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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May 03. 2017

다시 고추를 심으러 가는 이유?

2010년 초평에서 고추 심기 1

잠에 푹 빠져 있어야 할 새벽인데 매시간 눈이 떠진다. 그래서 시간을 확인하고 있다. 5시 30분에 알람을 맞춰뒀으니 그 알람소리에 맞춰 일어나면 되는데도 이상하게 깊은 잠을 잘 수가 없다. 

그건 알람소리를 못 듣고 잘까봐서 그런 건 아니다. 설레고 기대되기 때문이다. 소풍 가기 전야에 들뜬 마음으로 설잠을 자게 되듯 나도 그런 것이다. 1년 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자꾸 벅차다. 뒤척이다가 5시 20분에 일어났다. 아침 공기는 상쾌했고 기분은 유쾌했다. 뒤척였다곤 하지만 피곤하지는 않았다.  


▲ 새벽의 아직은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달린다. 그래도 남부시장은 열기가 가득하다.

        


      

남부시장에서 보는 우리네 일상

     

밥을 먹고 옷을 챙겨 입고서 집을 나섰다. 힘껏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봄이 왔는데도 아직 아침 바람은 서늘하다. 하긴 요 며칠 이상하게도 쌀쌀했었다. 그 여파가 아직도 있는 걸 테다. 

남부시장 천변을 따라 달린다. 남부시장은 조선 시대부터 전국 3대 시장(대구, 공주) 중 하나로 이름이 높았던 곳이다. 역시나 남부시장하면 새벽시장이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모여 하나라도 더 팔려고 소리치고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이야기를 나눈다. 말과 말이 부딪히고 어우러져 우리네 일상을 만들어내는 공간이야말로 새벽시장의 정경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산다는 건 저런 옥신각신, 왁자지껄함이 아닐까? 마트도 시끄럽긴 매한가지이지만, 시장과 확연히 다르다. 시장의 시끄러움은 판매자와 구매자가 함께 내는 화음인데 반해, 마트의 시끄러움은 판매자의 일방적인 고성일 뿐이니 말이다. 그러니 시장의 아우성은 양쪽이 함께 소리치고 응답하는 ‘소통’인데 반해, 마트의 시끄러움은 한쪽만 일방적으로 소리치는 ‘소음’이라 할 수 있다. 

우리네 일상이란 이와 같은 왁자지껄함 속에서 꽃 핀다고 할 수 있다. 어우러짐이 때론 상처를 남기기도 하지만, 그 상처가 두려워 혼자만의 세상에 침잠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일 것이다.                



▲ 2008년 9월부터 나의 발이 되어주고 있는 녀석. 이름을 하진이라 지었다. 어느 곳이든 함께 가자는 의미로 말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내가 가는 까닭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어디에 가냐고?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당신은 우연을 믿는가? 필연을 믿는가?’라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갑작스럽다고 당황해하지 말고 자신이 평소에 어느 쪽의 생각에 가까운지 한 번 되돌아보면 된다.           



2009년 5월 1일 금요일이었어(갑자기 대화체 말투를 쓰니 황당할 거다. 근데 이건 과거 회상이기에 문체를 바꿔서 편안히 써보려 한다). 황금연휴라며 여기저기 시끄럽던 때였지. 

그 때 난 도보여행 중이었고 그 날 코스는 ‘청주→증평’이었어. 그런데 좀 더 빨리 걸어 월요일에 친구를 만나야겠단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걷는 목표량을 최대한 늘리기로 했지. 이번 여행 자체가 ‘우연한’ 계기에 의해 하게 된 것이고 하루 경로도 ‘우연히’ 설정된 것인데 거기에 난데없이 또 다른 ‘우연’이 끼어 든 거야. 목표가 생겼으니 그저 열심히 걷는 수밖에는.  

해가 질 때까지 걸어 도착한 곳은 초평 면사무소가 있는 곳이었는데 경찰관 아저씨의 도움으로 ‘우연하게’ 저수지 근처의 마을회관에서 자게 되었지. 그 때 이장님 댁엔 사람들이 참 많았거든. 알고 보니깐 다음날 고추를 심는다는 거야. 이런 상황을 꿈만 꿨었는데 진짜 겪게 될 줄은 몰랐어. 그런 ‘우연’ 덕에 계획과 상관없이 다음 날 도보여행을 떠나지 않고 함께 고추를 심게 됐어. 도보여행 중 최고의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바로 이런 이야기인데 난 ‘우연’을 강조한데 반해 어떤 이는 이걸 ‘운명’이고 ‘인연’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뭐 각자의 관점이 있으니깐 시시비비를 가릴 필욘 없다. 그런데 그 곳에서 자게 된 것도, 그리고 그 다음날이 고추 심는 날이라는 것도, 내가 고추를 심게 되어 하루 더 머물게 될 것이라는 것도, 그 모든 게 ‘우연’을 가정하지 않고선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다.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우연에 의한 것이었듯이, 내가 도보여행을 떠난 것도, 초평면에서 고추를 심게 된 것도 우연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 작년 도보여행 중 우연하게 고추를 심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처음으로 심어 놓은 고추들.




