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빵 Aug 09. 2016

우정의 교육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다 7

앞에서 쓴 6편의 후기를 통해 영화에 묘사된 학교가 현재의 한국 학교와 얼마나 비슷한지, 그 와중에서도 키팅 선생의 수업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수업인지 살펴봤다.                



▲ 키팅의 수업은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에겐 하나의 좋은 소스가 된다.




교육은 대화다  

   

하지만 아무리 한 교사의 교육철학이 탁월하고 교수방법이 좋다 할지라도, 그게 학생들에게 가 닿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교육은 교사만의 것도, 학생만의 것도 아닌, 쌍방의 유기적인 흐름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교육은 대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쌍방의 주고 받음과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대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대화란 두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생각에 변화가 생겨야 한다. 만약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이야기를 나누기 전과 나눈 후에 생각의 차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그건 대화를 했다기보다 두 사람이 긴 시간동안 독백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2012년에 이왕주 교수와 이야기를 나눴을 때, “상대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면 나의 위치가 조금 옮겨집니다. 그건 어떤 식으로든 나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죠. 그 상태에서 나 또한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던집니다. 그러면 상대방 또한 어떤 감각적인 위치가 옮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위치가 옮겨지고 옮겨지다 서로 가까운 거리에 멈추든 먼 거리에 멈추든 멈추게 됩니다. 그게 바로 소통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위치가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그건 소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죠.”라는 말을 해줬는데, 이 말이야말로 대화의 속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우리 사회는 대화에 인색한 사회라 할 수 있다. 수많은 말들이 오고 가지만, 지시나 혼잣말만이 횡행할 뿐 대화는 거의 찾아보기 힘드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도 은연중에 독백이나 지시를 하면서 ‘대화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착각은 혼자만의 수업을 하면서도 ‘학생들과 소통하는 수업을 하고 있다’는 착각으로 이어진다.               



▲ 2012년 이왕주 교수와의 대화는 소통과 배움에 대한 상식을 깨게 했다.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변해간다

     

이처럼 수업이 대화와 같다면, 짧게는 한 학기에서 길게는 일 년의 수업을 마치고 난 후에 교사와 학생의 감각적인 위치가 옮겨져야만 한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고 학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가르치고 배우는 역동의 장에서 함께 했기에 교사의 감각적인 위치도 옮겨지며, 학생도 감각적인 위치도 옮겨진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어느 정도의 위치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 함께 했기에 두 존재 사이엔 변화가 존재한다.



이런 가르침과 배움의 역동성을 이미 동양사회에선 예전부터 포착하고 있었나 보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맛 좋은 음식이 있더라도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지 못하고, 비록 엄청난 지혜가 있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좋음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배운 후에야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되고, 가르쳐본 후에야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 

부족함을 알아야 스스로 돌아볼 수 있고, 어렵다는 걸 알아야 스스로 보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한다’고 말한 것이다. 『열명』에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 반반이다”고 했는데,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雖有佳肴, 不食不知其旨也. 雖有至道, 不學不知其善也. 是故學然後知不足, 敎然後知困. 知不足然後能自反也. 知困然後能自强也. 故曰敎學相長也. 說命曰, 斅學半, 其此之謂乎. 

-『禮記』, 「學記」


                

원문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가르침과 배움을 인위적으로 나누지 않고 ‘가르침=배움’이라는 역동적인 과정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배우는 사람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가르치는 이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어 서로 성장해나간다는 것이다. 성장이란 위에서부터 쭉 말했다시피 ‘감각적인 위치에 변화가 생긴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알려주거나,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함께 변해가고 함께 깨우쳐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그건 곧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던 명장면.



지금까지의 『죽은 시인의 사회』 후기는 키팅 선생의 탁월한 교육관에 중점을 두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 방식이 학생의 감각적인 위치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으면, 아니 학생과 함께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후기부터는 키팅과 학생이 어떻게 공명했는지, 어떤 감각적인 변화가 있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모든 학생을 다루기보다, 한껏 주눅 들어 있는 토드 앤더슨와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 자신이 하고 싶던 일을 접어야 했던 닐 페리와 남자 친구가 있는 크리스를 짝사랑하는 녹스 오버스트리트, 세 명의 학생을 중심으로 다루기로 하겠다.               






