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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May 31. 2016

증여는 연결하고, 교환은 분리한다

24.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모든 것이 메시지, 네 번째

“연극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수학공부를 할래요”라는 고2학생의 선언은 단순히 ‘더 공부를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거기엔 ‘여기의 가치관’을 중시하는 생각이 깔려 있기에, 그런 생각에 갇히면 갇힐수록 공부와는 인연이 멀어질 수밖에 없다.                



▲ 동섭쌤의 트위스트 교육학 마지막 강의는 증여론을 다방면으로 펼치며 진행되고 있다.




재디자인은 정신승리가 아닌거짓 선택을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학생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런 식의 공부만을 원하고 별다른 방법도 없기에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런 세상을 비판하며 재디자인하겠다는 사람을 ‘정신승리’하는 것쯤으로 비하했던 것이다. 이미 그 학생은 세상이 디자인한 길로 가려고 맘먹은 이상, 그렇게 만들어진 디자인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이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그 학생의 그와 같은 선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는 거다. 일반적으로는 ‘수능을 본다, 안 본다’의 선택지가 있고 그 중에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그 학생처럼 ‘수능을 보겠다’고 선택한 경우, “선택은 니가 한 것이니, 이제부턴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돼”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 ‘85호 크레인의 여인(철의 여인)’으로 알려진 김진숙씨는 ‘선택 아닌 선택’이라 비판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저는 ‘선택’하면 항상 떠오르는 영화가 있습니다. 『소피의 선택』인데, 주인공 이름이 ‘소피’입니다. 소피가 두 자식을 데리고 아우슈비츠로 끌려갑니다. 여기까지는 빤한 내용이지요. 그때 나치 장교가 소피에게 두 아이 중 한 명을 구해줄 수 있으니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 순간,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소피는 선택을 하지 못합니다. 저는 ‘선택’하면 늘 그 장면이 스쳐가곤 합니다. 그건 형식적으로 선택인 것 같지만 ‘선택’이 아닌 거죠. 두 자식 중 하나를 고르라는 건 선택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한국에 사는 사람들, 한국뿐 아니라 약자 혹은 피지배자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와 유사한 ‘선택’이 강요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을 ‘선택’하기 위해 여기 젊은 분들이 많이 오셨는데, 여러분이 눈 뜨면 듣는 얘기가 ‘스펙’을 쌓으라는 말이지요. 여러분은 어느 영어학원에 갈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지만 나머지, 곧 진짜 선택은 사실상 불가능하지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회는 지배집단, 곧 자본가나 권력이 요구하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셈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삶에서는 정작 선택의 기회가 박탈되는 것이죠.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다』, 김진숙, 한겨레출판사, 2012년, pp15  


        

그녀는 한진중공업의 구조조정에 맞서 바닷바람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크레인에 2011년 1월 6일에 올라 부당함을 호소했다. 결국 회사 측에서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면서 309일 만인 2011년 11월 10일에 영도의 땅바닥에 내려올 수 있었고 2012년 3월 13일에 ‘선택’이란 주제로 특강을 할 수 있었다. 위의 말은 그 특강 때 했던 말이다. 



▲ 그녀는 차갑고 진중하며 대장부스타일 같을 줄만 알았는데, 좌중과 호흡하며 유머와 진지함 사이를 쥐락펴락했다.



우리에겐 애초부터 진정한 선택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 말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공부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걸 왜 해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도도히 흐르던 기류가 있었기에 해야만 했고, 누군가는 마치 그걸 ‘선택의 기회가 주워졌을 때 네가 선택하여 여기까지 왔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하지만 김진숙씨가 잘 지적했다시피 내가 생각한 틀에서 선택을 했다기보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틀에 들어가 마지못해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학원에 갈까? 아니면 아예 다른 공부를 할까?’ 따위의 선택이 아닌, ‘영어학원에 갈까? 수학학원에 갈까?’의 선택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학생도 수능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연극수업에 빠지고 수학공부를 하는 걸 선택했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어른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선택’을 강요받은 것에 불과하다. 그걸 그 학생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그러한 사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때 필요한 것이 동섭쌤이 말하는 ‘디자인된 세상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걸 재디자인할 수 있는 용기’라 할 수 있다. 그래야만 선택의 기회가 박탈당한 사실을 알고, 그에 따라 그 기회를 되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건 단순히 ‘정신승리’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거짓선택의 기회를 버림으로 충분히 현실을 재디자인할 수 있는 ‘용기’라 보아야 맞다. 



