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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Aug 07. 2016

교탁에 올라서라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다 5

존 키팅 선생과의 두 번의 수업은 학생들에게 충격과 깨달음이란 이상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여태껏 학생들은 수많은 교사들을 만났지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걸 우린 ‘파격’이라 표현할 수 있다.                



▲ 격은 어느 순간까진 필요하지만, 그 이후엔 과감하게 깰 수 있어야 한다.




틀이 필요한 순간 틀을 깨야할 순간 

    

파격破格은 ‘격(틀)을 깬다’는 말이다. 틀은 무언가를 하기 위해 최적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년 전에 수영을 배웠는데, 그 때 강사가 가장 중시하는 게 영법에 따라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자유영을 할 때 최대한 팔을 큰 원을 그리듯 휘둘러 몸이 물과 수평이 되도록 해야 하고, 그럴 땐 숨을 크게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당연히 그 동작에 맞춰 연습을 하지만, 오래 수영을 한 사람들을 보면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은 오히려 너무도 자연스럽게 팔을 자신이 편한 방식으로 휘두르며 숨도 자신이 쉬고 싶을 때 쉬니 말이다. 

이처럼 틀은 무언가를 처음 시작할 때 필요하다. 몸이 물이란 환경에 익숙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던 근육을 사용하며, 새로운 호흡법까지 하려니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물 먹기 십상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일수록 가르쳐 준 대로 최대한 똑같이 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기초부터 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몸은 물에 익숙해져 가고, 물속에서의 호흡이 자연스러워진다. 그게 바로 물이란 특수 환경에 익숙해져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 초보일 땐 가르쳐 주는 대로 따라해야 한다. 이 때 꾀를 피워선 안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더 이상 그 틀에 갇혀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는 물을 힘으로 거스르고 인위적인 힘으로 헤쳐 나가는 과정이었다면, 익숙해진 그 순간부턴 물의 흐름을 타고 부력의 힘을 이용하여 몸에서 힘을 빼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수영법이란 틀을 깨버릴 수 있을 때, 물과 완전히 일체(물아일체??)가 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 땐 더 이상 가르쳐준 것을 벗어버리고 물속에서 자연스럽게 노닐면 된다. 물론 난 겨우 두 달만 다닌 것이기에, 기초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는 건 안 비밀~

여기저기서 배운 틀이 나 자신을 한정 짓고, 틀 짓는다.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에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틀은 깨어질 때에야 비로소 나 자신을 지탱하던 게 아니라, 나 자신의 가능성을 구속하고 한계 짓는 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키팅의 수업들은 바로 틀에 갇혀 자신의 가능성을 점차 잃어가던 학생들에게, 틀을 깰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어떤 삶이 펼쳐지는지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 기본 동작이 자유자재로 되는 순간이 되면, 더 이상 틀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익히는 가 아닌즐기는  

    

키팅의 세 번째 수업은 한층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두 번의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이 교사는 뭔가 남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주며 한결 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닐은 키팅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키팅의 졸업앨범을 찾게 된 것이다. 그 앨범엔 ‘Dead Poets Society’라는 설명이 쓰여 있었고,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한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키팅을 찾아가 설명을 들었다. 그건 학생들이 함께 모여 시 낭독을 하던 비공식 동아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학생들도 키팅처럼 밤마다 일탈의 짜릿함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맘껏 내뱉을 수 있는 시의 상쾌함을 맛보며 키팅에 대해 친근감을 더욱 더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세 번째 수업은 긴장보단 즐거움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 존 키팅의 졸업 앨범 사진을 찾아 본 학생들. 그만큼 많이 궁금한 사람이 되었다.



키팅은 학생들과 시를 이야기한다. 나 또한 학교를 다닐 때 시는 어렵고 난해하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끔찍이도 싫어하던 과목이었듯이, 이 학교의 학생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나 보다. 하긴 시험을 보기 위해, 정답을 맞히기 위해 시를 배우고 있으니, 키팅이 “오늘 우리는 세익스피어의 시를 배우도록 하겠다”라고 했을 때, 끔찍한 표정을 짓는 건 당연했다. 이럴 때 우린 농담조로 ‘XXX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이런 공부는 안 해도 됐을 텐데’라고 말하듯, 그들 또한 이렇게 죽도록 공부하게 만든 원흉(?)인 세익스피어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키팅 또한 그런 학생 시절을 겪으며 이 자리에 섰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잘 아는지, 위로를 해준다. 그러면서 세익스피어의 시를 곳곳에 섞으며 상황극을 해준다. 어찌 보면 시라고 규정지었기 때문에 어려운 것처럼 느껴질 뿐, 그게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일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렇게까지 어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시란 무언가 특별한 것이 아닌, 일상의 말’이란 것을 느끼게 되었다.                



▲ 익혀야 할 것으로 시를 접하면 힘겹지만, 궁금한 것으로 시를 접하면 달라진다.




