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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May 04. 2017

초평저수지에 담긴 우리네 이야기

2010년 초평에서 고추 심기 3

작년에 고추를 심을 땐 오전엔 이장님네 밭에서, 오후엔 이장님 친구네 밭에서 심었다. 이장님네 밭은 넓지 않아 오전에 금방 끝날 수 있었던데 반해, 친구네 밭은 밭의 규모 자체가 남달라 힘들게 해야만 했었다. 어찌 보면 오전엔 고추 심기의 맛보기 정도의 작업량을 맡았던 것이고, 오후에 실질적으로 노동을 했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과연 올핸 어떨까?               



▲ 작년에 심었던 이장님네 밭. 이번엔 여기부터 하지 않고 친구네 밭부터 한다.




고급문화와 저급문화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잔뜩 맘을 먹고 친구분네 밭에 투입됐는데, 이미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작업을 시작하기도 했고, 작년에 비해 적게 심으시기도 하다 보니, 12시가 약간 넘어서 끝이 났다. 걱정한 것에 비하면 아주 수월하게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점심으론 짬뽕을 시켜서 먹었는데 그때 재밌는 장면이 연출됐다. 그게 뭔고 하면, 밭으로 배달을 시켜도 배달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 잘 모르겠다. 도시처럼 주소가 분명히 정해져 있는 경우엔 주소만 알려주면 쉽게 배달할 수 있지만, 밭은 어떤 식으로 주문해야 하는 걸까? “초평초등학교 근처에 오면 밭에 사람들이 서서 작업을 하고 있을 것인디, 그리로 갖다 주소”라는 식으로 주문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 여긴 그런 식으로 주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주문을 받는 사람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도시에서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주문을 했다가는 십중팔구 투덜거리는 소릴 듣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역시나 환경에 따라 여기선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이, 다른 곳에선 어마어마한 일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신기한 장면은 오토바이로 배달을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ton 트럭 보저석에 배달가방을 싣고 왔으니 말이다. 갓길을 따라 트럭 한 대가 올 때만 해도 일하러 오신 분이려니 했다. 그런데 트럭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배달 가방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니 어찌나 황당하고 웃음이 나던지. 이게 바로 문화충격이지 않을까. 

아~ 세상엔 참으로 재밌는 일들이 많다. 도시와는 너무도 다른 풍경, 그리고 그런 풍경들이 자아내는 광경에 빠져들다 보면 힘듦도 사라지니 말이다. 지금껏 도시문화에만 심취하여 그걸 고급한 문화인양 생각하며 다른 것엔 관심조차 주지 않으며 살아왔던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짬뽕도 배고플 때 먹으니 정말 맛있더라. 오죽했으면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먹었을까. 배도 부르고 볕도 따뜻하니 더 이상 남부러울 게 없었다. 이곳에 돗자리를 펴고 한숨 푹 잘 수 있다면 여기야말로 무릉도원이지 않을까.                



▲ 최근에 먹어본 짬뽕 중엔 '용문객잔'의 짬뽕이 최고였다. 그럼에도 일하고 밭에서 먹는 짬뽕의 맛을 당해낼 순 없다.




노동 후엔 모든 음식이 천상의 음식이 된다 

    

한 끼 배불리 먹었으니 이제 이장님네 밭에 고추를 심을 차례다. 작년엔 비교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고추를 심어서 작게만 느껴졌는데, 오늘 다시 보니 꽤 크더라. 오후의 뜨거운 햇볕을 온 몸으로 받으며 일을 해야 했다. 작년에 심을 땐 오후에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여서 오히려 노동을 하기 편했던 것을 생각하면, 올핸 너무 날씨가 좋아 버거울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날씨가 좋으면 좋다고, 안 좋으면 안 좋다고 문제라고 여기는 마음이 읽힌다. 그건 일하고 싶어서 왔으면서도 깊은 마음엔 하기 싫은 마음이 있다는 거겠지. 그러니 날씨를 핑계 삼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볕을 그대로 온몸으로 받으니 살짝 현기증이 느껴졌다. 어러다 쓰러지는 거 아냐~ ㅋ 