▲ 스펙을 쌓는 건 선택이 아니었고, 수능 외의 다른 20대이 미래를 그리는 건 선택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교환의 논리를 벗어던져라 

    

교육이든 삶이든 결국 우리가 여태껏 받아들인 것들이 하나의 강요된 선택에 불과하다면, 이젠 그런 생각이 너무 당연하다는 인식을 버리고 어떻게 다른 생각으로 대체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동섭쌤은 재디자인할 수 있는 소스를 아낌없이 던져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바로 ‘교환의 논리를 버리고 증여의 논리로 무장하라’는 것이다. 

교환은 저번 후기에서도 밝혔다시피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려할 때, 필요에 의한 관계를 유지하려할 때, 단기적인 성취를 얻으려 할 때엔 유용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삶이든 공부든 관계든 어느 것 할 것 없이, 단기적인 안목이나 동일화의 논리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 이런 경우 소탐대실小貪大失하게 되어 오히려 더 많은 부작용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완전히 어그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화된 교환은 동일화 논리이다. 원시 사회가 무엇보다 거부하는 것이 바로 이 동일화 논리이다. 타자와 동일시되는 것에 대한 거부, 자신을 자신으로 구성해 주는 것, 자신의 존재 자체, 자신의 고유성, 스스로를 자율적 ‘우리’로 생각하는 능력 등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거부가 그것이다.…… 만인 사이의 교환은 원시 사회의 붕괴를 가져온다. 동일화는 죽음을 향한 운동인 반면, 원시 사회의 존재는 삶의 긍정이다. (『폭력의 고고학』,피에르 클라스트르, 변지현 외 옮김, 울력, 2002년, PP279~280)”라는 말을 한 것이다.  



▲ 교환은 동일화 논리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 교환은 관계를 멈추게 하고, 상황을 종료시킨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하게 될 증여에 대한 이야기는 당연히 교환이 갈기갈기 찢어놓은 것들을 연결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자본주의가 촘촘히 쳐놓은 이익이란 관념을 벗어던지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 펼쳐질 얘기를 읽으면 ‘이건 과거엔 가능했을진 모르지만, 지금은 전혀 터무니없는 소리구만. 여기서 말하는 식으로 살면 그냥 호구가 되라는 말인데, 어느 누가 그럴 수 있겠어?’라는 반감이 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이야기이자, 어찌 보면 ‘풍요 속의 빈곤’에 살며 망각해버린 이야기이기에, 충분히 들어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 교환이 판치는 시대, 우린 풍요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마음은 빈곤하고 상대적 박탈감으로 허탈하다.




모스가 말한 증여론

     

우선 마르셀 모스Marcel Mauss(1872~1950)가 말한 증여론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선물을 주는 사람은 선물이 ‘그 사람에게 필요하다,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 자체가 없으며, ‘선물을 줬으니 답례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도 없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답례의 의무를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답례의 의무는 없되, ‘소유한다면, 병에 걸리거나 심지어는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선물을 준 당사자에게 바로 답례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받은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그 선물은 전해지고 전해져 세 번째 사람에게, 세 번째 사람은 네 번째 사람에게 흘러간다. 끝없이 흘러가다가 결국 N번째 사람에게 전해진다. 그런데 이 때 N번째 사람이 하는 행동이 중요하다. N번째 사람은 그 때 “아 이것은 정말 훌륭한 물건을 받았다”고 생각하여 답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니 말이다. 그런 사람이 등장한 이후에야 최초로 물건을 전해준 사람은 비로소 ‘선물을 준 사람’으로 인정되고 답례품을 주게 된다. 그 답례품은 사람들을 거치고 거쳐 최초의 사람에게 전해진다. 

동섭쌤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이것에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출현했을 때야 비로소 가치도 존재하게 된다. 물건 그 안에 가치가 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선물을 받은 자이다’라고 생각한 사람이 ‘선물’ 혹은 ‘증여’ 그리고 ‘증여자’를 사후적 혹은 추급적으로 성립시키는 것이다”라고 정리해줬다.                



▲ '선물'이란 책 제목이 참 인상적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선물에 대한 인상을 지워야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니??




레비스트로스의 커뮤니케이션론 1 - 혼인규칙을 통한 증여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1908~2009)의 커뮤니케이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인류의 혼인규칙을 통해, 다른 하나는 침묵교역을 통해 증여활동을 볼 수 있다. 