다른 시각으로자기 자신 안에 억압된 영감으로 세상을 대하라

     

그러면서 갑자기 키팅은 교탁에 올라간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교탁을 밟고 올라설 것은 주문한다. 역시나 꽤나 황당한 장면이다. 과연 현재 한국에서 학생들이 교탁에 올라간다면, 교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교사가 올라가라고 해서 올라갔다 해도 그걸 본 다른 교사들은 그 교사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더욱이 지금처럼 교탁이 최신 기자재로 바뀐 상황에선 더더욱 이와 같은 광경은 힘들 수밖에 없다. 



▲ 교탁에 올라선 키팅. 학생들도 '저 선생이 왜 저러나?' 의아했을 것이다.



키팅이 그와 같이 도발적(?)인 행동을 하도록 한 데엔,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깨우침’을 주기 위해서였다. 원뿔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걸 정면에서만 본 사람은 당연히 삼각형이라 우길 테고, 밑면에서만 본 사람은 원이라고 소리칠 것이다. 두 사람은 자신이 본 것만이 진실이라며 상대방을 깎아내리지만, 실상 두 사람 사이에선 해답이 나올 수가 없다. 이런 상황을 일러 ‘장님 코끼리 더듬기’라고 한다. 이럴 땐 문제에만 함몰되지 않고 그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전체를 본 사람만이 ‘원이지만 삼각형일 수 있다’고 판단해줄 수 있다. 어찌 보면 사물의 한 면만을 보고 그걸 주장할 때 착각과 오류에 빠지게 된다. 



▲ 원뿔은 원인가? 삼각형인가? 이걸 따지는 것 또한 부질없는 짓이다. 원이면서 삼각형이니 말이다. 관점이 달라지면 다른 걸 볼 수 있다.



바로 그와 같은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늘 보아오던 시점이 아닌 다른 시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걸 우치다 쌤은 ‘조감적 시좌의 높이로 이륙하는 것’이라 말했고 키팅은 교탁에 오르는 행위로 보여준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부름을 받고 그 사람이 하고 있는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이 ‘물듦’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가치 판단의 잣대로는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잣대를 애지중지 끌어안고 있는 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지식을 쌓거나 기술을 익힐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자격증도 딸 수 있겠죠. 하지만 자기 안에 그런 것들을 아무리 많이 집어넣어도 조감적 시좌의 높이로 이륙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울타리를 수평으로 확대하는 것일 뿐입니다. 

-『교사를 춤추게 하라』, 우치다 타츠루, 민들레출판사, 2011년, pp 59   


       

시좌가 확보되면 지금까진 보지 못했거나, 보았어도 ‘설마’라고 인정하지 않았던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제야 지금껏 당연시하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며, ‘전혀 다른 것이 실은 똑같은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 시야가 달라지면, 안 보이던 게 보인다.



전주에 있을 땐 모악산에 자주 올랐다. 힘들게 올라가지만 조금씩 시야가 넓혀지며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게 된다는 느낌이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모악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전주의 풍경은 과히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산에 올라 원시안으로 널찍하게 펼쳐진 대지를 보고 있노라면 ‘참 별 것 아닌 것들을 별 것으로 여기며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야가 달라지면 삶이 달리 보이고, 현실이 더 이상 비극적으로만 보이지 않게 된다. 바로 그와 같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넓게 세상을 보고 삶을 관조하기 위해서 무작정 산에 올랐던 것이다. 



▲ 모악산 정상에서 본 전주의 모습. 광활하다. 그리고 시야가 바뀌니, 마음도 넓어진다.



이처럼 키팅의 권유대로 교탁에 올라본 학생들은 잠시나마 달라진 시야를 통해 공간에 갇혀, 성공 신화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고, 그게 얼마나 답답하고 힘겨운 삶인지 알았을 것이다.                



▲ 올라야 하는 이유는 남의 시선으로만 보지 말고, 자신의 시선으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를 욕망할수록갈등은 커져 간다

     

키팅은 수업 시간을 통해 끊임없이 금기에 맞서고, 틀을 박차며, 나 자신이 갇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키팅의 수업 시간이 기다려 질 수밖에 없고, 다른 교사들은 그런 키팅의 독단적인 수업이 눈엣 가시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학생들이 점차 자신의 욕망에 눈을 뜨고, 그걸 점차 추구하게 되면서 ‘학생과 학부모 사이’, ‘학생-학교의 규율 사이’, ‘키팅-학부모&교장 사이’엔 갈등이 커져만 간다. 

다음 후기에선 키팅의 남다른 수업 시간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고, 학생들이 그런 수업을 통해 점차 어떻게 변해갔고 어떻게 ‘카르페디엠의 삶’을 살게 됐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 학생들은 키팅처럼 일탈을 즐기며, 욕망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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