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규의 ‘대안학교 아빠로 산다는 것’ 4
‘대안학교’를 ‘일반학교’와 비교하며 차이점을 부각시키지 않으며 ‘학교’라는 단일명칭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아빠교육’을 ‘아빠들도 교육을 받아야 아이들을 잘 기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닌, ‘자식이란 전혀 다른 존재에 대해 어떻게 관심 가질 것인가?’라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바로 거기서부터 ‘대안학교 아빠로 산다는 것’이란 주제의 강연이 선명하게 들린다. 즉, 주제를 철저히 부정하는 속에서만 강연이 들리고, 그 때에 내용이 더욱 확장되어 고정관념과 충돌하며 의미심장해지는 것이다.
강연장에 올라선 준규쌤의 목소리는 소리전수관을 꽉 채우도록 울렸다. 소리는 파동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의미 있는 말은 단순한 파동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그건 귀로 들어와 생각의 한 부분을 할퀴며 자리 잡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말이 울림을 낳을지, 어떤 단어가 꽂히게 될 지는 강연자도 모르고, 그걸 듣고 있는 당사자도 모른다. 그렇기에 애초에 강연이란 듣는 사람에 따라, 그 당시의 기분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 역동의 장이라 할 수 있다.
준규쌤은 본격적으로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화면에 띄우고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광범위한 이야기를 펼쳐내기 시작한다. ‘모든 말을 다 씹어주겠어’라는 호기로운 자세로 강연을 듣기 시작했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로기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지식의 옅음을 자책함과 동시에, 처음부터 이론적인 이야기로 일대 혼란을 안겨준 준규쌤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도 동시에 든다. 그래도 어쩔 텐가? 모르면 이해하기보다 그냥 막고 품는 수밖에 없는 것을 말이다.
준규쌤은 다섯 명의 학자를 소개해줬는데 그들의 교육에 대한 생각이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존 로크John Locke(1632~1704)는 ‘정신=빈 서판tabular rasa’이라 하여, 아이들은 백지 상태이기에 어른들은 그걸 채워 넣어야 한다고 봤단다. 그래서 아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른들이 전면에 나서 아이들을 이끌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런 교육관으로 ‘어른이 세팅해 놓은 커리큘럼에 따라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이 가능해진 것이다.
삐아제Jean Piaget(1896~1980)는 ‘각 나이별로 발달단계가 있다’고 하여, 나이에 맞는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했단다. 그러니 아이들을 무작정 가르치고 주입하려 하기보다 나이에 맞게 가르치면 된다는 풍조를 만든 것이다.
존 듀이John Dewey(1859~1952)는 ‘생산 활동에 기초한 노작학교’를 주창하여, 학교 내에서 노작활동이랄지, 실생활과 관련된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단다. 이런 생각은 대안학교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져 ‘풀무학교’, ‘변산공동체학교’와 같은 학교들이 만들어졌다.
촘스키Noam Chomsky(1928~)는 ‘사람에겐 생득적으로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매커니즘이 있다’고 했단다. 그건 곧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위적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을 기본에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촘스키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은 존 로크와는 반대성향의 교육을 하려 하는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Joseph Lorenz Steiner(1861~1925)는 ‘원래 가지고 태어나는 게 있기에 조화를 이루어 갖추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여, 촘스키의 논의와 비슷하면서도 자연스런 배움의 과정을 중시했다.
당연하지만 ‘다섯 명의 교육관이 어느 부분이 비슷하고 어느 부분이 다르냐?’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사람마다 교육을 보는 관점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며 로크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뒷사람으로 갈수록 인위적인 교육이나 강압적인 교육을 하자는 입장에서, 자율성을 존중하고 가능성에 집중하는 쪽으로 바뀌어 갔다는 점이 중요하다. 준규쌤은 이런 이론가들을 설명하고 나서 “누구나 이 다섯 명이 말한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는 동의하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타율성과 자율성의 스펙트럼 중 누구나 한 지점을 찍고 자신의 교육관을 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정리해줬다.