우선 인류의 혼인규칙을 통해 어떤 특이점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많은 부족의 혼인규칙을 면밀히 살펴보던 레비스트로스는 “세계 곳곳에는 다양한 친족조직, 혼인규칙이 존재하는데 그 어느 것에도 공통적으로 있는 규칙은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즉 ‘근친상간의 금지’이다”이라 결론 내린다. 근친상간이란 친족 안에서 계속적으로 혼인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친족 내의 여자를 독점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 여기에 대해 조금이라도 쉽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권한다. 어려운 구조주의를 대중서로 잘 풀어냈다.



하지만 어느 부족이든 다른 부족 남자의 누나, 딸, 여동생을 양도받아야만 혼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어느 사회든 ‘여자를 양도한 사람’과 ‘여자를 양도받은 사람’의 불균형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었고, ‘여자를 양도받은 사람’은 반대급부의 의무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니 또 다른 부족의 남자에게 자신의 딸을 양도해야만 반대급부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건, 그는 양도해준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다시 양도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동섭쌤은 “증여해 준 사람에게 직접 답례를 해서는 안 된다. 패스는 다음 패서passer를 향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패서가 또 다음의 패서에게 보낼 수 있도록.”이라고 말한 것이다. 

혼인규칙의 예화를 잘못 이해하면 가부장적인 생각을 가진 학자의 여성 비하발언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기보다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인 가족이 증여를 통해서만 이루어져 왔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 혼례에 살아 있는 증여의 법칙, 그건 인류를 구성하게 했고 지금껏 유지해오게 했다.




레비스트로스의 커뮤니케이션론 2 - 침묵교역을 통한 증여 

    

두 번째로 살펴봐야 하는 건 침묵교역이다. 침묵교역은 서로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부족 사이에선 성립될 수 없다.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며, 다른 물건을 사용하는 부족 사이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이 때 A부족은 B부족이 ‘가치를 전혀 모를 만한 어떤 것’을 부족과 부족 사이의 경계지점에 놓고 온다. 그러면 그걸 받아든 B부족은 그 가치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에 정확히 상응하는 것을 A부족에게 전해줄 수 없다. 단지 그들도 자신들은 가치를 알지만 A부족은 가치를 모르는 것을 전해줄 뿐이다. 그러니 그들은 처음부터 ‘등가교환’ 자체가 불가능했고 그에 따라 같은 값을 주고받아 여지가 완전히 사라지는 교역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침묵교역이란 이처럼 가치에 대해 완전히 함구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부족한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 속에서만 유지된다. 그러니 이해되지 않는 이질성으로 인해 물건이 오고가게 되고 그건 한 번의 교류로 끝나지 않게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잇었던 것이다. 동섭쌤은 내륙 깊숙한 곳에서도 조개껍질이 무더기로 발견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침묵교역과 관련 있을 거라는 가설을 세우기도 했다.                



▲ 레비스트로스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가 많다.




등가교환은 가라이제 곧 증여의 시대가 오리니

     

증여론은 우리가 여태껏 당연히 지녀왔던 상식인 ‘Give & Take’의 교환론을 완전히 전복시켜 버린다.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돈을 매개로 동일화(돈이란 하나의 가치)에 기초한 교환은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가져다 준 것만은 확실하다. 한국에 살면서도 아마존 같은 사이트로 우린 같은 돈을 지불하며 해외의 물건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라와 나라의 경계가 허물어졌고, 다양한 욕망이 동일화되었으며, 상이한 가치관이 여기의 가치관으로 획일화되었다.  



▲ 지금은 총알배송을 넘어 로켓배송의 시대로 접어 들었다. 이게 바로 교환의 시대가 안겨 준 혜택. 그런데 삶은 나아졌나?



하지만 이로 인해 우린 더 이상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환상을 갖지 않게 되었으며, 증여를 통해 연결하려던 마음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젠 어느 곳에 가든 동일화를 기반으로 하는 등가교환의 논리만이 판을 치기에 아쉬움이 남는 관계, 잘 모르겠다는 인상이 남는 삶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증여는 연결하고, 교환은 분리한다’고 말한 것인데, 교환을 하면 할수록 관계는 분리되고 존재는 고립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개인주의 사회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교환만이 관계 유지의 기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쯤 되면 교환과 증여에 대해 ‘증여는 당연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교환은 당연의 세계를 유지한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고, ‘교환은 가라~ 이제 곧 증여하는 시대가 오리니. 선물하라~ 네 시작은 홀로였으나 그 끝은 여럿이리라.’라는 개그콘서트의 출산드라 버전으로 말할 수도 있다. 

다음 후기엔 증여의 감각을 지닌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가며, 어떤 식으로 교육을 바라보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 증여의 감각을 회복하라. 그러면 네 시작은 삐쩍 꼴았으나, 끝은 비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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