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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Aug 08. 2016

욕망의 수업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다 6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다 5

우리가 학창 시절에 자주 들었던 말이자,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말은 “지금은 참아라. 대학에 가면 그땐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으니”라는 말이었다.                



▲ 서양과 동양이 자식 교육에 있어서는 완벽하게 하나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




지금은 참아라나중에 원하는 건 다할 수 있다  

   

이 말은 현재 하고자 하는 수많은 것들을 가로막고 오로지 공부만을 강요할 때 쓰이며, 여기에 대해 누구도 함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게 한다. 학생이라면 누구나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것’이기에, 그것 외에 다른 것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이런 현실에 머물다 보니 자연히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사라져 갔고, 으레껏 해야 할 것들만 남게 되었다. 

이럴 때 헛갈리는 건 ‘과연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하는 점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를 욕망하면 욕망할수록 갈등만 키운다’는 인상이 짙게 남게 된다. 그런다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거나 가족 구성원에게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이 아님에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욕심’이자, ‘철없는 행동’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그런 말을 듣기도 전에 알아서 박박 기며, 나의 욕망들을 거세해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닐은 편집장의 일을 하고 싶었는데, 아빠가 가로 막았다. 그러면서 그런 욕망 자체를 원천 봉쇄한다.




지금은 참지 말고 욕망하라

     

그렇게 우리는 어른의 세계에, 일상의 세계에, 당연의 세계에, 물론의 세계에 길들여져 갔다. 길들여지는 시간이 길어지고 보니, 처음엔 ‘내 의지론 어쩔 수 없어서 어른의 말을 따른다’고 생각되던 게, 어느 순간엔 ‘누가 강요하지 않았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라고 생각되게 되었다. 어색하고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던 게 점차 당연해지고 익숙해지게 되었고, 그렇게 나를 옭아매어 답답하게 느껴지던 것들이 어느 순간엔 편안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불편함이 당연함으로 바뀌어 가는 동안, 무지개 너머에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Somewhere Over The Rainbow)가 있다고 믿으며 미소를 짓거나, 크리스마스의 산타클로스를 떠올리며 함박웃음을 짓던 사람은 사라져 버렸다. 이젠 그저 현실의 칙칙함에 희노애락조차 느끼지 않는 무표정한 사람만이 남게 된 것이다. 아마 우리가 『죽은 시인의 사회』란 영화에서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볼 때 보게 되는 표정이야말로 이 표정이라 할 수 있다. 



▲ 무지개 너머를 그리는 건, 감성적이어서가 아니다. 그런 희망조차 갖지 못하면 죽음의 그림자가 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교실에 앉아 있을 땐 한껏 억눌려 있어 표정도 매우 어둡지만, 그들이 교실을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찾아 라디오 수신기를 만들어 대중가요를 들으려고 노력할 때,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 자전거를 타고 학교문을 나설 때, 자신의 재능을 알고서 연극무대에 오르려 할 때, 밤마다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와 일탈의 스릴을 맛볼 때 그들의 표정은 살아나고 천진난만해진다. 흡사 아이들이 세상을 보며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연신 웃어 재낄 때의 그런 해맑음 같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건 곧 그들은 아직까지 가슴 깊은 곳엔 억눌리지 않고 눈치 보지 않으며, 낭만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그들은 비밀 동아리의 회합장소에 있을 때 어느 누구보다도 밝고 활기차다.



그런 그들에게 키팅은 ‘지금은 참아라’라고 말하지 않고, ‘지금 욕망하라’고 말하는 유일한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서서히 잃어가고 있던 낭만적인 시선, 이상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활활 타오르게 만들어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과연 그들에게 키팅은 달콤한 속삭임을 주는 나쁜 존재일까? 자신들의 본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존재일까?               



▲ 키팅의 말은 달콤하면서도 무언가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한다.




나를 표현하라

     

키팅의 네 번째 수업 시간은 야외에서 진행되었다. 키팅은 공을 가득 담은 그물망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엔 ‘시구가 적힌 쪽지’를 쥐고 학생들과 운동장을 걸어간다. 한 가운데에 도착하자 키팅은 학생들에게 시구 하나씩을 나눠주고 그들을 일렬로 서게 한다. 학생들은 자신이 받은 시구를 크게 읽은 후에 그 감정을 담아 공을 발로 차는 것이다. 



▲ 공을 찬다는 건, 나에게 달라 붙어 있는 불안, 공포, 후회의 온갖 감정을 날려 버린다는 의미가 있다



학생들이 시구를 읽고 공을 찰 때 키팅은 휴대용 턴테이블로 음악을 튼다. 음악을 튼 이유는 리듬에 맞춰 시를 좀 더 리드미컬하게 낭독하기 위해서이며, 작게 웅얼거리는 학생의 경우 음악 소리에 낭독 소리가 묻히기에 크게 낭독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학생들이 낭독하는 시구를 살펴보면 “승산 없는 싸움에 도전, 겁 없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세계의 모든 항구를 구경할 선원이 되기 위하여”, “오, 난 인생의 노예가 아닌 지배자가 되기 위해 산다”, “춤추고 손뼉 치며, 기쁘고 뛰고 소리치고 떠다니기 위하여”라는 내용으로 도전의식을 고취하고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 휴대용 턴테이블로 음악을 틀었다.



