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빵 May 27. 2016

차이가 주는 긴장 속에서 트위스트 추기

22.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모든 것이 메시지, 두 번째

트위스트 교육학에 ‘교육’이란 단어가 들어 있다고 해서, 그걸 단순히 학교가 독점한 교육에 대한 얘기로 한정지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오해할 경우 학교와 관련 있는 사람(학생, 교사, 학부모)만 이 강의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오해 때문인지 동섭쌤은 “교육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한 것뿐이며, 그런 이름을 지어야만 사람들이 올 것 같아서 그랬던 것입니다. (일동웃음) 원래 이 강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알려준 걸 테다. 

그러니 이 강의는 ‘교육학’이란 매우 정형화된 이름으로 부르기보다 ‘트위스트 인생학’ 또는 ‘트위스트 삶학’이라 부르는 게 더 실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네 번 진행된 강의 속에 도도히 흐르는 메시지는 ‘디자인된 세계를 재디자인하자’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강의는 삶에 대해 궁금한 사람, 사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 심지어 우리가 사는 현실이 어떤지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을 느긋이 먹고 편하게 들으면 된다.                



 ▲ 1강 때와 똑같이 마지막 강의를 준비하고 있는 동섭쌤의 모습.




그러면 어찌 해야 되나요? 

    

그런데 트위스트 교육학을 듣다 보면, 예전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흘려보냈던 것들이 가시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대수롭지 않은 것임에도 나에게 뭔가 남다른 것처럼 느껴지고,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좀처럼 혼란스러움을 해결해주려 하거나, 대책을 마련해주려 하지 않으니 속 시원한 느낌은 없이 답답하기만 하다. 

이게 무슨 얘기인지 예를 들어보자. ‘지금 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필요한가?’라는 제목으로 강의가 진행되어, “‘점수를 잘 받기 위해 튀는 행동을 하는 교사’, ‘단기적인 성과를 만들려 애쓰는 교사’처럼 사회적으로 칭송받는 교사가 아닌, ‘진득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교육의 근본을 생각하며 활동을 하는 교사’처럼 칭송은 받지 못하지만, 정작 사회에 필요한 교사가 되자”는 내용엔 동의했다고 치자. 하지만 문제는 동의하였기에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되고 싶은데, 그러면 어찌 해야 되나요?’라는 물음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방법을 듣고 싶지만, 동섭쌤은 전혀 그런 이야기를 해줄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 좋은 교사, 칭송받는 교사, 이런 말들은 분명 좋은 말이지만, 규정되는 순간 변질되고 오해가 되며 획일화시킨다.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문제에 머물라 

    

오히려 “그런 식으로 문제가 드러난 상황을 손쉽게 정리하려 하지 말고, ‘지적폐활량’을 길러서 견디어 내면 된다”고 말을 해줄 뿐이다. 여태껏 ‘문제발생→해결책 강구→그에 따른 행동→문제의 해결’ 식으로 ‘문제-해결’ 위주로 사고해왔던 사람들에겐 이처럼 난해한 대답은 처음이고, 그에 따라 당황스럽기만 하다. 해결은커녕 아예 그 문제 자체에 머물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란 말인가.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김영민 선생도 비슷한 말을 했다.           



무엇보다도 차이가 주는 긴장을 손쉽게 풀 수 있는 권위나 정답의 유혹 앞에 당당하라. 네 삶의 방식을 뒤흔들 수 있는 이 긴장을 친구 삼아 속으로 참고 묵힐 수 있는 성숙을 가꾸라. 

-『文化, 文禍, 紋和』, 김영민 


         

차이가 주는 긴장이 발생할 때 우리는 그걸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싸구려 해결책이라도, 손쉬운 정당화라도 마음이 안정될 수만 있다면, 최대한 빨리 긴장을 해소하려 하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땜질식으로 무마하거나, 자기 식대로만 생각하여 불편함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니 그 순간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남아 있다. 그래서 상황과 사람이 바뀌더라도 내 자신은 변한 게 없기에 그 문제는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 긴장의 해소가 아닌 견디어 나갈 때 우린 좀 더 성숙해진다.




차이가 주는 긴장그 속에서 트위스트를 추자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빨리 해결하여 우환을 덜어내려 할 게 아니라, ‘차이가 주는 긴장을 친구 삼아 속으로 참고 묵’혀야 한다. 그래야만 그 상황이 나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를 좀 더 선명하게 알 수 있고,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되어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을 수 있다. 그런 깨달음은 결국 나의 관점을 바꾸고, 좀 더 높은 시좌로 사태를 관망할 수 있게 하여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기술할 수 있도록 한다. ‘기술이 곧 처방이다’라는 말처럼 기술이 바뀌면 처방 또한 달라지게 된다. 그걸 동섭쌤은 ‘지적도량형이 커져 예전엔 미처 재지 못하던 것을 잴 수 있게 된 것’이라 말했는데, 그건 달리 말하면 ‘존재가 성숙(‘하품 수련의 역설’이란 강의에서 동섭쌤은 성숙을 ‘그때까지 그런 식으로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라 정의했는데, 정확히 김영민 선생이 말하는 성숙과 일치한다)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트위스트 교육학의 가치는 바로 ‘권위나 정답의 유혹에 당당’할 수 있고, 차이가 주는 긴장 속에 머물며 성숙해질 수 있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여태껏 너무도 현실적인 이야기만 가득한 강의(돈 쉽게 벌기, 성공하기 등), 좋은 수업 모델 운운하며 처방만을 전하기에 분주한 강의에 신물 나던 사람은 이곳에 와서 긴장이 주는 묘미를 만끽하며 한바탕 트위스트를 추기만 하면 된다.                



