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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Apr 02. 2018

모악산 가려다 덕진공원에 가다

전주 여행

여느 흔한 날처럼 7시 50분쯤 올라와 55번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특별히 『연암을 읽다』란 책의 원문까지 인쇄하여 왔으니, 기분도 새롭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도 어린다. 그래서 논어를 펴고 ‘四箴’을 읽고 써보는 것으로 오늘 하루를 시작해보려 했다. 한참(그래봐야 제대로 공부한 건 30분도 채 되지 않는다) 읽다가 창문을 쳐다보니 최근엔 미세먼지와 안개로 거의 실루엣도 보이지 않던 모악산이 오늘은 선명하진 않아도 실루엣은 보이던 날이더라. 그래서 ‘모처럼 모악산의 자태를 보니 기분 좋다’고 단순히 생각하고 다시 공부하려던 찰나.                



▲ 모악산이 오랜만에 자태를 드러냈다. 저 자태를 보는 것만으로 맘이 떨려온다.




모악산을 그토록 그리워했으면서도 모악산에 갈 생각은 안 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웅성대며 요동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어느덧 임고반에 자리 잡은 지 보름 정도가 되었고 꿈만 같던 이 순간이 익숙한 일상처럼 느껴지게 됐다는 점이다. 그러니 늘 공부가 하고 싶다, 책상에 앉아 다른 것 신경 쓰지 않고 공부에만 몰두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어느 날은 버틸 수 없는 천형처럼 무겁게, 압박처럼 힘겹게 느껴지게 된 것이다. 



▲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 자리에 얼마나 앉아 맘껏 공부를 하고 싶었던가. 하지만 모처럼 공부를 하니  힘들긴 하더라.  간사한 마음이여~



그리고 단재학교에 있을 땐 때에 따라 한 달에 한 번씩 트래킹으로 했기에 자주 나갔었다. 그런데 꽃이 피어 봄이 왔어도, 꽃이 지어 가을이 왔어도 당연히 보는 것이니 오히려 아무런 감흥을 느껴지지 않더라. 그런데 지금처럼 막상 공부를 맹렬히 해야 하기에 여행도 자제해야 할 때가 되니 멀찍이 꽃이 폈음을 봄에도 오히려 봄이 왔음이 온 몸으로 느껴지며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한다. 역시 뭐든 누릴 땐 모르지만, 오히려 제한되고 나면 더 절실해지고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 그저 서울역 근처를 걷는 것만으로도 자유의 향기를 만끽했던 경험처럼 말이다. 

그래서 불현듯 ‘전주에 왔는데 그간 한 번도 모악산에 갈 생각조차 안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가야겠단 생각이 들어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무작정 짐을 챙겨서 나왔다.                



▲ 1월에 3박 4일 일정으로 제주에 갔다 오는 길에 비행기는 모악산 위를 지나고 있다. 모악산의 자태와 전주의 모습이 보인다. 




갑작스런 여행에 따라 여러 변수들이 생기다

     

근데 전혀 예상에 없던 거라 핸드폰 배터리가 40% 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지금 핸드폰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반나절은 버틸 수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불안하며 산을 타긴 싫어 충전잭에 끼워놓고 도서관에 가서 내일 읽을 책도 빌려오고, 지원서를 넣을 곳도 찾아봤다. 학교에선 10시 30분 정도에 나왔음에도 그렇게 저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벌써 11시 30분이더라. 

어차피 올 때도 165번 버스를 타고 와야 하기에 겸사겸사 마트에서 장도 볼 겸 자전거를 타고 롯데마트 앞으로 갔다. 165번은 올 때까지 10분 정도나 남았다고 한다. 예전엔 전주대가 종점이었지만 지금은 혁신도시까지 가니 시간이 더 늘어난 것만 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사실 배차시간은 짧아져 그전엔 20분이었지만 지금은 16분이다. 

