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다 2
교실이란 공간에서 교사와 학생의 첫 만남은 긴장이 넘친다. 물론 단재학교는 작은 학교이기에 이렇진 않지만, 일반학교는 그렇다는 얘기다.
이상으론 교사가 교실로 들어서면 학생들이 환호를 하며 맞이해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학생들은 교사의 등장과 전혀 상관없이 원래 하던 대로 떠들고, 교사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학생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교단에 선 교사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까지 자기들의 뜻대로 할 수 있는지 떠보려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알기 때문에 교사도 교실에 들어갈 땐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고, 그만큼 표정은 굳어질 수밖에 없다. 이때 기선을 제압하지 않으면 1년 내내 힘들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더 표정은 굳게, 행동은 과격하게, 말투는 단호하게 하려는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등장하는 교사들이 바로 이런 정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숙제를 제시하며 하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이 있다고 윽박지르며, 반복적인 구절 암기를 통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키팅 선생은 대결구도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학생들과의 대면한다. 그는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휘파람을 불며 그들을 스쳐지나갔고, 뒷문으로 나가고 나선 “어서와~”라며 학생들을 박물관으로 불러 모은다. 당연히 학생들은 그런 교사의 돌출행동에, 아니 ‘유일무이한 상황’에 당황하며,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들은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긴장감이나 억눌린 현실이 아닌 청량감을 느꼈을 것이고, “어서와~”라는 말을 들으며 현실에서 벗어나 일탈의 상쾌함을 느꼈을 것이다.
박물관에 모인 학생들에게 키팅은 자신을 이제부터 “Oh! Captain! My Captain!”이라 부를 것을 제안한다. 그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신을 존경하지 않음에도 교사의 권위만을 내세우며 억지 존경을 보이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존경하는 마음이 생길 때 그런 명칭을 불러주라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어떤 명칭을 부를까 선택할 수 있는 주체는 교사가 아닌 학생들이라 할 수 있다.
여태껏 우린 학생들이 교육의 당당한 주체라고 말하고 있었으면서도 한 번도 그들에게 무언가를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적이 없었다. 교육과정은 물론이고, 학교 규율에 대해 형식적인 학급회의만을 했을 뿐 의견을 나누고 함께 만들어가려 한 적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교사’라는 명칭이나, ‘선생’이란 호칭은 더더욱 학생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당연히 불러야만 하는 게 되었던 것이다. 키팅은 이런 현실에 균열을 내고자 했고, 그런 균열은 누구의 강요도 아닌, 바로 학생들 자신의 선택에 의해 시작되길 바랐다. 그래서 호칭을 선택하여 부를 수 있는 자유를 준 것이다.
누군가는 ‘겨우 호칭 하나 부를 수 있게 한 것을 너무 심하게 의미부여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들지 않더라도, 명칭이야말로 세계를 구성하고 인식하는 방법임을 알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창 2:19~20)
성경을 보면 ‘이름 짓기=세상의 인식’이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세상은 하느님이 만들었지만, 이름은 아담이 지었다. 그건 곧 세상에 대한 인식은 절대자를 통해 획일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각을 통해 아는 만큼, 느끼는 만큼 보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식물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 도보여행을 할 때 가장 아쉬웠던 것도 수많은 식물들을 보며 걸었지만 눈 뜬 장님처럼 모두 다 ‘잡초’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알지 못하니, 이름을 부를 수 없었고, 이름을 부를 수 없으니 인식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호칭의 문제는 단순히 ‘호칭=대상’의 매칭 문제이기 이전에, ‘과연 그 대상을 어떻게 정의하고 인식하는가?’의 문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단재학교 학생들에게 ‘종환쌤’이 아닌 ‘건빵쌤’으로 불러달라고 처음에 말했었고, 지금은 ‘건빵’이란 호칭으로 자연스럽게 불리고 있다. 건빵은 단순한 호칭이 아닌, 내가 생각하는 가치관을 담은 호칭이기 때문이다. 과연 키팅의 제안에 학생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걸 지켜보는 것도 이 영화를 보는 중요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키팅은 왜 첫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박물관에 데리고 간 것일까? 그 박물관엔 선배들의 의기양양한 사진이 걸려 있었다. 명문학교답게 그곳에 다니던 선배들은 열정이 가득했고, 얼굴엔 자신감이 흘러넘치며,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에 가득 부풀어 있었다. 겨우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만족감과 희망을 단번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진을 보여주며 키팅은 ‘선배들의 사진을 보면서 너희들도 자신감과 희망을 가지고 힘내서 학교생활을 해보렴’이라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역시나 기대를 깨듯 “너희와 별로 다르지 않을 거야. 그렇지? 머리모양도 같고, 너희처럼 젊고 패기만만하고, 너희처럼 세상을 그들 손에 넣어 위대한 일을 할 거라 믿고, 그들의 눈도 너희들처럼 희망에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시기를 놓친 것일까?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죽어서 땅에 묻혀 있는지 오래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선배들을 본받을 대상이 아닌, 본받지 말아야 할 대상으로 묘사하며 삶의 끝엔 죽음이 있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거침없이 누설한다.
