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다 4
존 키팅 선생은 첫 수업을 하며 학생들에게 ‘불가능한 꿈을 꾸는 리얼리스트’의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줬다. 여태껏 만나왔던 교사와는 달리,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현재를 희생물 바쳐라’는 정언 명령과는 달리, ‘현재를 즐겨라(Seize The Day-Carpe Diem)’라는 말에 학생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과 마주칠 때 사람은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이게 된다. ‘신선해’, ‘재밌어’라고 생각하여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던지, ‘왜 저래?’, ‘뭐지?’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거부하려 하던지 말이다. 두 가지 반응은 어찌 보면 맞닥뜨린 상황이 얼마나 당황스러웠고, 갑작스러웠는지를 알려준다고도 할 수 있다.
첫 수업은 영화로 치면 오프닝과 같다. 영화의 오프닝은 그 영화의 이미지를 결정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의 역사를 쓴 히치콕Alfred Hitchcock(1899~1980) 감독은 “영화가 줄 수 있는 놀라움과 재미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결정된다.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지 않은 영화를 보아줄 인내심이 있는 관객들은 그리 많지 않다.”라고 말했는데 영화를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오프닝을 얼마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화들은 오프닝에 많은 인력과 장비를 투입하여 매끈하게 뽑아낸다. 오프닝에서 흡입력 있는 전개를 해야 사람들이 ‘보고 싶다’, ‘궁금하다’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흡입력 있게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영화가 오프닝이 끌린다고 해서 전체 내용이 좋은 건 아니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화려한 오프닝으로 이목을 집중시키지만 반복되는 화려함이 오히려 식상하게 느껴져 감흥이 떨어지며 국내 영화 중에서도 오프닝은 화끈한데 그게 전부인양 내용은 지지부진한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이런 경우를 바로 ‘빛 좋은 개살구’ 또는 ‘용두사미龍頭蛇尾’라고 할 수 있다.
키팅 선생의 첫 수업은 시선을 확 끄는 오프닝이었다. 하지만 그게 블록버스터의 화려한 오프닝일 뿐인지, 전체의 흐름을 아우르는 깃털과 같은 오프닝일지는 다음 수업이 어떠냐에 따라 달라진다.
두 번째 수업이 시작되며 학생들은 정자세로 앉아 있고 키팅도 교사용 책상에 앉아 있다. 학교에서 가장 익숙히 보아오던 광경이다.
평범한 수업처럼 교과서를 펼쳐들고 서문에 쓰여 있는 ‘시의 이해’를 공부한다. 닐에게 읽으라고 한 후, 키팅은 책의 내용을 도식화하여 칠판에 그린다. 시를 평가하기 위해선 ‘대상의 표현도’와 ‘대상의 중요도’와 같은 두 가지 항목으로 수치화하여 그 점수를 곱하면 작품의 완성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때 높은 점수가 나오면 훌륭한 작품이고, 낮은 점수가 나오면 저속한 작품이라는 설명이다. 키팅이 칠판에 그린 그림을 학생들도 열심히 따라서 그린다. 이런 모습만 보면 학교에서 일상으로 이루어지는 수업과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쯤 되면 ‘에이 뭐야~ 너무 똑같잖아. 역시 첫 수업만 이상하게 해서 낚은 거네’라는 반응이 절로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실망이 점차 현실이 되려던 그 순간, 키팅은 학생을 바라보며 “(서문의 내용은) 쓰레기”라고 외친다. 아마도 실제로 교실에서 교사가 저런 말을 했다면 누군가는 ‘세상에 어떻게 교사가 저런 욕설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라며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키팅에게 시를 두 가지 항목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모욕적인 일이었기에, 그 감정을 담아 말을 한 것뿐이다. 잘못된 것을 보고서, 부조리한 것을 보고서 욕을 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슴 뜨거운 사람의 특권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키팅은 단순히 욕을 한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말은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하고, 행동은 말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言行一致, 行言一到). 그래서 키팅은 학생들에게 “서문을 모조리 찢어버리라”는 아주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만해도 교과서에 낙서를 한다거나, 교과서를 비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었다. ‘교과서=진리’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익히고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하니 교과서를 찢는다는 건, 매우 불경스러운, 그래서 양심의 가책까지 느껴지는 일이었던 것이다. 내가 학교 다닐 때도 그랬는데 1950년대가 배경인 이 학교의 학생들에게 키팅의 말은 장난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머뭇거렸고, 달튼이 먼저 행동하기 전까진 누구 하나 찢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쯤 되면 왜 키팅은 그 내용을 찢으라고 할 수밖에 없었는지 궁금해진다. ‘단순히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기에 그런 것일까? 그게 학생들에겐 전혀 유용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인가? 왜 가치를 측정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걸까?’라는 온갖 의문이 따른다.