버스를 타고 모악산에 가는 것은 처음인데 가는 방법은 여기서 165번 버스를 타고 평화동까지 나서 970번 버스로 환승해서 가야한다. 가는 데만 1시간 넘게 걸리고 환승까지 고려하면 넉넉하게 2시간은 잡아야 한다. 근데 여기서 한 가지 변수가 또 있었던 거다. 970번 버스는 배차 간격이 무려 40분 정도였던 거다. 가는 것도 오는 것도 합해서 생각하기엔 12시였던 지금 시간이 무지 어중간 했다. 그래도 맘먹고 나왔으니 가긴 가봐야지.         



▲ 버스로 가려면 이런 루트로 가야 한다.


       


190번이 여행의 목적지를 바꾸다 

    

그때 갑자기 190번 버스가 등장했다. 검색할 겨를도 없기에 경로를 살펴보니 종점이 평화동으로 되어 있더라. 그래서 타도 될 것 같아, 무작정 탔다. 처음으로 LG페이 티머니를 이용해보기로 했다. 이것 때문에 무려 심카드까지 바꿨으니 한 번 써봐야 한다. NFC를 켜고 핸드폰을 단말기에 대니 바로 인식하며 1250원이 빠져 나가더라. 한 달간 겨우 3만원 내에서만 쓸 수 있다는 점이 걸리긴 했지만, 지금은 버스를 탈 일이 많지 않으니 아무래도 괜찮았다. 



▲ 처음으로 LG페이 티머니로 버스를  타봤다. 잘 작동해서 다행이다.



자리가 비어있었기에 앉아 190번 버스의 경로를 검색해봤다. 그랬더니 이 버스는 서곡지구를 거쳐 서신동을 거쳐 전북대를 지나 평화동으로 가는 버스더라. 그러고 보니 남초등학교 앞을 지날 때 그곳에 안 보이던 버스정류장이 생겨 있어서 무슨 버스가 다니나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딱 한 대의 버스가 다니는 걸 확인했는데 그게 바로 지금 이 버스였던 거다. 우연은 그렇게 마주치고 어긋나며 마치 필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돌아가는 버스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어차피 전북대를 지나니 거기서 내려 970번 버스를 환승해도 되긴 한다. 하지만 그때 바로 970번 버스가 온다는 보장도 없으며 거기서부터 탈 경우 모악산까지 가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이쯤에서 맘을 정해야 했다. 모악산을 지금 가는 건 약간 무리가 따르니, 나중에 아침부터 나와 모악산을 타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다른 곳을 가는 것으로 말이다. 어차피 전북대에 가니 덕진공원에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덕진공원은 20대 이후 나의 삶에 가장 많은 추억이 담겨 있는 곳인데 호수 가운데 설치된 흔들다리인 현수교가 38년 동안 자리를 지켰는데 오래 됐다며 4월 중에 철거하고 좀 더 멋지고 좀 더 넓은 현수교로 재가설한다는 거다. 저 현수교가 사라진다는 건 나의 덕진공원의 과거도 지워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니 철거되기 전에 예전의 추억을 곱씹으며 저 곳을 사진에 가득 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법원 검찰청 정류장에서 내려서 걸어갔다.                



▲  2008년 8월에 스터디 멤버 형들과 찍은 사진.  덕진공원은 쉴 만한 곳이었기에 20대에 주구장창 찾아왔었다.




짬뽕지존역시 지존 

    

막상 버스에서 내리니 신기하게도 배가 고파오더라.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럼 해이루감자탕을 먹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최근에 돼지고기를 잔뜩 먹었던지라 아예 굶던지, 해물로 만든 요리를 먹고 싶었다. 그래서 덕진정류장 쪽으로 걷다 보니, 건너편에 화려한 모양으로 ‘짬뽕지존’이란 음식점이 보이더라. 언젠가도 저 음식점을 본 기억이 있긴 하다. 음식점이 들어선 건물 자체가 매우 특이한 모양이기 때문에 눈길이 절로 가니 말이다. 