이렇게 ‘교육’이란 깔때기로 여러 학자들의 입장을 정리하고 보니, 좀 더 교육에 대해 명확하게 알게 됐고 나는 어느 정도의 지점을 찍고 교육을 정의하는지 알게 됐다. 이 말에 덧붙여 준규쌤은 “여기서 어느 말이 맞다 그르다 하는 논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현실에 따라 이러한 논의 중 하나를 자신이 취사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죠”라고 말했는데, 이 말이 매우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단순히 하나만을 택하여 옳다고 보는 ‘극단적인 선택’을 근본적으로 회의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여러 분야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부추긴다. 그래서 ‘북한에 대한 옹호’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로, ‘기업문화의 비판’은 ‘돈 없는 자의 현실 불만’으로 받아들이며, ‘학벌체제에 대한 비판’은 ‘공부 못하는 사람의 넋두리’로, ‘학교교육에 대한 비판’은 ‘부적응 세력의 헛소리’로 받아들인다. 이런 논의에선 ‘모 아니면 도’의 극단적인 선택만 있고, 그에 따라 답까지 이미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럴 때 반대되는 이야기를 들으려 하고, 그걸 하나의 가능성으로 열어두려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으니, 생각은 얕아지고 행동의 반경은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사회의 교육은 시스템(입시위주의 교육이고 정답암기식 교육)적으로는 어쩔 수 없다 쳐도, 전체적인 흐름은 로크의 이론보다 후자의 이론이 좀 더 인간적인 것으로, 그리고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혁신학교’라는 말이 전면에 떠오르며 최고의 선인 것처럼 인식되고, 혁신적인 수업을 하는 교사가 유능한 교사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문제는 ‘혁신’이 제왕의 자리에 올라서는 순간, 다른 논의들은 핍박받거나 묻힐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혁신이 학교 개혁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면 차지할수록, 공교육은 더욱 위태롭게 되는 아이러니가 이러한 이유로 발생한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의 내용이 옳음으로 받아들여지며 다른 것들을 깔아뭉개는 현실을 비꼬며 동섭쌤은 “지금 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들이 필요한가?”라는 파격적인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준규쌤도 걱정하셨던 것이다. 그러니 ‘맞다 그르다’의 논의로 보지 말고, 이런 다양한 내용을 ‘취사선택’하는 논의로 보자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까지 강연이 진행되면, 이 강연을 들으러 오면서 품었음직한 ‘그래서 아빠들은 자녀를 어떻게 기르란 것이야?’라는 생각엔 균열이 갈 수밖에 없다. 애초부터 이 강연이 정답을 알려주고 ‘이 정답대로만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면 성공합니다’라는 성격의 강연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이 순간에 이르면 애써 화창하고 포근한 토요일에 강연을 들으러 온 학부모의 입장에선 ‘시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자식이란 전혀 새로운 존재를 대하며 막연하고 난해하다고 느꼈던 부분이 강연을 들으며 조금이나마 시원하게 알게 되길 바랐는데, 시원하게 풀어줄 생각은 애초에 없었으니 말이다(작년 10월에 있었던 우치다쌤 강연 중 질의응답 시간에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했는데, 이 때 준규쌤 강연 때도 그런 혼란은 비슷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별 것 없네’라고 실망하고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 이제 겨우 강연의 절반 정도만 지나왔으니 말이다. 좀 더 강연을 들어보면 뭔가 기가 막힌 시원한 통찰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지막 반전을 기다리며 영화를 보듯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끈을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
역시나 준규쌤은 이런 청중들의 반응을 아셨던지, 시기적절하게 ‘아이들의 지지자가 되는 조건’이라는 내용을 이어서 해주신다.
마틴 부버Martin Buber(1878~1965)의 이야기를 하며 지지자가 되는 조건의 서두를 여셨다. 그는 『나와 너』라는 책을 내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데, 그 내용은 ‘나와 너의 짝말은 분리할 수 없이 늘 붙어 있는 것인데, 자본주의는 그게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간단한 설명만 들어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가 ‘개성을 중시하고 개인을 부추기는 현상’에 대한 비판임을 알 수는 있었다. 애초에 나는 너를 통해 성립되고, 인식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너를 제거한 나라는 건 있을 수 없고 그건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너의 개성은 뭐야?’, ‘넌 다른 사람과 달라, 너만의 욕망을 추구해봐’라며 소비를 부추기고 파편화시키는 것이다. 대가족 시대에 소비는 아빠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각 가정에 티비나 전축은 한 대만 있으면 됐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내수시장을 활성화한다는 명목으로 엄마나 아이들까지 소비의 결정권을 지닌 대상으로 만들며 각 방에 티비가 놓이고 아이들도 핸드폰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을 잘게 잘게 나누어 파편화된 시대지만, 그렇게 아이들을 개성이란 말로 뭉뚱그려 ‘하나의 상이 있을 것이다’라는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준규쌤은 “개인(個人individual)이란 말보다 분인(分人dividual)이란 말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라고 목소리 높이며 “아이의 안엔 멀티적인 개성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죠. 아이가 집에서 보이는 모습과 바깥에서 보이는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선생님과 상담할 때 아이에 대해 말해주면 ‘집에선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데, 선생님이 잘못 본 거겠지’하는 생각도 들게 되는 것이죠”라고 말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당연히 ‘멀티적인 개성’이다. 바로 이 점이 자식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에게 하는 행동이 다르고, 밖에서 하는 행동이 다르며, 어느 순간에 태도가 급변했다가 또 어느 순간엔 그렇게 온화할 수가 없다. 이걸 우린 ‘사춘기’, ‘야스퍼거 증후군Asperger’s syndrome’, ‘ADHD’라는 온갖 용어로 붙이며 병증으로 받아들이거나, 하나의 상으로 고착시켜 이해하려 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이해란 이름의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건 이해가 아닌 오해이며, 지지가 아닌 쳐냄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세상이 만들어 놓은 이해 방식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라고 할 수 있다. 그건 당연하지만 엄청난 결단이 필요하다. 이미 세상이 만들어 놓은 이해 방식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진리’가 되었으며 그건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심지어 나의 의식 속에서도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의 그물망’이 촘촘히 쳐진 세상은,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게 만든다기보다 오해와 억측을 정당화하게 만든다. 그러니 그걸 버린다는 것은 ‘아예 생각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목숨을 건 도전일 수밖에 없다.