우린 어떤 것이든 하나의 잣대로 재는 것에 너무도 익숙하다. 물론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평가해야 하고 선별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무조건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정량적인 평가가 불가능한 영역까지도 서슴없이 하나의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해 버리니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인성, 성숙, 문학작품의 가치, 예술의 가치와 같이 추상적인 부분들 말이다. 평가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부분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고 그게 절대적인 평가치인 양 떠들고 있으니 문제가 된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평가는 평가로 끝나는 게 아니라, 획일화 된다는 점이다. 좋은 평가를 받은 것과 나쁜 평가를 받은 것 사이엔 위계가 생기며, 그만한 영향력이 생긴다. 그러니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좋은 것’, ‘옳은 것’, ‘제대로 된 것’으로 인정되고, 나쁜 평가를 받은 것은 ‘나쁜 것’, ‘그른 것’, ‘잘못된 것’으로 낙인찍힌다. 그러니 누구 할 것 없이 좋은 평가를 받도록 그 기준에 따라 갈 수밖에 없다.
친구에게 미대 입시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미대 입시는 각 대학이 원하는 양식으로 최적화 하여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펜의 사용법부터 굵기, 기울기까지 완벽하게 복사하는 수준으로 그릴 수 있어야 한단다. 반복 연습만이 살 길이고, 하나의 기준에 나를 최대한 일치시키는 게 관건이란다. 그런데 문제는 미대에 들어가고 나선 독창적인 작품 활동을 해야 하니, 이때 난관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여태껏 나의 개성을 죽이고 하나의 기준에만 맞춰왔는데 이젠 개성을 다시 살리라고 하니 까무러칠 노릇이라는 얘기다.
이처럼 획일화란 나를 죽이고 외부의 가치 기준을 받아들여 나를 재편성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는 누가 써도 똑같아지고, 그림은 누가 그려도 똑같아지며, 내 자신이 아닌 남의 욕망을 대변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런 문제를 알기에 키팅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나를 옥죄어 오는 쓰레기들을 과감하게 찢어 버려라’고 주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야만 카르페디엠의 삶을 살 수 있고 독특한 삶을 살 수 있다.
학생들은 쭈뼛거리다가 결국 서문을 뜯기 시작한다. 그 장면은 마치 하나의 카니발 같은 느낌이었다. 학생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기존의 체제에 균열을 내기라도 하듯 과감하게 서문을 찢어버렸다. 이때는 누구 할 것 없이 자신의 욕망에 가장 충실하며 그 순간의 기쁨을 만끽했다.
기쁨의 들뜬 학생들 사이로 키팅은 파고 들어가 ‘진정한 시의 이해’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시가 아름다워서 읽고 쓰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를 읽고 쓰는 것이다. (중략)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바로 너 자신이 시가 된다’는 내용을 지닌 휘트만의 시를 인용하며 마무리 짓는다. 그 순간 닐과 토드의 얼굴엔 무언가 강렬한 깨달음이 온 것 같은 의미심장한 표정이 어린다.
서문의 ‘시의 이해’는 어디까지나 시를 어떻게 분석하고 평가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었다면, 키팅의 ‘시의 이해’는 너 자신이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이때 키팅은 교탁에서 내려와 책상 주위에 쭈그려 앉아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건 수업을 한다기보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키팅이 말한 ‘시의 이해’를 신영복 선생의 언어로 풀면, “시는 세계를 인식하고 재현하는 상투적인 방식을 전복하고, 상투적인 언어를 전복하고, 상투적인 사유를 전복하고, 가능하다면 세계를 전복하는 것, 이것이 시인의 카타콤이며 그 조직 강령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담론』, 26쪽)”이라 할 수 있다. 키팅이 말하는 시의 정의와 신영복 선생이 말하는 시의 정의는 깊은 곳에서 일맥상통한다.
두 번째 수업은 더욱 더 시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줬다. 그리고 시라는 게 결코 나 자신과 동떨어진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닌 내가 한껏 녹아난 세계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두 번의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이건 뭐지?’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이 선생 왠지 끌리는데’라는 호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클리나멘의 우연한 마주침이 우주 생성의 단초가 되었듯, 키팅과의 마주침은 지금껏 억눌러 왔던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했으며 카르페디엠의 삶이 무엇인지 받아들이도록 했다. 과연 이런 마주침은 어떻게 전개될까?
이번 후기에선 두 번째 수업만 다루다가 끝나 버렸다. 이런 식으로 쓰다 보면 앞으로 십 편 가까운 후기가 써질 수밖에 없기에, 다음 편에선 키팅의 남다른 수업들을 짧게 짧게 훑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