▲ 5번의 강의 동안 신나게 트위스트를 췄던 사람들.




동섭쌤이 싫어하는 사자성어와 그 속 뜻

     

트위스트 교육학 다섯 번째 강의의 제목은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메시지’이며 주요내용은 ‘교육은 증여다’라는 거다. 

이번 강의의 자료는 동섭쌤이 열심히 썼지만 ‘게재불가’된 논문을 함께 읽으며 진행되었다. ‘게재불가’는 동섭쌤이 가장 싫어하는 사자성어지만, 은근히 그 말 속엔 자부심도 느껴지는 묘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이 논문이 게재불가된 이유는 ‘들어가는 글’에서부터 인용을 하고 일상적인 내용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이 이유를 듣고 모두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짓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니 논문이 게재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선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라는 영화 대사처럼 모욕적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런 판에 박힌 곳에 실리지 않았다는 측면에선 학문의 완고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분과학문의 벽을 넘나들며 ‘이동연구’를 했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모욕과 인정 사이에 놓인 이 논문 내용을 중심으로 ‘교육은 증여’라는 말이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 이동연구소장의 저력을 보여준 게재불가. 이 말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담고 있다.




쓸모 있는 공부 OR 쓰잘데기 없는 공부

     

단재학교는 수요일 오후에 외부 강사쌤이 오셔서 연극수업을 진행한다. 이 수업은 연극을 한 편 올리자는 일반적인 목표보다 실질적으로 학생들의 표현능력을 키우자는 목표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번엔 ‘지금 자신이 어떤 물건을 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표현하세요’라는 식으로 진행했다. 강사쌤은 ‘야구배트’, ‘공’, ‘카메라’와 같은 사물을 앞에 선 학생에게 알려주고, 그 학생은 그걸 손에 잡았다고 상상하고 표현한다. 그러면 친구들이 그 사물을 맞추면 된다. 

이런 수업 방식이다 보니 평소에 얘기를 많이 하고 자기 생각을 맘껏 표현하던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반해,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장난처럼 반응하거나 감정을 드러내길 꺼려하여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마도 이렇게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 그 수업이 힘이 들고 어떻게든 빠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든 한 학생은 “아예 연극수업을 빠지고 그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겠어요”라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은 그 수업에서 자신이 잘 표현하지 못하기에 부담되어서 빠지는 건데도, 말은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겠다는 그럴 듯한 모양새라 할 수 있다. 



▲ 2015년 12월의 학습발표회 때 중고등판 [라이어]를 성황리에 마친 아이들. 연극은 표현이고 표현은 삶이다.



이 학생은 고등학교 2학년 나이로 거의 학교 등교시간에 나오지 못하며, 아예 빠질 때도 많았다. 그리고 작년까지는 거의 공부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갑자기 대입시험이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맹렬히 수학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수능과 관련 있는 수업들은 ‘쓸모 있는 수업’으로, 그 외의 수업들은 ‘쓰잘데기 없는 수업’으로 이분화하여 생각했고, 그에 따라 ‘쓰잘데기 없는 수업을 받느라 시간을 허비하느니, 쓸모 있는 공부를 해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겠다’는 말을 하게 됐던 것이다. 

예전 같으면 이런 경우 버럭 화를 내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하고 그냥 수업에 들어가!”라고 말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끊을 땐 끊는 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 달라진 부분은 지금처럼 ‘차이가 주는 긴장’상태에 놓였을 때, 상황에 따라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학생의 말을 듣는 순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는 가라앉히고 천천히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권위에 의지하거나, 해결책을 찾아 거래하려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게 되니 말이다. 2시간 정도 얘기를 나눴지만, 나의 생각이 학생에게 가닿을 순 없었다. 그럼에도 그 시간동안 치열하게 서로의 입장을 듣고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경험이라 할만했다. 

과연 이 학생의 말은 어디에서 문제가 되는 걸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후기에서 보기로 하자. 그 학생의 말엔 어떤 생각들이 기본으로 깔려 있는지, 그리고 그런 생각은 공부하는 것을 어떻게 방해하며 삶을 옥죄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해보자. 


▲ 긴장 관계에 놓였을 때, 그걸 진지하게 그러면서도 직접적인 해결책을 찾지 않으며 해결해 나가기가 힘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