이 수업 자체가 학생들의 자신감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시구의 내용이 이미 학생들에겐 자신의 가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고, 공을 차는 행위는 떼쳐 버리고 싶은 부모의 잔소리, 금기와 같은 것들을 차버린다는 시원함을 느끼도록 해준다. 그래서 바로 이 수업 장면 뒤엔 닐이 그토록 하고 싶던 연극의 주연에 발탁되어 기쁨을 만끽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닐이야말로 키팅 수업의 가장 큰 수혜자이자, 키팅의 교육관에 적극적으로 공명하는 학생임을 알 수 있다.                



▲ 닐은 아버지가 연극하는 걸 반대할 걸 알면서도 주연을 맡고 말았다. 카르페디엠을 최전선에서 실천하다




나에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닐과 룸메이트인 토드는 소위 잘 나가는 형의 후광에 가려져 존재감이 거의 없는 학생이다. 그러다 보니 말수도 적고 숫기도 없다. 그래서 닐이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비밀 동아리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을 때, 처음엔 거부부터 했던 것이다. 그 모임에선 시를 낭송해야 하는데, 토드는 남들 앞에서 시를 낭송할 자신이 없었기에 참여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자 닐은 그런 토드의 상황을 알게 됐고 낭송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하며 토드를 참석하게 했다. 



▲ 입학식 때의 도드. 한껏 주눅 들어 있고, 그로 인해 말수도 적다. 닐과 룸메이트가 되면서 표정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다섯 번째 수업은 바로 학생들의 자작시를 교단 앞에 서서 읽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수업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시작 실력이 형편없다는 게 들통날까봐 전전긍긍하게 마련인데, 토드는 그것보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한다는 게 문제였던 거다. 그래서 최대한 이런 수업에는 끼고 싶지 않았고 도망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토드의 사정을 키팅은 전혀 봐줄 생각이 없다. 토드를 지명했지만, 토드는 시를 써오지 않았다며 한 걸음 물러선다. 아마도 토드의 입장에선 키팅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짜증이 났을 것이다. 그러자 키팅은 「나는 야성을 지르노라, 이 세상의 지붕에서」라는 휘트먼의 시를 인용하며 토드에게 야성을 지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소심한 학생에게, 발표 울렁증이 있는 학생에게 이런 식의 수업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하면 영영 발표를 혐오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신중해야만 한다. 과연 키팅은 어떤 방법을 쓸까? 꽉 억눌려 있는 토드는 이걸 어떻게 해낼까?               



▲ 토드 안에 잠재된 야성을 깨우려 맘 먹은 키팅. 과연 어떻게 할까?




보이지 않는 벽을 넘어서면 대로가 된다

     

키팅은 야성을 지르도록 하지만, 토드는 이 순간이 매우 낯설고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니 거의 죽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Yawp’이라 외칠 뿐이다. 잘 들리지도 않고 그 소리를 한 당사자도 어색해서 죽을 지경이다. 그런 토드에게 키팅은 더 크게 외치도록 세 번이나 기회를 주고, 토드는 반복되는 테스트에 화가 나서 결국 화난 투로 ‘Yawp’을 외치고 만다. 



▲ 얍을 외치지만, 스스로도 자신이 없고 어색하기만 하다.



그러나 키팅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칠판 위에 걸려 있는 휘트먼의 사진을 보게 한 후 소감을 날 것 그대로 말하게 한다. 그러자 토드는 “정신 나간 미친 사람”, “땀에 젖어 이를 드러낸 사람”이라 거침없이 말한다. 평소 같았으면 토드에게 절대로 들을 수 없는 말이었을 테지만, 이 순간 토드는 평상시와는 다르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키팅은 토드의 눈을 감게 하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가감 없이 풀어내도록 독려한다. 눈을 감으면 세상은 사라지고 나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들은 무너져 내린다. 그때 무언지 모르는 홀가분한 기분을 느낄 수 있고 무엇이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토드는 언제 그랬냐 싶게 그 순간만은 아무 제약도, 아무 염치도 없이 그저 말이 흘러나오는 대로 뱉을 수 있었다. 나를 가로막고 있던 벽이 무너지면, 그건 대로가 되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 토드에게 이 시간은 정말 힘든 시간이었을 거다. 하지만 키팅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잘 참고 해나가고 있다. 박수가 절로 난다.