사람의 변화는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토드는 6번째 후기에서도 잠시 살펴봤다시피 형의 후광에 짓눌려 자기표현도 잘 하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그런 학생이 키팅의 수업을 받으면서, 친구들이 조직한 ‘죽은 시인의 사회’에 들어가면서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한 가지 확실히 하고 가야할 점은 토드의 변화는 결코 외부의 자극 때문만이 아니라, 그걸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불편한 순간들을 감내하면서 스스로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즉, 모든 변화는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처럼 외부의 조건과 내부의 노력이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성어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변했다’는 설명은 사람의 변화를 가장 저급하면서도, 손쉽게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러니 보통 자식에게 큰 문제가 생겼을 때 부모는 “내 자식은 전혀 문제도 없고, 순진했는데, 나쁜 친구들 때문에 그런 거예요”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건 자식을 전혀 알려 하지 않고, 그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말일 뿐임에도 말이다. ‘자식이 하필 그런 친구들을 사귈 수밖에 없었는지?’를 물을 수 있다면, 그런 변화는 결코 외부의 강제가 아닌 자식 스스로 그걸 원했고 그런 방향으로 자신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토드의 변화를 볼 때에도 당연히 이런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 쇠귀님의 글씨. 가슴 뭉클하다.




토드거세된 욕망을 폭발시키다

     

토드의 형은 이미 이 학교를 졸업하고 일류대학까지 입학한 수재다. 그 형의 후광이 짙게 드리워진 이 학교에 입학한 셈이니, 토드는 나름 형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보다 그저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맞춰 살 수밖에 없었다. 

부모 또한 그런 토드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은 없다. 단지 형이 밟았던 루트를 잘 따라가기만을 바란다. 부모가 토드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는, 그의 생일 선물에서 여지없이 폭로된다. 생일 선물은 필기도구 세트인데, 그건 무려 작년에도 똑같이 받았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선물을 받고 토드는 ‘내년에도 똑같은 것을 받게 될 거야’라는 사실을 직감했고, 그만큼 자신에겐 관심조차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시무룩해진 채 학교로 들어가는 호수의 다리에 앉아 있게 된 것이다. 



▲ 씁쓸한 마음 때문에 다리에 앉아 있는 토드와 말을 거는 닐.



그런데 이 장면, 왠지 낯설지가 않다. 최근에 천만 관객을 동원한 『부산행』이란 영화에서도 석우는 딸 수인이의 생일에 게임기를 선물했는데, 그 선물은 어린이날에도 똑같이 사줬던 것이니 말이다. ‘똑같은 선물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다’는 메타포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무관심’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모습을 본 룸메이트인 닐은 가만히 다리에 앉아 있는 토드를 보고 가까이 다가갔고 자초지종을 들은 후에야 ‘기분이 매우 나쁜 상황’임을 알게 된다. 과연 이 때 닐은 토드를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을까? 일반적인 방식은 ‘부모님의 마음은 그게 아닐 테니, 이해해’라는 걸 테다. 그러니 이번엔 그 필기도구를 쓰고 내년 생일엔 미리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하라고 조언을 해주는 거다.. 



▲ 이미 받은 선물을 다시 받고, 못마땅해 하는 딸과 그 상황을 모른 아빠의 모습이 대비된다.



이런 방식이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방식(?)인데, 닐은 그럴 맘이 전혀 없다. 오히려 그 선물이 토드를 괴롭게 만들었다면, 과감히 버리면 된다고 알려준 것이다. “이 선물은 공기역학적이어서 날고 싶어해”라는 말을 꺼내며, 괴로워하지 말고 버리라는 것이다. 아마 예전의 토드였다면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꽤나 반감을 가질 테고, 미처 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토드는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동아리의 일원으로 일탈을 경험했고, 키팅 선생의 ‘야성을 지르는 수업’을 통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법을 알게 됐다. 그러니 닐의 말을 듣자마자 미련 없이 선물을 강에 날려버릴 수가 있었고, 언제 무거운 표정을 지었냐 싶게 한껏 밝아진 표정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선물을 버리며, 즐거워하고 있는 토드와 그를 지켜보는 닐.



