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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Aug 01. 2016

불가능한 꿈을 꾸는 리얼리스트가 되라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다 3

‘처음’은 강인한 인상으로 남든지, 지루한 일상으로 남든지 한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과 완전히 빗나갈 때, 나의 이성으로 알던 영역을 벗어나서 앎의 희열을 맛볼 때 강인한 인상으로 남지만, 판에 박힌 경험일 때, 여태껏 알던 내용의 반복일 때는 지루한 일상으로 남는다.                



▲ 첫 수업을 들으며 학생들은 깅인한 인상을 받았다.




이벤트적인 수업 & 판에 박힌 수업, 그 사이의 줄타기

     

키팅 선생의 첫 수업은 학생들에게 강인한 인상으로 남았다.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순간이었고,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던 순간이었기에, 학생들은 “등골이 오싹했어”, “이상했어”라는 평가를 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첫 수업만을 보고 좋다, 나쁘다 평가하는 건 너무도 어리석은 행동이다. 한 번의 임팩트 있는 수업은 그 다음 수업을 기대하게 하는데, 오히려 그 다음 수업이 판에 박힌 수업일 경우 학생들에겐 더 큰 실망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매 수업을 첫 수업처럼 임팩트 있는 수업으로 꾸밀 수도 없다. 그건 교사의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것일뿐더러, 반복되면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지게 된다. 프리젠테이션을 활용한 수업이 처음 등장했을 때 학생들은 ‘수업의 혁신’이란 표현을 쓰며 좋아하긴 했지만, 그게 매번 반복되자 오히려 급속도로 흥미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 첫 수업은 번개 같이 학생들에게 다가왔다. 그래 첫 수업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다음 수업은 어떨까?



이런 점 때문에 키팅 선생의 수업은 매번이 그런 이벤트로 채워져서도, 그렇다고 다른 선생의 수업처럼 판에 박힌 수업이 되어서도 안 되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키팅의 수업은 ‘위험한 줄타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이벤트로 전락하거나, 지극히 평범한 수업이 되어 버리니 말이다. 

그래서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갈 수밖에 없다. ‘과연 키팅은 어떤 균형감각으로 수업을 진행할 것인가?’를 보는 것이 이 영화의 첫 번째 관람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 청소년 밝은 영화제에 출품하러 회의를 하고 작품을 만드는 아이들. 단재학교 영화팀과의 수업은 언제나 긴장되면서도 기대된다.




교육관이란 이상이 수업을 통해 현실이 된다 

    

키팅 선생의 수업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전에 그의 교육관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균형감각이 어떤 교육관을 토대로 발현되고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교육관을 안다는 건 그 사람이 교육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안다는 것이고 어떤 지향점을 지니고 있는지 안다는 것이며, 그게 어떻게 수업으로 구성되는지 안다는 것이다.

어떤 교사는 학생들을 몰아세우며, 성적에 따라 편애하고, 수시로 ‘그 딴 식으로 공부해서 앞으로 뭘 해먹고 살겠어?’라며 인격을 모독한다. 그러면서 죄책감은커녕 자신은 학생을 분발시키기 위해 노력했노라고 만족해한다. 우리의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교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교사의 교육관은 ‘공부란 목적이 아닌 수단이기에 보상을 위해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가장 현실적이면서 모든 교육 논의 중에 가장 그럴 듯해 보이는 교육론이라 할 수 있다.



▲ 그럴 듯해 보이는 말이 실제론 되게 위험한 말이고 편견을 부추기는 말이다.



그에 반해 다른 교사는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교과지식을 가르치기보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얼핏 보면 교사의 역할은 등한시하고, 그저 학생들과 시간을 때우며 노는 것처럼 보이기에 숱한 오해를 낳기도 한다. 하지만 그 교사의 교육관이 ‘학생은 원래 가지고 태어나는 게 있기에 조화를 이루어 갖추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 그 교사의 수업 내용을 보면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이처럼 교육에 대한 생각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고 어떤 교육관을 가지고 있냐에 따라 수업 내용에도 반영되며, 학생을 대하는 태도에도 녹아난다.    



▲ 13년에 단재학교 영화팀과 지리산 종주를 했다. 노는 것처럼 보이고 여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도 교육이 있다.




키팅,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다

     

키팅의 교육관은 ‘교육이란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84p)’이라고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와 있다.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가 정해놓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객체로서의 사람이 아닌, 자신의 길을 만들며 ‘두 갈래 길 중 인적이 드문 길’로 갈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 자취가 적은 길로 갔고, 그게 인생을 바꿨다는 말이야말로 생각하는 삶이 무언지를 보여준다.



그 당시 교육이란 국가에서 정해준 지식만을 가르칠 수 있었고, 학생들은 그걸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물론 21세기인 한국은 현재도 국정교과서라는 쾌쾌 묵은 방식으로 국가가 지식을 정해주고 그것만을 가르치도록 강제하려 하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럴 땐 단순히 파편적인 지식을 얼마나 많이 암기하고 있으며, 그걸 시험지에 얼마나 써낼 수 있느냐가 공부를 잘 하느냐, 못하느냐의 기준이 된다. 이런 현실에 대해 동섭쌤은 “공부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공부 잘하는 사람은 시험이 끝난 다음에 잊어버리고, 공부 못하는 사람은 시험보기도 전에 잊어버립니다”라는 웃픈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그 당시 교사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물로 바치도록 학생들에게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한다!”와 같이 폭력적인 하나의 가치관을 담은 말로 협박을 하며 억누르면서도 당당했던 것이다.   