강연을 들으면 들을수록 정리된다기보다 더 헝클어지고만 있다. 이래서 동섭쌤은 ‘지적 폐활량’이란 말을 통해 이해되지 않고 심지어 거부감까지 드는 상황을 그대로 놔둘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다. 흩어져 있는 것은 정리하고 싶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주류 심리학을 빌려 손쉬운 해결책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을 알기 때문인지 준규쌤은 지지자가 될 수 있는 마지막 조건으로 ‘발신자가 아닌 수신자가 되자’는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준규쌤은 지지학교에서 다양한 초등학생들을 만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적으로 ‘ADHD’, ‘야스퍼거’라 낙인찍힌 아이들을 자주 본다는 것이다. 그들과 2년이 넘게 생활하시며 알게 된 게 있다고 하시며 말문을 여셨다. “이 친구들도 끊임없이 발신을 하는데 누구도 수신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신하지 않으니 이 친구들은 어느 순간에 발신하지 않게 되고, 발신하지 않게 되면 아이덴티티를 만들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라는 말인데, 중요한 메시지의 발신은 수신자가 있을 때 의미가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발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교사나 어른은 무언가를 말하고 가르치려 하는 발신자의 입장이 아닌, 그 친구들의 발신을 의미 있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하는 수신자의 입장에 서 있어야 한다. 그래서 준규쌤은 “내가 너의 자리에 서 있을게. 너는 나의 자리에 오렴. 니가 발신해 그러면 나는 수신자가 될게.”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이렇게 준규쌤이 준비한 50분의 강연은 끝났다. 강연장 곳곳에선 ‘그래서 수신자가 된다는 건 도대체 뭘 말하는 거야?’라고 혼란에 빠진 듯했다. 명확하게 정답을 알려주기보다 이해되지 않는 말로 장내에 일대 혼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준규쌤은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도 예측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50분의 강연 시간과 40분의 질의응답 시간을 둔 것일 터다. 그건 곧 ‘수신자가 되라’를 강연의 내용으로만 던지는 것이 아닌, 질의응답을 통해 ‘어떻게 수신자가 되는지를 보여주겠어요’라는 것처럼 보였다. 어찌 보면 오늘 강연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질의응답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순간을 통해 준규쌤이 준비해온 말이 아닌, 현장의 이야기나 평소의 소신을 더욱 자세히 들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다음 번 후기엔 열띤 ‘발신과 수신의 장이었던 질의응답 시간’의 내용을 담아볼 생각이다. 이제 준규쌤 강연회의 후기도 어느덧 마지막 편으로 향해 가고 있다.
목차
헌 것엔 나의 무늬가 들어있다
사람의 무늬 1 - 얼굴을 통해 드러난 무늬
사람의 무늬 2 - 언어를 통해 드러난 무늬
봄이 피부로 느껴지던 그 날, 건빵이 강의를 들으러 간 까닭?
아빠들을 위한 강연장에서 드러날 준규쌤의 무늬
날씨가 좋은 주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겠어?
날씨와 주말에 상관없이 모일 사람들은 모인다
준규쌤 강의 총평 1 - 나 지금 떨고 있니?
준규쌤 강의 총평 2 - 나 지금 열변을 토하고 있니?
준규쌤 강의 총평 3 - 준규쌤만의 무늬가 한껏 드러난 강연
3. ‘대안학교’, ‘자녀교육=엄마의 일’이라는 틀 벗어나기
강연을 듣기 전 워밍업 1 - ‘대안학교’란 단어 벗어나기
강연을 듣기 전 워밍업 2 - ‘자녀교육=엄마’라는 틀 인식하기
강연을 듣기 전 워밍업 3 - ‘자녀교육=엄마’라는 틀 벗어나기
워밍업이 끝났다면,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스타트
교육의 다양한 스펙트럼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느냐의 문제
정답이 아닌 생각과 생각이 맞물려 고민의 장으로
지지자의 조건 1 - 개인이 아닌 분인으로 받아들이기
지지자의 조건 2 - 발신자가 아닌 수신자가 되자
혼란에 빠진 채 강연은 끝나다
무늬를 보기 위해선 기표가 아닌 기의에 가닿아야 한다
발신자가 되기의 어려움
질문 1 - ‘아빠의 세계’가 필요한 시기는 초4학년 때까지
질문 1 - 때가 되면 아이를 놓아줄 수 있어야 한다
질문 2 - 대안학교를 보내고 있지만, 나중에 사회에 나갔을 때 적응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질문 2 - 아이의 힘을 믿으시나요?
준규쌤 후기 마지막 편에 대한 예고
질문 3 - 수신자가 되는 방법, 게임의 장에서 패턴 찾기
질문 3 - 수신자가 되는 방법, 자녀 교육으로 해방되기
질문 4 - 대안학교 학생은 진로와 부모의 욕망 추구에 대해
질문 4 - 자식의 미래를 위해 부모는 욕망대로 살면 끝!
애쓰지 말고, 노력하지 말고 그저 삶을 살아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