▲  접때도 있다는 걸 알았는데, 들어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순창에 있는 중국집에서 짬뽕을 맛있게 먹어본 이후 짬뽕에 꽂히게 되었다. 그래서 맛있는 짬뽕을 찾으면 절로 행복해지곤 하는데, 가장 많은 기대를 하고 먹었던 강릉의 ‘교동짬뽕’은 별로였다. 후추가 이미 가득 뿌려져 후추맛이 강했고, 해물도 그다지 많이 들어 있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과연 저곳의 평가는 어떨지 검색을 해보니 꽤나 괜찮은 평이 쓰여 있더라. 조개류들은 모두 까져 나오며 돼지고기와 해물류가 가득 들어 있어 깊은 맛이 난다고 한다. 그래도 9천원이란 가격은 에바였다. 초마짬뽕이 8천원, 교동짬뽕이 7.700원인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건 맛과 질에 자신이 있다는 표현일 수도 있고, 근거 없는 자만심일 수도 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음식점에 들어갔다. 



▲  국물이 자극적이지 않고 깊은 맛이 난다. 그토록 찾던  짬뽕맛에 가깝다.



이미 홀 안엔 꽤 많은 사람들이 있더라. 이것만 봐도 나름 인지도가 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이곳은 매우 특이하게도 생수병 500L짜리가 이미 한 병씩 있었고 단무지도 통닭을 시킬 때 오는 무처럼 밀봉된 채로 있었다. 아마 재활용을 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거 같았고 그만큼 가격은 비싸지만 이런 서비스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주는 것 같았다. 조금 기다리니 짬뽕과 밥 한 공기가 나오더라. 우선 짬뽕 한 그릇의 양이 많다는 것과 내용물이 충실하다는 것에서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국물부터 한 모금 떠먹어봤는데, 해산물과 돼지고기로 육수를 냈기 때문인지 꽤 깊은 맛이 나더라. 특히나 후추나 조미료의 맛이 느껴지지 않고 기름이 둥둥 떠있거나 하지 않아 맘에 들었다. 무겁지 않은 깊은 맛, 짬뽕을 먹을 때마다 그토록 찾았던 맛인데 드디어 이곳에서 찾게 된 거다. 그리고 어떤 곳은 먹는 순간 혀가 아려올 정도로 매운맛이 감돌긴 하던데, 이곳은 그런 자극적인 맛이 아니었던 것도 맘에 들었다. 면을 먹어보니 면도 특색이 있더라. 적당한 찰기와 적당한 두께로 밀가루를 먹는다는 느낌은 덜했다. 국물과 한껏 어우러져 식욕을 북돋웠으니 말이다. 해산물도 가득 들어 있고 거기에 돼지고기까지 가미가 되어 면과 함께 내용물을 하나씩 먹는 맛이 있다. 이 정도면 9천원이 정말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 밥과 함께 짬뽕을 조금씩 먹고 나니 금세 배가 불러왔다. 전북대 근처에 올 일이 있으면 또 오고 싶은 짬뽕집을 알게 되어 다행이다. 

입구 쪽엔 믹스커피머신과 아메리카노 머신이 있고 매실과 유자를 마실 수 있는 머신도 별도로 있다. 그러니 자기의 취향에 따라 후식까지도 모두 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거다. 나는 얼음이 가득 든 컵에 아메리카노를 따라서 냉커피로 만들어 음식점에서 나왔다.                     



▲  입구엔 후식을 즐길 수 있도록 갖가지 머쉰들이  있다.




덕진공원은 현존하는 낙원? 

