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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un 20. 2018

내소사에 가면 역사가 재밌어진다

임용고시생의 내소사&관음봉 여행기 3

黃雲이 피어난 초여름의 들판을 가르며 버스는 달린다. 오늘은 그렇게 덥지 않은 날씨긴 해도 가시거리가 그렇게 썩 좋지도 않은 날이다.                



▲ 황운이 피어오른 초여름의 들판 풍경.




내소사와 소정방 

    

그때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소사來蘇寺라는 절의 이름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 

그렇지 않아도 단재학교에 수습교사로 일하고 있던 때 첫 여행을 기획하게 되었는데, 그때 선택한 장소가 다름 아닌 부여였다. 전주에서 30년 넘도록 살았지만, 타의든 자의든 신라 유적지를 찾아 경주로 떠난 적은 있어도, 백제 유적지를 보러 가봐야겠단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사람은 착각의 동물이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 대해 너무도 잘 안다고 생각해서 함부로 대하며, 자신이 사는 곳은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해서 별 관심을 안 갖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사실은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만큼 잘 몰랐던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고, 가장 익숙하다 여겼던 공간만큼 낯선 공간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서울에 자리를 잡자마자 묵은 과제라도 해결하려는 듯이 첫 여행지를 백제 역사의 최후가 알알이 박혀있는 부여로 정하게 된 것이다. 



▲ 터만 남은 곳에 가까스로 모양새만 갖췄다.



그 중 부여의 정림사지는 두 가지 점에서 충격을 줬다. 하나는 여태껏 본 적이 없는 그래서 매우 신선했고 더욱 불심을 자극하게 만든 돌부처님의 모습이 그랬고, 다른 하나는 오층석탑에 새겨진 글씨가 그랬다. 지금도 사람들은 어디에 가든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오고 싶어 하듯, 그 당시 사람도 그건 다르지 않았나 보더라. 청나라 황제는 삼전도에서 인조에게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를 받은 후에, 삼전도비를 당당하게 세워놓고 자신들에겐 영광의 역사를 우리에겐 치욕의 역사를 만고에 드리우려했던 것처럼, 역사의 권력자들도 나라를 굴복시키면 그곳에 자신의 명백한 표지를 세워놓았던 것이다. 더욱이 소정방이 악랄했던 것은 별도의 비문을 설치한 게 아니라, 이미 있던 절의 탑에 ‘크나크신 당나라께서 백제국을 평정한 것을 기념하는 비명(大百濟國碑銘)’이라는 글귀를 마치 낙인찍듯이 새겨 넣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소정방이 ‘내소사’라는 사찰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였고, 그 말은 곧 來蘇라는 말이 ‘소정방이 왔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내소사의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는데, 지금은 ‘내소사’로 개칭된 걸 보니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 같기도 했다.                



▲ 大唐平百濟國碑銘이란 글씨가 제대로 보인다. 그리고 정림사의 부처야말로 부처의 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난 모습 같단 생각이 들었다.




역사가 재밌는 이

     

물론 여행에서 돌아와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 근거가 없는 얘기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원래 민간에 퍼진 얘기들, 사료로 남지 못한 얘기들이 때론 더 진실한 얘기일 수도 있다. 하긴 여기선 진실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왜 민간에선 그러한 얘기들이 돌고 돌아 여태까지 사라지지 않고 전해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거기엔 역사로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민초들의 바람이 깊게 깃들어 있으니 말이다. 권력은 역사책을 남겨 자신들의 권력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증명하려 하지만, 민초들은 그런 어마어마한 작업을 해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들에겐 밟아도 다시 자라나는 생명력이 있고, 바람에 바짝 엎드리지만 언제든 꿋꿋이 일어설 수 있는 저력이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말과 말로 자신들의 바람을 실어 나르고 그게 언제 어디서든 사라지지 않고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거다. 그래서 연암과 같은 경우는 20대 초반에 우울증을 앓았고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그는 여행을 하며 여러 민가에 떠돌던 기이한 이야기들을 직접 듣고 기록에 남기기도 했으며, 여러 문인들도 野史류의 이야기를 담아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왜 하필 소정방이 온 것을 굳이 사찰의 이름으로 생각하려 했을까?’하는 점이었다. 흔히 그렇듯 정복자는 핍박자일 수밖에 없고, 더욱이 백제를 멸망시킨 장본인이니 백제인의 입장에선 당장이라도 씻어내고 싶은 이름일 수밖에 없다. 



▲ 내소사란 이름에 들어 있는 민초들의 바람인가?