그러면서 주검이 된 선배들이 속삭이고 있다며 그 소리를 들어보라고 한다. 학생들은 그 말에 반신반의하며 사진에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댄다. 그 때 키팅은 아주 나지막하며 속삭이는 듯한 소리로 “Carpe Diem(현재를 즐기라, 오늘을 즐기라)”이라고 말한다.
만약 이 말을 교실이란 공간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했다면, 그건 “아파야 청춘이다”라는 말처럼 뻔하디 뻔한 말로 들렸을 것이다. 교실에서도 삶에 혜안을 주는 많은 말들이 울려 퍼지지만 교실이란 환경 때문인지, 교사와 학생의 상하관계 때문인지 어떤 말이든 잔소리처럼 들리게 마련이다.
그에 반해 교실을 벗어나 박물관에 와서 직접 선배들의 사진을 보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아닌,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 말을 듣게 되니, 그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직접 들려오는 선배의 목소리 같은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 그건 말 그대로 오묘한 경험이었고, 생생히 온몸으로 느낄 수 있던 수업이었기에 학생들은 수업이 끝난 후에 “등골이 오싹했어”, “이상했어”라는 말을 한 것이다.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카르페디엠’이란 말을 ‘시간이 있을 때 장미봉우리를 꺾어라. 시간은 흘러 오늘 핀 꽃이 내일이면 질 것이니’라는 시를 인용하며 알려줬다. 지금 당장 이 말을 들었다고 해서 학생들이 그 말뜻을 안 다거나, 그런 삶을 살 수 있다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임팩트 있게 들린 말이기에 의식의 어느 부분에서 자라날 것이다. 그게 어느 순간, 어떤 상황에서 발아하게 될지, 그리고 삶을 어떻게 바꿀지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시대의 시간과 다른 시간을 사는 것. 바로 ‘비시대성’이 타임머신 없이 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미래로 떠나고 싶다면 지금 여기서 그 미래를 만들어라. 그러면 너는 타임머신에 승선하지 않고도 미래를 살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머무른 채로 떠나기’이며, ‘앉은 채로 유목하기’ 아니겠는가.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병권, 그린비출판사, 2003년, pp 215
‘카르페디엠’이란 ‘지금-여기를 살라’는 말이다. 우린 미래의 불안, 미지의 두려움을 가슴 깊이 안고서 그걸 해소하기 위해 현실을 늘 희생양으로 바쳐가며 살아왔다. 그러니 지금은 힘들지라도 하나라도 더 배워야 했고, 한 순간이라도 더 애써야 했으며, 끊임없이 갈구하고 욕망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보니 현재는 늘 불안과 공포의 연속이 되었고, 행복과 희망은 미래의 어느 순간으로 한 없이 밀려날 뿐이었다.
그래서 키팅이 외친 말이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라는 말이다. 사람은 미래를 살 수 없다. 그리고 과거에도 살 수가 없다. 오로지 현재만을 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오지도 않은 미래에 지금을 담보로 걸어 불행을 자초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 미래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키팅이 학생들과 만나고 무언가를 해나가는 방식이 ‘카르페디엠’을 실천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지금-여기를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때 생기는 두려움들을 어떻게 맞닥뜨려야 하는지 여러 수업 방식으로 체험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물론 이런 독특한 방식 때문에 어떤 이에겐 ‘괴짜’로 보이기도 하고, 어떤 이에겐 ‘유일무이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음 후기에선 키팅의 교육관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교육관이 어떤 수업방식으로 드러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