▲ 초등학생에게도 이런 시간표를 강요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성공이란 망령.



그런데 키팅은 그렇게 현실이란 말로 옥죄며, 학생들이 지닌 가능성을 억누르고 획일화하려는 흐름을 거부한다. ‘지금-여기’를 살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그런 모든 것들을 고민할 수 있는 넉넉한 시간, 그리고 실행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려는 것이다. 다음 후기에서 키팅의 수업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겠지만, 그 수업을 들은 학생들의 표정은 점차 살아나고 자신들이 진짜로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 무표정한 표정. 아무 것도 없던 학생들이 점차 표정을 찾고 자신의 욕망을 찾아간다.




자유로운 사색가와 예술가라는 인식의 차이

     

그런데 키팅의 이런 수업은 명문학교란 현실과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연히도 키팅의 교육관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폄하되고, 그런 수업들은 ‘방향은 틀렸어도 사로잡을 만’한 하나의 쇼로 치부된다. 라틴어 교사인 맥칼리스터와의 대화에서 어떤 갈등이 빚어지는지 볼 수 있다.



▲ 다른 교사가 볼 때 키팅은 이단아며, 학생들을 선동하는 선동꾼이며, 틀린 방향을 제시하는 거짓 선지자다.



맥칼리스터: 학생들을 예술가가 되도록 부추기는 건 위험한 일이요. 그들 자신이 위대한 렘브란트나 셰익스피어, 모차르트 같은 예술가가 아니란 걸 깨달으면 당신을 미워할 거요.

키팅: 예술가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색가가 되라는 거죠.

맥칼리스터: 17살의 자유로운 사색가라?

키팅: 비꼬고 계시는 군요?

맥칼리스터: 비꼬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말하는 겁니다.



▲ 일반적이지 않은 수업을 그저 예술가를 키우는 수업으로 생각하는 것. 거기엔 편견이 깔려 있다.


       

무언가를 추구하려 할 때 그걸 매도하기 좋은 말은 “그건 이상일 뿐이예요” 또는 “현실을 전혀 모르는 소리구만”이라는 말이다. 

2013년에 단재학교에서 학교 설명회가 있었다. 그 때 오신 학부모님들에게 청소년 성장에 꼭 필요한 독서, 여행, 놀이, 운동의 4요소가 반영된 단재학교의 커리큘럼을 소개하니, 그걸 듣고 있던 한 아버지가 못마땅하게 여겨지던지 반문을 던지더라. “어차피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도망만 다닐 게 아니라, 뚫고 나가야 하는 거 아니예요?”라거나 “살기 위해선 대학은 선택이 아닌 필수죠?”라는 말로 불쾌감을 한껏 표현했다. 이 말은 꼭 라틴어 교사가 “비꼬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말하는 겁니라”라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 현실적이라는 말은 위압적이다.



그 당시에 그 아버지의 ‘현실적인 조언’을 들으며 가슴이 꽉 막힌 듯한 답답함이 느껴졌고, 현실의 높은 벽에 쓸쓸해지기도 했다. 키팅 또한 그런 말을 들으며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이 말은 진정한 교육에 대해 고민하고 그걸 힘써 실천하는 사람을 ‘현실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어, 이상을 추구하기보다 현실에 맞춰 살도록, 교육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주어진 업무만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체게바라 평전』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는 말이 나온다. 그건 현실이 자꾸 우리를 옥죌 지라도, 결코 이상을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는 조언이라 할 수 있다. 현실만 쫓기 시작하면 우린 어느새 자신의 유일무이한 모습은 사라지고, 기계 부속품처럼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상을 품고 그 이상을 향해 헌신해 나갈 때 나만의 유일무이한 모습은 살아나고, 내가 발 딛고 선 교육현장에 꽃을 피울 수 있으며, 교육이란 미명으로 학생들을 획일화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된다. 지독한 현실이 자꾸 가로막는데 키팅은 어떻게 이상을 수업에 녹여내고, 현실에 맞서 나가는지 보는 것이 이 영화의 두 번째 관람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 현실이 자꾸 가두려 하고, 한계 지으려 할 때마다 떠올리라. 불가능한 꿈을 지닌 리얼리스트를.




키팅과 학생들이 빚어낸 이야기의 장으로     


존 키팅이 ‘쇼와 같은 수업과 판에 박힌 수업 사이에 어떤 균형감각으로 수업을 진행할 것인가?’와 ‘현실이란 이름으로 이상을 억누르는 속에 어떻게 이상을 수업에 녹여내며, 그와 같은 현실에 맞서나갈 것인가?’를 보는 것이 이 영화의 관람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키팅의 고군분투가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며, 그에 따라 학생들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보는 것도 이 영화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존 키팅과 학생들이 만나서 어떤 마주침을 빚어내고, 그게 어떤 인연으로까지 확장되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 우리의 이야기를 들을 마음이 있다면, 모두 이리로 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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