그런데도 이렇게 생각하려 했던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엔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하나는 치욕의 역사일지라도 잊지 않고 기억하여 다시는 이런 치욕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일 수도 있다. 신채호 선생님의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처럼 민중들은 아픈 역사조차도 아로새겨 미래를 위한 자양분으로 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하나는 소정방은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구원자의 이미지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백제 말기 민초들의 삶은 더욱 시름 깊어졌을 것이다. 최근에 중국역사를 공부하니 은나라엔 紂王이 주지육림의 파티를 벌였으며 충신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백성들의 착취를 감행하여 주나라 무왕의 쿠데타의 명분이 되었고, 주나라 말기엔 幽王과 厲王이 정치보단 향락에 빠져 종주국으로서의 주나라의 권위는 무너져 내렸다(여기선 논의를 집중하기 위해 ‘승자의 역사로 전대를 극악무도한 역사로 폄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논외로 하고 이야기를 진행하기로 하자). 그처럼 백제의 말기도 민초들에겐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맹자』에 나오는 것처럼 ‘이 해는 언제나 없어질꼬? 나는 너와 함께 없어지리라(時日害喪予及女偕亡)’라는 말이 절로 나오며 권력자를 철천지원수처럼 대하게 되고, 오히려 적국의 수장을 이와 같은 환란에서 구해주는 구원자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바람이 소래사라는 절의 이름에 투영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래서 역사는 재밌다. 정사로서의 역사와 야사로서의 역사가 길항작용을 하며 무수한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그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심상을 엿볼 수 있게 해주니 말이다. 내소사라는 절의 이름이 무수한 상상력을 자극해주고 있다. 이래서 여행이 즐거운 거다.                



▲  쉬는 날이라 사람들이 이미 많더라. 이제 본격적으로 내소사 여행을 떠나보자.




사찰로 들어가는 길은 행복이어라

     

정확히 두 시간 만에 내소사 정류장에 도착했다. 오늘은 현충일이다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절 입구를 거닐고 있더라. 교수님은 원래 내소사를 둘러보지 않고 바로 관음봉을 오를 생각이었나 보더라. 하지만 막상 절을 보는 순간 맘이 바뀌셨던지, “여기까지 왔으니, 그래도 절은 한 번 둘러보고 올라가도록 합시다.”라고 말씀하셨다. 

절로 들어가는 입구는 어느 절이나 좋았던 것 같다. 순천의 강천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고즈넉한 분위기도, 지금 이곳 내소사의 입구도 높게 뻗은 나무 사이로 느리게 걷고 있노라면 굳이 다른 게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지금의 이 여유, 그리고 여기서만 느낄 수 있는 적막함이 내 온몸을 훑고 지나가면서, 무에 그리 아등바등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늘 무언가에 쫓겼고 뒤처질 새라 한 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마음 졸이고 긴장해 있었으며, 온갖 불안증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나는 목조건물에 대한 전문지식도 없고, 불교에 대한 통찰도 없으며, 절의 규모와 역사에 대한 지식도 없으니, 막상 절에 들어가 건물을 보고 불상을 보는 것보다 이렇게 절로 들어갈 때의 이런 분위기가 훨씬 맘에 든다. 마치 세속과 성속이 이 길을 걸어가며 점차 벗겨지고 한시에나 나오는 말처럼 속세의 티끌은 사라지고 온전한 불성을 지닌 나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아가는 느낌이 드니 말이다.                



▲  절로 들어가는 길은 최고의 길이다. 이 길을 걸을 때면 행복하다.




대웅전 천정엔 문고리가 있다

     

가는 길에 사찰을 삥 두르고 있는 시내를 ‘조계曹溪’라 부른다는 걸 알게 됐다. 조계종을 통해 그 단어는 알고 있었지만, 그게 세속과 성속을 완벽히 차단하는 시내의 이름이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내소사는 백제 때 건립되었고 가장 번성했을 땐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지만 그 후 대소래사가 불타고 임란 때 소소래사마저 불타 자취가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절은 인조 때 재창건된 것이라고 한다. 규모가 그렇게 작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관음봉을 오르면 내소사의 사찰 규모가 한 눈에 들어온다.



특히 대웅전의 수수한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았다. 화려하게 단청을 칠하지 않은 나무 그대로의 질감과 색감이 느껴진다. 조용히 대웅전으로 들어가 보니, 거기엔 ‘내소사영산회괘불탱’이란 그림이 걸려있고 보물로 취급되는 그림이었지만 나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진 않는다. 원래 아는 게 없으면 보이는 것도 없는 법이다. 



▲  천정에 달린 문고리가 보인다.



그에 반해 나의 이목을 잡아 끈 것은 대웅전 천정에 문고리 같은 게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걸 보고 있으니 대웅전에 있던 보살님이 “저 문고리를 잡으면 극락으로 가는 문이 열려요”라고 말씀해주신다. 기독교에서도 천국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불교도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기독교 경전 중에 『도마복음』에는 ‘천국이 하늘에 있을 것 같으면 새가 먼저 갈 것이요, 물속에 있다면 물고기가 먼저 갈 것인데 천국은 너의 마음속에 있느니라. -『도마복음』42절’라고 이와 같은 상식을 깨는 내용이 당당히 쓰여 있다. 천국이나 극락이 어느 곳에 있느냐의 공간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걸 어떻게 현세에서 구현하고 내세를 준비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종교는 서로 무척 다른 듯하지만, 그래서 서로 이단입네 언성을 높여대지만, 알고 보면 이렇게 서로 통하는 부분들도 많고 함께 공부하다보면 서로의 종교를 이해하게 되는 지점들이 충분히 있다. 그러니 내 종교가 절대 진리라고 생각되거든, 좀 더 타종교에 대해 관용적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리가 결국 하나라면 어느 것을 통해서든 그 하나의 진리에 닿게 될 테니 말이다. 



▲  토속신앙과 불교의 융합을 나타내는 '칠성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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