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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un 20. 2018

내소사 뒷산인 관음봉에 오르다

임용고시생의 내소사&관음봉 여행기 4

내소사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다 둘러봤다. 솔직히 말해서 아는 게 없으니, 제대로 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그래도 교수님과 함께 온 덕에 ‘조계曹溪’가 속세와 격절되었다는 의미로 사찰 주위에 흐르는 시내를 그렇게 부른다는 것, ‘지장전地藏殿’엔 선조의 명부를 모셔놓고 일정한 때에 합동 제례를 지내며, 그걸 지키는 시왕(10명의 왕)과 나한(2명)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사찰에 걸려있는 나무 모양의 물고기를 ‘목어木魚(건빵을 건빵이라 부르듯, 나무 물고기라 그냥 ‘목어’라 부르는 걸 보고 깜짝 놀람)’라고 부른다는 걸 배웠다. 여기서 더 배워봐야 이미 한계치를 초과해서 금세 사라질 것이기에, 이 정도가 딱 적절하다.                


▲ 이 탐방로를 따라 우린 올라갑니다. 등산은 2년 만이네요^^




건빵과 등산론 

    

우린 내소사 입구에서 갓길로 빠지는 탐방로로 산을 타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정말 등산을 하게 될 거란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시회 성격의 모임으로 한시를 함께 읽어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좀 학술적인 분위기의 여행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산을 탄다고 하니, 설레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2012년부터 13년까지 서울 근처의 산들을 많이도 탔다. 폐쇄된 교실이란 공간에서보다 자연의 너른 공간에서, 의도적인 교육활동보다 비의도적인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당시 아이들은 되게 힘들어했지만, 그럼에도 잘 따라와 줘서 북한산을 등산 경험이 없는 아이들과 함께 오른 것은 물론, 심지어는 지리산까지 6박 7일의 일정으로 종주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용이 분명했지만 그 당시 우리에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었기에 가능했다. 그때의 기록이 다큐멘터리라는 영상과 등산기로 남아 있는 건 그래서 정말 다행이다. 



▲  2013년 11월에 우린 종주를 했다. 그래도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 후로는 학교에서 팀별 외부활동이 사라지면서 등산의 횟수는 자연스레 감소되었다. 그래도 단재학교의 좋은 점은 2주마다 트래킹이란 커리큘럼으로 외부활동을 한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마지막 등산을 한 걸 생각해보면 2016년 6월에 갔던 검단산이었다. 트래킹은 야외에서 쉬다 오는 성격이었기에 ‘이번에도 그냥 밑에서 편안하게 있다가 가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해에 새롭게 들어온 성민이는 달랐다. 원래 액티브하고 움직이길 좋아하며 운동감각도 좋은 친구라 초봄의 옷차림으로 와서 무지 더울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잘 타더라. 오히려 내가 한참이나 뒤처져 성민이가 조금 오르다가 기다리고, 조금 오르다가 기다리고를 반복해야만 했다. 성민이 덕에 정말 오랜만에 등산을 했고 정상에 올랐다. 늘 자전거 타며 곁에서만 바라보던 팔당댐의 위에서 내려다 보니 느낌이 색다르더라. 



▲ 검단산 정상에선 팔당댐이 내려다 보인다.



그 후로 또 다시 2년이 흘러버렸다. ‘흘러버렸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시간이 그처럼 눈 깜빡할 새에 후다닥 흘러 정신을 차렸을 땐 ‘벌써 2년이나 흐른 거야’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아도 전주에 오고 나서 모악산에 늘 가고 싶다는 꿈만 꾸고 있었는데(실제로 3월 30일엔 모악산에 가려 나왔다가 버스편이 만만치가 않아 우연히 덕진공원을 가기도 했다), 이번에 이런 기회로 등산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등산을 이렇게 남다르게 생각하게 이유는 명확했다. 예전에 임용공부를 할 때 답답할 때면 어디다 그걸 풀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땐 어머니 차를 끌고 올 때면 습관처럼 모악산에 찾아가 정상을 올라갔다 내려오곤 했으니 말이다. 그땐 그게 발분하는 마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때 그렇게라도 가슴 속에 쌓인 것들을 풀어내지 못했으면 아마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장난처럼 ‘예전에 임용공부할 때 나를 살린 건 등산과 자전거 타기’라고 외치는 것이다.                



▲ 올해 1월에 제주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에서 찍은 사진. 모악산과  전주가 보인다.




초반엔 무척 힘들었지만그 힘듦에 비례하여 뿌듯함도 컸다 

    

아이들도 등산을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지, 등산할 차림을 갖추지 않고 왔다. 물론 이 말은 지금의 기성세대들처럼 등산화를 갖추고 값비싼, 그러면서도 천편일률적인 등산복을 갖추어 입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처럼 그냥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등산복을 풀세트로 갖추거나, 낮은 산임에도 히말라야라도 탈 것 같은 배낭을 짊어지고 오르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신발은 신축성이 있으면 되고, 옷차림은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 거치적거리지 않으면 그뿐이다. 산을 목숨 걸고 타는 것도 아니고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타는 것도 아니며, 그저 자기 속도대로 느림과 빠름에 상관없이 이 순간을 즐기며 갈 수 있으면 되니 말이다. 

