을 되돌아볼 수 있게 했듯, 동섭쌤도 매 강의마다 일상에서 ‘ㄹ’을 빼게 하여 조랑말의 범용한 위대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트위스트 교육학의 가장 큰 가르침이자,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트위스트 교육학 5강의 제목은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메시지’이다. 5강은 트위스트 교육학의 대미를 장식하는 강의이니만치, 조랑말의 노둔하면서 끈기 있는 자세로 후기를 써보려 한다. 이 번 강의의 핵심은 ‘가르침이란 증여다’라는 주제로, 모스와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증여론에 대한 이야기로 증여의 뜻을 알고, 교육과 증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풀어내도록 하겠다. 이제 5강의 후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