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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Aug 09. 2016

인형이 아닌 인간이 되길 희망하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다 8

교육은 대화여야 한다. 가르치려는 사람과 배우려는 사람이 유기적으로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해야만 한다. 키팅의 교수방법이 탁월한 이유는 단순히 남다른 수업을 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학생과 주고받는 수업을 했다는 데에 있다. 그에 따라 키팅 자신도 성장해 갔으며, 그를 만난 학생들도 성장해갈 수 있었다. 의식의 움직임을 통해 그들은 만나며 함께 성장해 갔고, 그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갈 수 있었다.                



▲ 만남은 서로에게 변화를 만들어 낸다.




닐의 아킬레스건아버지

     

닐 페리는 꽤나 유쾌하면서 밝은 학생이다. 학교생활도 잘하며 교우관계도 좋다. 더욱이 성적까지 좋으며, 토드와 같이 소심한 친구까지 살뜰히 챙길 줄 아는 팔방미남형 인물이다. 



▲ 토드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닐. 붙임성 좋고 밝다.



하지만 완벽한 그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 자신도 아닌 친구들도 아닌, 아버지였다. 닐의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닐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로 자식에게도 성공만을 바라는 타입이라 볼 수 있다. 

닐과 아버지의 관계를 볼 수 있었던 첫 장면은 입학식이 끝나고 난 후 기숙사에서였다. 보통 이땐 이미 모든 부모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입학식의 회포를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며 푸는 시기이다. 그런데 닐의 아버지는 다짜고짜 닐의 방으로 들어오더니, 친구들과 얘기하고 있는 닐의 입장은 상관도 하지 않고 “닐, 방금 교장 선생님과 얘길 했는데, 넌 이번 학기에 과외활동이 너무 많으니까, 졸업연감 일은 그만 둬라”라고 말해 버린다. 누가 보면 완곡한 어조의 권유 같지만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통보였다. 



▲ 친구들이 있건 말건 자신은 명령조로 말한다. 꼭 군대의 상관 같은 말투와 어조다.



아마도 지금까지의 닐은 그런 아버지의 말에 반대를 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나 보다. 그건 곧 아버지의 말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런 아버지의 통보에 그대로 따를 수 없어서 닐은 “하지만 전 부편집장인걸요”라고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을 뿐인데, 아버지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단둘이 얘기하자며 방에서 데리고 나와 “사람들 많은 데서 나에게 반항하지 마!”라고 화를 낸다. 아버지의 말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닐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자신이 감정에 치우쳐서 그런 것이며, 아버지 말에 따르겠다고 말한다. 

이 장면을 통해 닐과 아버지의 관계는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사인 아버지는 대화가 아닌 명령을 내리고, 부하직원인 닐은 부조리할지라도 따르니 말이다. 그러면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라며 쐐기를 박는다. 그건 아버지의 뜻에 따를 경우 아낌없는 지원과 응원을 해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땐 모든 걸 끊어버리겠다는 협박에 다름 아니었다.                



▲ 필요한 게 있어도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풍긴다.




아버지란 이름으로 정열에 찬물을 끼얹다

     

이로써 닐은 그토록 하고 싶던 졸업연감을 만드는 일에서 빠지게 된다. 모든 일엔 자신의 생각보다 아버지의 생각이 깊이 개입되었고, 공부와 관련 없는 일들은 ‘의대를 졸업한 이후에 하는 것’으로 미뤄졌다. 

하지만 닐은 가슴 속에 뜨거운 정열을 지닌 학생이었다. 그 뜨거운 열망은 누군가 막는다고, 꺾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막히고 꺾어질수록 더욱 분명하게 더 큰 정열로 자라났다. 그래서 닐은 어느 순간에 자신이 연극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부모 몰래 오디션까지 보기에 이른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이기에 누구에게 묻거나 자문을 구할 필요도 없이 전광석화로 오디션을 봤고 결국 가장 중요한 배역을 맡게 된다. 아주 열심히 사는 건실하면서도 힘찬 청소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어느 순간에 갈등의 요소가 될 거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아버지가 아는 날엔 초반에 잠시 봤듯이 스파크가 튈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버지는 닐이 연극을 한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됐고 다짜고짜 닐의 기숙사로 찾아왔다. 아버지가 화난 이유는 두 가지로, 첫 째 자신에게 말하지 않고 일을 벌였다는 것과, 둘 째 연극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이다. 자신은 아들의 말을 들을 마음은 없으면서도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나무라고 있었으며, 연극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으면서도 연극 연습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고 나무란 것이다. 즉, 자기가 정해놓은 것 외에 다른 것을 하는 걸 용납하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은 것이다. 



▲ 자식에 대한 관심보다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그렇게 부추긴 배후를 찾는데 더 관심이 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허튼 짓을 하고 자신을 속일 수 있었던 데엔 배후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게 키팅이냐고 묻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라는 말이 절로 나올 법도 하지만, 한 번도 반항해보지 못한 닐은 아무 말도 없이 그걸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연극을 관두라는 아버지의 말에 마지못해 “Yes sir!”이라 대답하면서 말이다.               



▲ 표정에 우수가 감돈다. 여기서 알겠습니다라는 말은 수긍의 말이 아닌, 체념의 말이다.




