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모든 것이 메시지, 세 번째
저번 후기에선 김영민 선생이 말한 ‘긴장을 친구 삼아 속으로 참고 묵힐 수 있는 성숙을 가꾸라’는 뜻을 생각해보고,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의 일화를 들려주며 ‘차이가 주는 긴장’을 어떻게 참고 묵힐 수 있는지 살펴봤다. 물론 ‘차이가 주는 긴장’에 머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거나, 갈등이 해소되거나 하진 않는다. 그저 그 긴장의 순간 속에 머물며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느껴보는 것뿐이니 말이다. 그 학생은 몇 년간 하지 않던 공부를 갑자기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연극수업과 같이 수능과는 상관없는 수업엔 들어가지 않고 수학문제를 풀겠다고 말을 하게 되었다. ‘고등 2학년까진 단재학교의 커리큘럼을 따라 공부한다’는 나의 입장과는 달랐기에, 그에 따라 긴장은 더욱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2시간 동안 얘기를 나눴지만 서로의 입장차만 확인했을 뿐, 절충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그 학생은 오로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수능을 위한 공부다’라고만 생각하여, ‘그 공부만 하기에도 시간이 벅차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학생의 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아마도 대부분은 ‘학생의 말이 일리는 있네. 지금 당장 필요한 공부를 하겠다는데, 학교 커리큘럼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꼭 그것만 해야 한다는 거야?’라고 불만스러울 것이다. 더욱이 이 학생은 몇 년 간 공부에는 손도 대지 않다가 이제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려(?)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니, 그걸 대견하게 여겨 “하겠다는 아이를 철학이나 이론적인 얘기로 하지 못하게 하는 건 문제가 있다. 그저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학생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정말 그 학생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자. 학생은 “쓸모 있는 공부만을 하여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겠다”는 말로 연극수업에 빠지는 것을 정당화했다. 즉, 수능을 위한 공부는 쓸모 있는 공부이며, 그 외의 것들은 쓸데없는 공부란 얘기다. 그래서 쓸모 있는 공부만을 해야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 사회에 너무도 팽배한 ‘시간=돈’이란 관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전혀 이상한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생각의 기저엔 ‘여기의 가치관’만을 당연시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공부를 생각할 때조차 ‘쓸데없다 / 쓸모 있다’를 판단의 기준으로 내세우며, 이 공부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예측이 가능해야지만 하겠다는 맘이 든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대학은 취업에 유리하냐는 하나의 기준으로 인문학 계열의 학과는 줄이고, 공학 계열의 학과는 늘리려 하고 중고등학교도 대입, 취업을 위한 공부만이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여기의 가치관’만을 중시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해서는 이미 우치다쌤이 여러 강연에서 열변을 토하셨다. 그렇게 되면 배움은 완전히 무너지며, 교육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고 말이다. 아래의 글을 잠시 읽어보자.
교육을 둘러싼 다른 모든 것들은 ‘여기’에 속합니다. 정부, 교육위원회, 학부모, 지역사회, 대중매체, 시장, 이 모든 것들은 ‘여기’를 지배하고 있는 동일한 가치관이라는 대기압의 지배를 받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은 모든 아이들에게 큰 권력, 명예, 풍부한 재화와 문화자본을 획득하여 상위계층에 올라서기 위해 가혹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부모들에게 전면적으로 교육을 맡기면 아마 ‘이기는 아이’를 만들려고 할 겁니다. 대중매체에 부탁해도 문부성에 부탁해도 재계에 맡겨도-실은 맡기려고 해도 그쪽에서 거부할 테지만-역시 ‘여기의 가치관에 매몰된 아이’를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교사를 춤추게 하라』, 우치다 타츠루, 민들레출판사, 2011년, pp 44
일본의 학자답게 일본의 현실을 얘기해주고 있다. 일본의 모습 속에서 한국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우치다쌤의 책을 읽다 보면 일본과 한국은 묘하게 닮아 있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여기의 가치관’은 자본주의 사회가 유포하는 가치관을 말한다. ‘돈이 최고다’, ‘시간은 돈이다’, ‘니가 일등하고 싶으면, 앞에 있는 66명을 죽이면 된다’ 따위의 너무도 지당해 보이는 말들이 바로 ‘여기의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여기의 가치관’에 학생은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여 쓸데없는 공부는 최대한 하지 않고 쓸모 있는 공부만 하려하고, 교사와 부모는 ‘지금 공부해야 미래의 남편과 아내 얼굴이 바뀐다’는 말로 그걸 부추기며, 교육의 틀을 만드는 교육부 관계자들은 ‘여기의 가치관’을 교육에 반영하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그러니 더더욱 ‘여기의 가치관’은 완벽하게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어 절대 변하지 않을 진리처럼 여겨지고, 그래서 어떤 상상도 할 수 없게 됐다. 현실이 이러하다 보니 그 학생도 “모두 다 그렇다고 하는데, 나만 아니라 한들 그건 정신승리 아니겠어요.”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곁다리로 새는 얘기를 해보자. 정말 그 학생이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여 그런 얘기를 한 것이냐 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단재학교는 4시면 학교 일정이 끝나며, 숙제도 별로 내주지 않아 방과 후에 공부하려고만 하면 시간은 넉넉한 편이니 말이다. 그 학생은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표현을 해야 하는 연극수업의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싫어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와 이 학생이 연극수업을 빠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한다면, 정말 열심히 공부하게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이 학생은 공부를 ‘투입-산출’의 등가교환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공부한 후에 얻게 될 이득이 명확히 보일 때만 공부를 하려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런 걸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는 말로 평가절하하며 아예 하려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쓴다’는 말 자체가 투자 대비 산출의 경제학적 개념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투자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고, 그에 반비례하여 산출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산출을 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이고, 반대로 최대의 투자로 최소의 산출이 나왔다면 자신이 손해 봤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대해서는 우치다쌤이 『하류지향』이란 책에서 ‘노동주체와 소비주체’라는 개념으로 꼼꼼히 비판했다.