    

여기서부터 덕진공원까진 1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덕진공원은 예전엔 돈을 내고 들어가야 했던 곳이지만, 대학생 때부턴 무료개방이 되었다. 그래서 동아리 동기들과 할 일 없으면 와서 놀다가곤 했고, 2008년에 임용을 준비할 땐 스터디 멤버들과 함께 와서 7시면 하는 에어로빅을 함께 따라 하기도 했었다. 곳곳이 사람에 대한 추억이 담겨 있고, 그 당시의 아련했던 느낌들이 여전히 담겨 있는 곳이다. 아마도 전주 사람이라면 덕진공원을 빼고선 어떤 추억도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20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추억의 장소를 이렇게 아무런 기약 없이 홀로 찾아오는 것도 참 색다른 느낌이다. 



▲  드디어 덕진공원에 도착했다. 연꽃이 없으니 허전하긴  해도 봄꽃들이 활짝 피어 공원엔 생기가 돈다.



공원 내엔 봄이 한 가득 내렸더라. 목련도 활짝 피어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곳곳의 벚꽃나무들도 만개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나는 후문으로 들어가 연지교를 먼저 건넌다. 지금은 연꽃이 피는 계절이 아니라 연꽃은 시들고 꺾여 흡사 연꽃 무덤과 같은 스산함을 풍기고 있지만, 공원엔 봄의 싱그러운 기운이 완연하다. 그러니 연인들은 그 앞에서 연신 사진기의 셔터를 눌러대고 가족들은 그늘에 자리를 잡고 정성들여 만든 음식을 먹기에 분주하다. 

그런 장면들을 눈에 한 가득 집어넣으며 드디어 현수교를 건넜다. 이 다리가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바로 그 다리다. 아마 덕진공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바로 이 다리일 거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찍은 사진이 이 다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일 거다. 예전엔 장난기가 많아서 이 다리를 건널 때면 폴짝폴짝 뛰기도 했었다. 그러면 다리가 출렁이며 그곳을 건너는 사람들은 깜짝 놀라 나를 노려보곤 했었다. 이런 느낌 때문에 2009년에 양평의 용담대교를 건널 땐 자동차의 달리는 속도로 인해 다리가 한 번씩 들썩여서 ‘이곳은 덕진공원 현수교를 키워놓은 버전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었다. 



▲  봄꽃과 함께 봄을 만끽하러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왔더라.



현수교 바로 옆엔 오리배를 타는 곳이 있다. 예전에 왔을 땐 오리배를 타는 사람들이 없어서, ‘저곳 저러다 망하는 거 아냐?’라고 걱정하긴 했는데, 오늘 보니 정말로 많은 가족들이 오리배를 타고 있더라. 저렇게 많은 오리배가 덕진공원을 누비는 건 정말이지 처음 보는 것 같다. 

덕진공원을 곳곳마다 누비고 있으니 가족 단위 나들이객부터 젊은 연인은 물론이고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분들도 곳곳에서 여유를 누리며 봄을 만끽하고 있더라. 바로 이게 덕진공원의 진정한 힘이란 생각이 들었다. 탑골공원만 가더라도 거긴 젊은이는 거의 볼 수 없고 나이 드신 분들만 가득하다. 누가 그렇게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공원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어느 한 부류만 머물게 된 것이다. 그에 반해 덕진공원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서로가 서로의 공간을 인정해준다. 아마 누군가가 낙원을 ‘모든 연령, 모든 인종, 모든 종교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곳’이라 정의한다면, 바로 덕진공원은 그런 낙원의 이미지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  오리배가 분주히 호수를 누빈다. 그래도 가족끼리 함께  추억을 쌓기엔 여전히 좋은 듯.



현수교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동안 덕진공원도 여러모로 변모를 할 것이고, 다 만들어지고 나면 또 한번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때에도 지금처럼 전연령층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2018년 3월의 마지막 날에 덕진공원으로의 여행은 일상에서 미처 느껴보지 못한 애틋함과 낭만을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모악산에 가려 나왔다가 덕진공원으로 우발적으로 오게 됐지만, 그런 급작스런 여행의 흥취로 인해,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면모를 맘껏 느낄 수 있었다. 



▲  봄과 함께 한 덕진공원. 늘 이랬으면 좋겠다.  이곳이야말로 나의 낙원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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