역시 잘 안 쓰던 몸을 이렇게 부산히 움직이고 있으니 벌써부터 반응이 온다. 이땐 삽으로 흙을 떠서 고추모 곁에 흩뿌리는 일을 했다. 모두 다함께 애를 쓰고 있으니 힘들다고 농땡이를 펴선 안 된다. 하기로 한 이상, 끝이 있는 일을 하는 이상 최선을 다해서 할 뿐이다. 으라차차~ 힘을 내자 힘! 

일은 1시간 30분 만에 끝났다. 작년엔 오후 4~5시에 끝났었는데, 올핸 오후 2시가 약간 넘어 끝났으니, 아주 수월하게 노동한 셈이다. 

역시나 작년과 마찬가지로 이장님 댁 앞마당에선 고기파티가 열렸다. 어른들이 앉는 자리와 아이들이 앉는 자리가 나누어져 왁자지껄 고기도 굽고 맛있게 먹는다. 난 아이들이 앉는 자리에 앉아 순오와 민철이가 구워주는 고기를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조금 전에 짬뽕을 먹은 터라 그다지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숯불에 구운 고기는 절로 입맛을 돌게 하더라. 두릅과 상추, 그리고 쫑마늘과 함께 먹는 삼겹살 맛은 최고였다. 그래서 밥 한 공기까지 뚝딱 먹어치웠다. 최근에 이렇게 푸짐하게 먹은 적이 없던 탓에, 나에게도 엄청난 식성이 있음을 알고 놀라기까지 했다. 역시나 밥은 함께 먹어야 맛이 있다.                



▲ 그래도 한 번 해본 풍이 있으니, 이번엔 그렇게까지 머리 아플 필요는 없다. 단순 반복되는 노동을 그저 하면 되니 말이다.




막내가 마을 구경을 시켜주다

     

이장님네엔 4명의 자녀들이 있다. 첫째부터 셋째까진 20대의 나이대로 고만고만하지만, 막둥이인 민지는 10살 정도의 터울이 있다. 늦둥이이자, 이 집안의 보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작년에 도보여행 중에 이곳에서 2박 3일을 머물며 민지와 나름 꽤나 친해졌었다. 

그래서 일 년 만에 다시 보지만 이때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는데, 되려 “누구세요?”라고 말하더라. 그 반응이 무안하고도 당황스러웠다. 어찌 보면 작년에 한 번만 봤던 사람이니 당연한 반응이라고나 해야 하려나. 그런 어색함을 조금이라도 덜려고 고기를 구워 먹을 때, 장난을 걸었다. 과자를 먹고 있었기에 과자를 달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과자가 먹고 싶다고 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또 금세 친해지더라. 민지도 그런 장난에 맞춰 장난을 걸어왔고, 그 덕에 난 후렌치파이 3개와 과자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장난으로 준 것이니 민지는 줬다가 바로 뺐긴 했지만 말이다. 

고기를 다 먹고 나니 민지가 림보게임을 하자고 하더라. 줄을 잡아줄 사람이 없었기에 막상 림보게임은 할 수가 없었고, 그냥 밖으로 나와 함께 걸었다. 막둥이는 마을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소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소를 눈앞에서 바로 보긴 처음이다. 송아지 한 마리는 연신 젓을 빨고 있었고 다른 소는 새끼를 낳느라 끙끙대고 있었다. 그 중에 한 소에게 다가가니 크고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라. 왠지 모를 서글픔이 잔뜩 묻어 있어 보였고,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곳을 둘러보고 막둥이는 “나의 놀이터가 있는데 그리로 가봐요”라며 데려다 준다. 뭐 특별한 게 있을까 했는데, 그냥 도로 공사현장이었다. 34번 국도를 4차선으로 확장공사를 하고 있는 현장이었다. 그 도로 바로 옆엔 작은 텃밭이 있었는데, 그것도 자기네 거라고 말하더라. 거기서 조금 더 들어가니 돌탑이 있었다. 산속도 아닌데 웬 돌탑일까? 아마도 막둥이와 함께 걸었던 길 이름이 ‘서낭골길’이니 만치, 서낭당과 연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올핸 작년과는 달리 민지가 마을의 길라잡이가 되어준 덕에 마을을 여기저기 둘러볼 수 있었다. 나에겐 그저 작은 마을로 느껴졌지만, 민지에겐 환상이 가득한 동심의 낭만이 짙게 배어있는 나라일 것이다.                