그런데 성재는 얇은 신발에 크로스백을 메고 왔기 때문에 한쪽 어깨가 무지 아플 것은 당연했고, 용주는 살이 거의 없는 몸에 약간 큰 배낭을 메고 가야 하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초반에 오르는 길은 경사가 꽤 있는 길이라 몸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올라야 하는 아이들은 무진장 힘들어하더라. 그래도 대단하다고 느껴졌던 것은 누구 하나 ‘힘들어서 못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거나 투덜거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말을 왜 뱉고 싶지 않았겠냐 만은, 그저 꿋꿋이 올라갔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하고 말리라는 의연함이 보였다. 

어느 정도 올라가니 서해가 한눈에 보이고 내소사도 한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중간 중간 널찍한 바위가 있어 쉬기에는 정말 좋았고 바로 그곳에 앉으면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을 수가 있어서 좋았다.                


▲ 한 걸음, 한 걸음씩 열심히 올라가는 아이들. 대단하다.




계획도 없이 불안도 없이 그냥 해보라   

  

그래서 교수님도 “오르면 힘들 줄 뻔히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오르는 이유가 아마도 바로 여기에 올라야만 이렇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인 거 같아.”라고 말씀해주신다. 

그러면서 재밌는 일화를 소개해준다. 대학교는 서울에서 다니고 있었지만, 어느 때인가는 친구와 무작정 이곳에 와서 하룻밤을 묵으며 진탕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러고 나선 그 다음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 산을 탔다는 것이다. 교수님이 그 말을 할 때, 아무 것도 거리낄 것 없이 자유분방하게 떠나고 산도 탔던 한때의 추억이, 가슴 뭉클한 그때가 그리운 듯이 보였다. 



▲ 올라가다가 한번씩 이렇게 바위에 걸터앉아 쉬었다. 이럴 때 맞는 바람이 정말 시원하다.



그러고 보면 정말 그렇게 막무가내로, 또는 그냥 기분이 동하여 아무 계획도 없이 하고 볼 때가 있다. 물론 그때는 그게 훗날 어떤 추억으로 나에게 남을지, 그리고 어떤 감상을 자아낼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그때~ 참 좋았었지!’하는 감상을 자아내고, 문득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리움으로 남는다. 나에게도 2011년 1월 15일에 경수와 함께 탔던 내장산이 정말 그랬다. 그땐 폭설이 내려 산엔 온통 눈밭이 펼쳐졌고 눈은 발목이 잠길 정도로 푹푹 빠졌으며, 산에서 불어오는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은 에스키모처럼 두꺼운 외투를 입었음에도 옷깃을 파고들었다. 정말 맨 정신으론 할 수 없는 극한의 등산이었는데, 막상 산을 타고 있으니 그렇게까지 못할 정도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눈길을 헤치며 나아가는 맛도 있었으며, 아무도 없는 산을 이렇게 헤매는 재미도 있었다. 신선봉까지는 오르지 않고 내려와 내장사로 문 곁에서 점심으로 컵라면과 김밥을 먹었는데 그렇게 꿀맛일 수가 없더라.                



▲ 이런 눈길을 헤치며 나갔다. 정말 살아있다는 느낌이 팍팍 들 정도로 겨울 산행 확실히 매력이 있더라.




등산하길 정말 잘했다 

    

11시 46분에 오르기 시작했는데 1시가 넘었을 땐 이미 정점을 찍었고 내리막길이 계속 되고 있다. 점심시간도 훌쩍 지났기에 전망이 좋은 바위의 그늘진 곳에 앉아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아이들은 모두 터미널 앞에 있는 김밥집에서 김밥을 샀기에 모두 같은 맛 김밥을 먹고 있다. 나는 등산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라면과 물을 싸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과일만 챙겨왔다. 

내가 과일을 먹고 있으니, 아이들은 “선배님 저희 김밥 많아요. 이것도 함께 드세요~”라며 챙겨주더라. 재밌지, 내가 챙겨줘도 시원찮을 판에 챙김을 받고 있으니. 그래도 이런 훈훈한 마음들이 좋다. 



▲ 우리의 조촐한 점심. 그렇지만 어떤 만찬보다 맛있다.



밥을 먹고 조금 내려가니 계곡이 보이더라. 물이 많이 줄어 아쉽긴 했지만, 그 물은 엄청 차가웠다. 그래서 발을 담그고 계속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곳에서 교수님은 자리를 펴자고 하더라. 이때를 대비해서 터미널 앞에서 우리는 소주와 약간의 주전부리를 사가지고 온 것이니, 이제 맘껏 즐기기만 하면 된다. 등산을 하며 이런 식으로 술을 마셔본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하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더라. 약간 취기가 돌 정도의 술과 간단히 입가심할 수 있을 정도의 먹을거리는 ‘등산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런데 그때 교수님은 “이곳에 왔으니 내소사에 관련된 시 한 편은 봐야겠지.”라고 운을 떼시더라. 그때만 해도 ‘뭔 공부?’라는 불만이 입이 부리처럼 튀어나왔었는데, 막상 시회를 하고나선 생각이 바뀌었다. 그 모임을 통해 정말 한문을 공부하는 즐거움, 그리고 공부하며 궁금했던 것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유쾌함을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만으로도 한 편이 후기가 더 쓰여질 만한 볼륨이기에, 이 이야기는 다음 후기에서 마저 하도록 하겠다. 



 ▲ 시회를 준비하는 손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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