그런데 소비주체적인 이런 생각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행위에만 국한되지 않고, 거의 모든 것에 적용된다. 사람을 사귈 때도 ‘이 사람을 사귀면 나에게 어떤 이득이 있나?’라는 이해타산으로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서만 관계를 맺으려 하고, 공부할 때도 ‘이걸 배우면 어떤 이익이 있나?’라는 생각으로 지금 당장 가치를 알 수 있는 것만 공부하려 한다. 거기다가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얻는 게 이익이라고만 생각하니, ‘어떻게 효율적으로 공부하여 단기간 내에 높은 성적을 얻을까?’를 궁리하게 된다. ‘여기의 가치관’에 함몰된 사람은 오히려 공부를 한다고 스스로 착각할지는 모르지만, 공부와는 오히려 담을 쌓고 점차 멀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삶에서 마주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지금 당장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것투성이다. 아니 어쩌면 동섭쌤이 말한 것처럼 ‘모든 가치는 사후적으로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가치를 알 수 없지만 해야 하는 게 있고, 왜 배워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배워야 하는 게 있다. 그런데도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다’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아예 경험조차 안 한다면, 그건 어찌 보면 ‘난 내 생각 이외의 것들은 하려 하지 않을 거다’는 말과 같고, 그건 ‘난 여기의 가치에만 머물 거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삶이 점차 협소해지고 관계는 비좁아지며, 앎은 편견으로 가득찰 수밖에 없다.
더욱이 공부란 지금 공부를 했다 해서 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상품거래는 돈과 상품의 교환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공부는 노력과 성취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고 그 가치 또한 언제 알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하려면 ‘투자-산출’의 경제학적인 관점은 철저히 버려야만 하고, 모름에 투신하려는 용기와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 필요하다. 이런 마음가짐일 때에야 비로소 공부를 할 수 있고, ‘여기의 가치관’으론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던 너른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배운다’는 것은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부름을 받고 그 사람이 하고 있는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이 ‘물듦’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가치 판단의 잣대로는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잣대를 애지중지 끌어안고 있는 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지식을 쌓거나 기술을 익힐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자격증도 딸 수 있겠죠. 하지만 자기 안에 그런 것들을 아무리 많이 집어넣어도 조감적 시좌의 높이로 이륙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울타리를 수평으로 확대하는 것일 뿐입니다.
-『교사를 춤추게 하라』, 우치다 타츠루, 민들레출판사, 2011년, pp 59
‘여기의 가치관’으로 공부하려 하면 지식을 쌓거나 기술을 익히거나 자격증은 딸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자신의 울타리를 수평으로 확대한 것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에 반해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가치 판단의 잣대로는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부하면 자신의 한계를 넘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조감적인 시좌로 이륙할 수 있다. 그건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다른 세계와 만나게 되어 자신이 바뀌고 생각의 틀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이다. 이건 고미숙 선생이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비로소 공부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과 공명하는 말이다.
여러 얘기를 했지만, ‘교육은 등가교환의 정신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이고, ‘지금의 가치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을 배우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되었다면, 이젠 교육에 대해 ‘배워서 성공한다’는 식의 기존의 정의가 아닌, 전혀 새로운 정의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교육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지만, 애초에 이 강의가 ‘트위스트 인생학’이라 불릴 수 있다고 한 만큼 교육의 일면을 통해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동섭쌤은 단호히 ‘교육(삶)은 증여다’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다음 후기엔 증여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정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