말이란 대화 상대에 따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하게 되기도, 한 마디도 뱉기 어렵게 되기도 한다. 특히나 수업 시간에 하는 말들은 친구들에게 무시를 당할 수도 있고, 무언가 그럴 듯하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더욱 더 말하기가 힘들다. 이럴 때 평가의 잣대가 아닌, 이야기한다는 생각으로 말을 하게 한다면, 일정 부분 ‘말을 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각을 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키팅은 수업시간이란 한계가 토드를 짓누르지 않도록 눈을 감고 떠오르는 생각을 편안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 수업을 잘 기억해”라고 말했는데, 그건 ‘말을 한다는 게 너가 여태껏 느껴왔듯 그렇게 부담스럽거나 힘든 일은 아니란 걸 기억해’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 벽을 넘으며 한껏 밝아진 표정이 보인다.




공동체를 지향하되획일화를 거부하라

     

키팅의 수업은 각 시간들이 나름의 의미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번 수업 시간엔 학생들을 밖에 모이게 하여 일렬로 세우고 원을 그리며 돌게 했다. 처음에 걷기 시작했을 땐 각자의 템포에 맞춰 걸으니, 속도도 맞지 않아 뒤죽박죽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조금 시간이 지나자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속도가 맞고 심지어 발까지 맞춰졌다. 이런 상황을 보면 누군가는 ‘학생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은 결과’라며 흡족한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처럼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공동체 마인드를 볼 수조차 없는 시대엔 제식훈련을 하듯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좋아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속도가 맞고 발이 맞기 시작했다.



이걸 보고 키팅은 “처음에는 각자 제멋대로 걷기 시작했다. 핏츠군은 시간이 좀 걸렸지만 결국 발을 맞췄다. 카메론은 마음속으로 ‘내가 맞는 것일까? 아마 맞겠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오버스트릿트군은 어떤 힘에 의해 이끌렸다. 그래. 우린 그걸 안다. 난 누굴 조롱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다. 일체감의 중요성을 보여주려고 온 거다. 즉,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는 어렵다. 여러분 중, 나라면 다르게 걸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에게 대답하라. 왜 나도 손뼉을 쳤지?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신념의 독특함을 믿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이상하다고 보든, 나쁘다고 생각하든. 로버트 프로스트는 말하길 ‘숲속의 두 갈래 길에서 난 왕래가 작은 길을 택했고 그게 날 다르게 만들었다’고 했다. 이제부터 여러분도 나름대로 걷도록 해라. 방향과 방법은 여러분이 마음대로 선택해라. 그것이 자랑스럽던, 바보 같던. 자, 걸어 보아라.”라고 말한다. 



▲ 그래서 자신의 보폭에 맞춰, 걸음걸이에 맞춰 걸어보라고 한다.



학교라는 곳은 언제나 공동체 의식을 강조했다. 나 혼자만 사는 곳이 아니니, 타인을 생각하며 나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고, 국가를 위해 개인은 목숨을 바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한 사람만 잘못해도 연대 책임을 물어 전체가 벌을 받는 게 당연했고, 나의 신념보단 다수의 이익을 견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배워왔다. 그렇게 세뇌 당하듯 배워온 것들이 오늘 같이 길을 걷는 순간에도 맞춰 걷도록 만든 것이다. 이건 타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면서 나의 행동을 맞추려 애쓴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나의 걸음걸이, 걸음 속도, 보폭 등은 모두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것에 맞추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타심을 지니는 공동체 의식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처럼 동작이 맞아 떨어져야 하고, 생각의 독특함까지 거세하면서 맞추는 것을 공동체 의식이라며 칭송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공동체란 미명의 획일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키팅은 바로 이번 수업을 통해 ‘공동체 의식’과 ‘획일화’는 닮은 듯 다르다는 것을, 그럴 때 어떻게 자신의 가치를 보존하고 지켜갈 것인지에 대해 알려줬다고 할 수 있다.                



▲ 지금 획일화의 최전선은 성형이라 할 수 있다. 더욱더 자신다움을 고집하고 찾기는 힘든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키팅살아 있는 수업을 하다

     

키팅의 수업이 모두 완벽하다곤 할 수 없다. 단지 우리도 알게 모르게 당연시 해왔던 것들을 전복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저런 걸 수업이라 할 수 있나?’라는 판단에 균열을 낼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주의 깊게 보는 것이다. 

야외 수업을 하며 걸음걸이에도 획일화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던 바로 그 때 교장 선생은 키팅의 수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팅의 수업은 어찌 보면 기존의 수업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독특하면서도 전혀 공부답지 않은 수업이었기에 교장의 눈에는 안 좋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키팅의 교육방법과 학교의 교육방법의 차이는 갈등을 낳고 결국 그건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좋은 빌미가 된다. 갈등이 어떻게 커지며, 그게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지금까진 키팅의 수업방법에 대해 알아봤으니, 다음 후기에선 그런 키팅의 수업으로 학생들이 어떻게 받아들였고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 키팅의 수업을 못마땅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는 교장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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