▲ 그땐 공사 중이었지만, 지금은 국도가 완성되어 이장님네 마을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됐다.




초평저수지그곳에도 삶과 애환이 있다

     

집으로 돌아와서 민지는 ‘투투’라는 큰 오빠 친구와 놀고 난 저수지로 내려왔다. 작년엔 밤에 봐서인지 선착장이 크고 넓어 보였으며 사람도 많아 불야성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한낮에 보니 그런 느낌은 전혀 없더라. 여기저기 낚시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돌아다니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님이 오시더라. 좌대를 청소하러 가니깐 같이 가서 그곳에서 한숨 자라고 하신다. 쪽배를 타고 출발하려는데 민지도 오겠다고 연락해오더라. 그래서 어머니와 민지, 그리고 나까지 셋이서 배를 타고 저수지 안으로 들어갔다. 

저수지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가려진 부분을 넘어서까지 물이 가득 고여 있었으니 말이다. ‘빙산의 일각’이란 말이 있듯이 초평저수지도 ‘니가 작년에 얼핏 본 모습만으로 나를 다 봤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착각일뿐이야’라고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쪽배도 처음 타봤다. 살랑살랑치는 물결을 따라 나아가고 그에 따라 시원한 바람이 내 품 안으로 들어온다. 지금은 모터를 사용하기에 편하게 갈 수 있지만, 예전엔 손수 노를 저어 다니셨다고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작은 배에 몸을 의지한 채 좌대와 좌대 사이를 이동하셨을 어머니의 젊은 날의 모습이 보이는 듯도 했다.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22살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시집을 온 이야기, 신혼여행을 마치고 오자마자 산처럼 쌓여 있는 일을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는 이야기,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새 이렇게 나이가 훌쩍 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내 마음 한 구석이 먹먹해지더라. 

나에게 있어 농촌은 한 번씩 찾아가는 곳이기에 한껏 이상화되어 있다. 그러니 자꾸 자연경관 어쩌고저쩌고, 유유자적 어쩌고저쩌고, 낭만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를 할 수 있었던 거다. 돈 꽤나 가진 도시양반들이 농촌을 휴양지로 소비하듯이, 나 또한 그런 모습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어머니 이야기를 통해서나, 국토종단 당시에 경천리에서 만났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서나 재구성해보면, 이곳은 생활의 터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보니, 부조리한 상황들이 있고,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버거운 나날들이 있는 것이다. 그저 삶의 희노애락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볼 수 있으면 된다.                



▲ 초평저수지는 굽이굽이에 있어 제대로 보기 위해선 하늘에서 봐야 하고, 둘러보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초평저수지에 추억 하나 새기고 오다

     

좌대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다른 좌대를 청소하러 가셨고 나와 민지만 남았다. 좌대는 저수지 위에 떠있는 단독주택이라 보면 되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섬』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 이제부턴 좌대의 구조를 살펴볼까?

처음엔 그저 물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네 개의 쇠파이프로 바닥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호수의 흐름에 따라 결국 흐르고 흘러 모든 좌대들이 한 군데에 모인다고 알려주신다. 