꿈을 향한 정열의 화신이 되다

     

영화 초반의 닐이었다면, 부편집장을 관두게 되었듯이 연극도 포기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거부를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각오는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를 알게 됐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앞에선 마지못해 대답을 했지만, 이번에는 관두지 않을 것이다. 단지 아버지와 말을 해봐야 도루묵이기 때문에, 그나마 얘기를 할 수 있는 키팅을 찾아간 것이다. 키팅은 연극을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와 결론짓길 바랐지만, 닐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연극무대에 서게 된다.



▲ 닐의 일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이지 않을까. 꿈 같고, 현실이었으면 좋겠던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의 꿈을 향한 정열의 화신이 되었다. 그런 정열이 혹 한 때의 치기로 비춰질까봐 걱정하며 최선을 다해 연극을 준비했다. 그 결과 모두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연극은 성황리에 끝났고, 그의 명연기를 보던 친구들까지도 “닐 훌륭했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닐은 연극을 잘 마무리 지은 희열을 느낄 새도 없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어 황급히 연극무대를 빠져 나와야 했고, 집에 와선 당연히 혼나게 된다. 하지만 이 때 전혀 뜻밖의 이야기까지 듣게 된다. 지금 다니는 학교를 자퇴시키고, 육군사관학교로 입학시키겠다는 일방적인 통보 말이다. 물론 이땐 처음으로 언성까지 높여가며 그런 아버지에게 화를 내보기도 했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자 곧바로 체념해 버리고 만다. 닐에겐 늘 선택인 것처럼 보이지만, 강제에 불과한 ‘유사선택(김진숙씨 특강 때 표현)’만 있었던 것이다.                



▲ 찬란한 그 순간에 듣게 되는 말은, 축복도 아닌 전학의 문제다. 참 말로 할 수 없는 비감이 느껴진다.




정열의 화신 닐인형이 아닌 인간이 되다

     

아버지와의 잠시의 설전이 오고 갔지만, 아무 것도 바뀔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닐은 체념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이대로 밤이 지나고 나면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일부턴 육군사관학교로 옮겨 아버지가 원하는 꼭두각시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 아마 닐은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맛본 ‘카르페디엠’의 희열은 ‘죽은 시인의 사회’란 비밀 동아리에서의 일탈로, 연극을 통해 자신의 끼를 맘껏 드러내던 정열로 흠뻑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 또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고 아버지가 원하는 삶만을 살아야 한다. 아마도 그런 상황에서 닐은 앞날이 답답하고 짜증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더 이상 아버지의 인형이 아닌 내 의지대로 살아가는 인간이 되고 싶었으나, 여전히 주위 환경과 상황은 그 자신이 인형이길 바라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대로 아무렇지 않게 지내면 아버지가 원하는 꼭두각시로 살아야만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가? 닐은 여태껏 하지 못했던 결단을 이 순간엔 내리고 만다. ‘인형이 아닌 인간’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연극이 끝난 희열을 만끽하기도 전에, 그는 새벽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인간이 되는 길을 떠나고 만다.                



▲ 이 장면은 묘하게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겹친다. 예수는 인류의 죄를 사했고, 닐은 꼭두각시 인생의 삶을 버렸다.




하나의 문제는 많은 문제를 포괄하고 있다

     

닐의 여행은 파문을 낳는다. 명백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학교 관계자들은 스스로 반성해보거나 부모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키팅 선생에게 모든 문제를 덮어 씌웠으니 말이다. 희생양 또는 배후자를 키팅으로 지목하며 근본적인 문제를 덮어 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책에선 토드의 감상평이 실려 있다.           



닐의 죽음은 본인의 적성이나 꿈은 무시하고 억지로 갈 길을 강요했던 그의 아버지와 학교 공통의 책임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반성은커녕 책임을 떠넘길 사람을 물색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이다. 그건 닐 혼자만의 문제로 덮어둘 수는 없는, 어쩌면 그들 모두의 문제이기도 했기에 더욱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죽은 시인의 사회』, H클라인바움 저, 한은주 역, 서교출판사, 2004년, pp 258 



▲  토드는 어찌 보면 본질을 더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피해자가 우리 모두라는 것도 말이다.


         

최근에 한국 최고의 이과 대학인 카이스트에서 자살하는 학생들이 비약적으로 늘고 있다고 한다. 누가 보면 자살한 학생들이 심신이 미약하여 문제가 많아서 그런 것 같지만, 여기에도 장학금으로 경쟁을 유도하는 시스템의 부조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닐 또한 교육 시스템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봐야 한다. 

한국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세계 제1위라고 한다. 이건 어찌 보면 한국의 교육이 청소년들에게 엄청난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공포감을 조장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함에도 학교는 더욱 더 경쟁 일변도로, 소수의 성공을 위해 다수를 들러리로 세우는 형태로 고착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닐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그들에게 자살했다가 몰아붙일 수 있을까? 그들을 몰아세운 건 우리가 아닐까?



더 이상 땜질식의 처방이 아닌,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한 시기다. 그래야 우울하게 죽어가는 수많은 이 시대의 닐들을 살릴 수 있고, 교학상장의 교육을 꿈꿀 수 있으니 말이다. 

원랜 이번 후기에서 끝맺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다음 편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글 또한 써지는 순간에 별도의 생명력을 부여받나 보다. 어디까지 어떻게 확장되고, 어떻게 끝맺게 될지 쓰는 사람조차 종잡을 수 없으니 말이다. 다음 편에서 부디 잘 끝맺어지길 바라며, 한국 땅의 수많은 닐들이여 미안하다!



▲ 한국 땅의 수많은 닐이여, 떠난 곳에서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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