추억에 머문다는 것의 의미

     

어느덧 그로부터 1년이 흘렀다. 국토종단의 기억이 희미해진 지금 초평 저수지의 추억이 제대로 기억날 리 없다. 단지 남아있는 인상이란 포근하고 행복하여 몸은 고됐지만 즐거웠다는 피상적인 느낌뿐이다. 

그래서 『얼렁뚱땅 흥신소』라는 드라마에서는 ‘기억은 추억을 배신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추억은 과거의 기억 중 좋은 부분만을 확대하여 이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불우한 어린 시절도 곧잘 ‘돌아가고 싶은 시기’로 변모되기도 하고 첫 사랑의 추억은 ‘아름답기만 하던 한 때’로 눈물을 자아내기도 한다. ‘비극’을 제거한 순백의 ‘희극’만 가득하던 때로 재창조된 왜곡된 기억이야말로 추억의 다른 말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좋기만 할까? 나의 생각과 너무 달라서 실망하진 않을까? 

그렇다, 지금 나는 1년 만에 초평으로 고추를 심으러 가고 있는 거다. 앞에서 이야기한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초평으로의 여행은 ‘도전’과도 같은 것이다. 그땐 좋았을지라도 1년이 흐른 지금은 어색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씁쓸한 기억은 아름다웠던 과거의 추억을 지워버릴 것이다. ‘좋은 추억으로 남겨두자’라는 말은 바로 이런 때 유용하다. 추억으로라도 남겨두면 두고두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추억이 많아진다는 것은 현재가 즐겁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현재에서 아무런 의미도 못 찾으며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내지 못해 과거의 추억에만 머물려 한다. 그래서 ‘내가 과거엔 어쩌고 저쨌지’하는 따위의 추억담을 자랑삼아 말할 뿐이다. 추억담을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모습 속엔 현실에 대한 불안, 현재의 자신에 대한 못마땅함이 숨어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난 아직 초평에서의 일을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진 않다. 비록 ‘기억이 추억을 배신할지라도’ 새로운 기억으로 이 인연을 가꾸어가고 싶었기에 이렇게 다시 패달을 밟아 나가기로 한 것이다.                 



▲ 추억이 사그라들지라도, 용기를 내어 가본다. 막둥이는 일년 사이에 어떻게 변해 있을까?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이분법에 대해

     

근데 여기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건 바로 노동에 대한 생각의 변화다. 

‘글 꽤나 읽었다는 놈들은 말이 틀린 법이지.’라는 대사가 『전우치』라는 영화에 나온다. 글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게 출세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세상이기에 조선시대의 학자들을 한껏 웃어재끼는 전우치의 명대사다. 

그런데 지금이라고 다르던가? 정신노동은 고귀한 것이고 육체노동은 저급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노동자․농민은 괄시당하고 학자․기자는 대우 받고 존경 받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이기에 블루칼라 아버지는 자식을 화이트칼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내 자식은 기필코 사무실에서 일하게 만든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게 말하고, 어떤 개그맨은 “지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곳에서 일해야 한다”고 장난스레 말한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가치를 내팽겨 치며 거부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이런 사회 분위기가 올바른 것일까? 세상엔 각자의 존재 이유가 있듯이 육체노동은 육체노동대로, 정신노동은 정신노동대로 의미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득의양양해서도, 어떤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기죽을 필요도 없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현실은 직업에 대한 사회적 대우와 사람들의 인식이 다른 걸 당연한 듯 받아들이도록, 그런 차별을 정당화하도록 끊임없이 강요하고 있다. 

바로 이와 같은 관념을 전복시키자는 거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몸을 움직여 일하는 정직한 노동을 경험하며 ‘소금꽃’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육체노동은 숭고하다’라고 떠벌린들, 경험하거나 실천하지 못하면 전우치에게 ‘글 꽤나 읽었다는 놈들은 말이 틀리다니까’라는 핀잔을 듣게 될 것이다. 



▲ 단순한 인식의 차이가 아닌, 현실에서 이미 차별은 진행 중이다.




목차     


1. 다시 고추를 심으러 가는 이유?

남부시장에서 보는 우리네 일상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 내가 가는 까닭

추억에 머문다는 것의 의미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이분법에 대해     


2. 이제 나도 좀 변해볼까?

청주터미널에서 초평저수지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세계가 있다

불광불급의 삶의 자세

이제 나도 좀 변해볼까?     


3. 초평저수지에 담긴 우리네 이야기

고급문화와 저급문화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노동 후엔 모든 음식이 천상의 음식이 된다

막내가 마을 구경을 시켜주다

초평저수지, 그곳에도 삶과 애환이 있다

초평저수지에 추억 하나 새기고 오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짐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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