좌대에 올라서면 지붕으로 막혀진 방 한 채, 그리고 그 앞엔 쇼파 두 개가 놓여 있다. 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미닫이문으로 되어 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전구와 이불, 그리고 전기히터가 설치되어 있다. 전기를 끌어올 수 없기 때문에 배터리가 놓여 있다. 창문이 달려 있으니 볕 좋은 날에 좌대에 오르면 수상가옥과도 같은 묘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밖으로 나오면 왼편엔 화장실이 있어서,  영화 『섬』에서 나오는 좌대처럼 집 안에서 바닥을 들어내고 볼 일을 보는 것과는 다른 구조라 할 수 있다. 

낚시를 하는 사람에게도, 친구들끼리 모여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은 사람에게도 좌대에서의 하룻밤은 좋을 것만 같더라. 물 위에서 하룻밤 보내는 기분은 어떨까? 

좌대 구경을 마치고 쇼파에 앉아 민지와 끝말잇기를 하며 놀았다. 해는 서서히 서쪽으로 저물어 가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 있으니 마음에 어떠한 동요도 없더라. 평소 같았으면 시간을 계속 체크하며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조급해 했을 테지만, 그곳에선 완전히 시간의 구석에서 벗어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계를 전혀 확인도 하지 않고 무작정 시간을 보내고 있다. 

조금 기다리니 큰 아들이 날렵하게 생겨서 속도도 장난이 아닌 고속정(?)을 타고 오더라. 어머님은 그걸 타고 저수지를 한 바퀴 돌아보라고 하신다. 그때 시간을 보니 벌써 6시가 넘었더라. 빠른 보트를 타고 석양빛이 가득 차오르는 초평저수지를 한 바퀴 돌았다. 그 광경만큼은, 그 순간만큼은 어느 것에도 비길 수 없을 정도로 최상의 것이었지만, 이제 다시 헤어져야만 하는 시간이 오기에 아쉬움도 함께 피어올랐다.                



▲ 이런 식으로 되어 있고, 좌대 안은 좌대마다 다르게 세팅되어 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짐을 하다

     

청주터미널에서 전주로 향하는 마지막 차는 7시 30분에 출발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부랴부랴 짐을 챙겨들고 나왔다. 그때 어머님이 고춧가루와 깨를 챙겨주시더라. 어찌나 감사하던지. 

아침에 출발할 때만해도 어색하면 어쩌나, 괜히 가서 민폐만 끼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어느덧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오고 보니 오늘 하루가 꿈만 같이 느껴진다. 어색함과 아쉬움의 극단적인 감정 변화만큼이나 오늘 하루는 ‘멋진 하루’였기 때문이다. 

이장님네 가족의 탁월한 점은 바로 그와 같은 ‘친숙함’, ‘친화력’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 따스함 덕분에 오는 내내 ‘앞으로도 매년마다 찾아가서 부대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더라도 함께 고추를 심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렇게 이 인연을 이어가며 살 수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청주에서 전주로 가는 막차는 만원이었다. 전주로 가는 사람보다 유성으로 가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서서 가야 했지만, 하루 종일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으니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고속버스에서 서서 가보겠는가. 절로 희망이 어리고, 입술 가득 미소가 띄어지더라. 여러모로 벅찼고 즐거웠던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 간다. 



▲ 작년엔 걸어서, 올핸 버스를 타고 청주에 갔다. 여행이 맺어준 인연들. 그만큼 재밌는 삶.





목차     


1. 다시 고추를 심으러 가는 이유?

남부시장에서 보는 우리네 일상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 내가 가는 까닭

추억에 머문다는 것의 의미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이분법에 대해     


2. 이제 나도 좀 변해볼까?

청주터미널에서 초평저수지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세계가 있다

불광불급의 삶의 자세

이제 나도 좀 변해볼까?     


3. 초평저수지에 담긴 우리네 이야기

고급문화와 저급문화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노동 후엔 모든 음식이 천상의 음식이 된다

막내가 마을 구경을 시켜주다

초평저수지, 그곳에도 삶과 애환이 있다

초평저수지에 추억 하나 새기고 오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짐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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