이런 식의 위로 방법은 『응답하라 1988』에서 나오는 방법과 동일하다. 바둑 천재 택이는 연패를 당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런 택이의 모습을 봐야 하는 어른들은 “얼마나 힘들겠냐?”, “때론 질 수도 있는 거야”라며 일반적인 방식으로 위로를 하지만, 택이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이 때 친구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위로를 한다. 택이를 보자마자 “어휴~ 너 완전 깨졌다며. 동네 챙피해서 어디 다니겠냐?”, “택이 졌다며, 에라이~”, “너 발렸다며, 에휴~ 너 그래. 이 때쯤 한 번 발릴 때도 됐어”, “야 지금 웃을 때냐 차라리 욕을 해 욕을~ 이런 X발~ X 같네”이라는 말을 하며 애써 태연한 척, 괜찮은 척할 게 아니라,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폭발시켜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도와줬다. 그러니 택이는 처음엔 친구들의 말에 불쾌했지만, 욕을 함께 하며 찐한 위로를 받게 됐다. 도덕 교과서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닌, 때론 욕을 함께 해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토드에겐 닐이, 택이에겐 쌍문동 친구들이 ‘욕을 함께 할 수 있는 존재’라 할 수 있었다.                 



▲ 때론 함께 욕해줄 수 있는 친구,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도록 해주는 친구가 더 필요할 때가 있다.




토드감정에 충실한 화신이 되다

     

토드의 변화는 두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첫 장면은 닐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전해들은 뒤에 토드가 반응을 보이는 장면이다. 당연히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였던 친구의 죽음을 전해 들었기에 깊은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슬픔을 절제하며 표현하지 않는데 반해, 토드는 온 몸으로 표현하며 “(닐의) 아버지 때문이야”라고 설움 가득한 목소리 외치며 눈밭을 뒹군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된 이후부터 토드는 어찌 보면 슬픔, 분노, 기쁨 무엇 하나 할 것 없이 가장 잘 표현하는 사람이 되었다. 



▲ 울부짖으며 맘껏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토드.



두 번째 장면은 닐의 자살이 키팅 때문이라고 결론이 났고 키팅이 학교를 떠날 때의 장면이다. 키팅은 정든 교실에서 짐을 챙기고 나가려 하고 학생들은 교장 선생이 진행하는 수업을 듣고 있다. 교장 선생의 억압은 상상 이상이고 원래 수업 중엔 개인적인 말을 할 수 없기에 누구 하나 키팅을 힐끔힐끔 보지만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때 토드는 할까 말까 고민 고민하다가 결국 일어나 “키팅 선생님! 그들이 우리더러 (당신이 문제의 원인이다라고) 서명하라고 시킨 거예요!”라고 말하며 억울하게 당한 키팅 선생에게 과감하게 말을 건넨다. 당연히 그걸 보고 있는 교장 선생은 “소리치면 퇴학시켜버리겠다”고 윽박지르며 제지한다. 



▲ 키팅을 그냥 보낼 수 없었던 토드는 용기를 내어 말을 한다.



여기까지 한 것만으로도 토드는 엄청난 일을 한 것이다. 감정에 충실했고, 당당히 자신의 말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드는 ‘퇴학’이란 으름장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는 ‘감정에 충실한 화신’으로 변해 있었다. 지금 하지 않아 후회를 할 것 같으면, 그걸 미루거나 포기하기보다 당장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어떤 학생도 나서지 않는데, 토드는 당당히 책상에 올라가 키팅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Oh! Captain! My Captain!”이라 부른 것이다. 토드의 행동이 발단이 되어 『죽은 시인의 사회』의 최고의 명장면이 탄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전혀 교장의 억압에 눌리지 않았고, 처음처럼 주눅 들지 않았으며, ‘지금-현재를 살라’는 카르페디엠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교장의 윽박지름과 협박이 있음에도 토드는 당당히 일어나 외친다.




변화에 빨려 들어가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빚어내는 이야기는, 굳이 교육이란 이름으로 치장하지 않더라도 삶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사람과 찐하게 마주치고 싶고 그 변화의 장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럴 때 얼마나 깊숙이 빨려 들어가느냐, 발만 담그다 마느냐 하는 건 개인의 역량에 따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토드는 처음엔 그렇게 빨려 들어가는 자신이 걱정스러워 친구들의 제안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정도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차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됐고, 그 상황들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맘껏 감정을 표현하게 됐다. 바로 그 때부터 변화는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빨려 들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후기에선 토드의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봤다. 다음 후기에선 닐과 녹스의 변화를 다루며, 『죽은 시인의 사회』 후기를 끝맺도록 하겠다. 



▲ 변화가 가장 확실했던 토드는 그렇게 감정을 충실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