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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Feb 08. 2017

사라진 초평저수지를 찾아서

2009년 국토종단 28 -  5월 1일(금)

오늘부터 연휴의 시작이다. ‘노동절-토요일-일요일-평일-어린이날’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연휴기간인 것이다. 직장마다 상황은 다르겠지만 평일인 월요일에 쉴 수만 있다면 5일간 쭉 이어서 쉬게 되는 셈이다.                



▲ 청주를 통과해서 걸어간다. 청주는 어떤 도시일까?




철들지 마란 말야 

   

황금연휴를 코앞에 두어서인지 청주를 걸어서 지나는 길목의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외곽도로를 따라 처음 와본 도시인 청주를 걸어간다. ‘직지의 도시 청주’란 안내물이 여기저기 즐비하다. 

작년에 임용고시를 경기도에서 봤었는데 내 뒤에 앉았던 분들이 ‘청주대’ 출신들이었다. 원래 시험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얘기도 하지 못하고, 아는 사람일지라도 쭈뼛쭈뼛 모른 체 하는 게 예의라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같은 경쟁자이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한 아름 안고 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땐 교육학 시험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초콜릿을 먹으며 뒤를 돌아보고 “초콜릿 드실래요?”라고 물어보며, 말문을 트게 되었다. 그랬더니 자연히 이런 저린 말을 주고받게 되어 청주대 출신임을 알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그런 인연으로 ‘청주’라는 곳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만큼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다르다. 늘 얼핏 들으며 생각은 할 수 있지만, 누군가를 만나 얘기해본 것만으로도 낯선 곳이 익숙한 곳으로 탈바꿈하니 말이다. 



▲ 황금연휴를 눈 앞에 둔 5월 1일의 노동절. 그날도 난 열심히 걸어간다.



그런데도 외곽도로만을 쭉 따라 걷다 보니, 청주에 대해선 별다른 느낌이 없더라. 이럴 줄 알았으면 고인쇄박물관에라도 가서 좀 더 탐구하는 게 나을 뻔했다. 역시나 아직도 그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에만 방점을 찍고 있는 모습이다. 

시내를 벗어나 한산한 길로 접어들었다. 거기에 있는 초등학교에선 체육대회가 한창이더라. 지체할 시간이 없지만 그곳만큼은 그냥 지나쳐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학교에 들어가 아이들이 체육대회를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에게도 저런 시기가 있었다. 그저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해서 알고 싶고 해보고 싶던 순간들이 말이다. 공굴리기를 할 때에도 최선을 다했고, 아이스크림을 한 입에 베어 물어도 그렇게 행복했던 시절이 말이다. 그에 반해 확실히 철이 든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건 일상이 주는 행복을 잃어버리고 시큰둥해지는 것 같다. 지금의 나처럼 굳이 일상의 행복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으면 그저 생활인이 되어 무표정하게, 무감정적으로 살아가기에만 바쁘다. 

아이들의 환한 얼굴을 보니 부랴부랴 걷기에만 바빴던 내 마음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철들지 마란 말야’라는 구호가 그저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 청주의 율량천을 건너며.




의식 속에서 지워버린 초평저수지

     

원래대로라면 증평까지만 걸으면 딱 좋았다. 그 때 이미 4시가 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7시 30분이 되어도 환하다는 걸 공주 경천리에서 경험해봤던 터라 더 걷기 시작했다. 국도 34번 길, 삥 돌아서 가면 초평면사무소에 도착한다. 거리를 잘못 계산해서 1시간 30분 정도 걸으면 면에 도착할 줄 알았다. 그런데 한참을 걸었는데도 도무지 끝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저수지가 보여야 거의 도착한 것일 텐데 저수지가 안 보인다. 그 때 생각했다. ‘하도 이 근방에 도로가 새로 생기고 하니까 저수지도 아예 없애 버렸나 보다’라고 말이다. 사대강 사업, 새만금, 청계천 복원 등 자연을 끔찍하게 훼손하는 사례가 많다보니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던가 보다. 이미 지도를 보면서 왔기 때문에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땐 그와 같은 합리화를 할 정도로 마음이 다급해져 있었다. 

그런데 얼마 걷지 않으니, 의식 속에서 지워버리고 스스로 합리화한 사실을 알게 됐다. 거리 계산을 잘못해 놓고선, 그 계산에 맞춰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버젓이 있는’ 멀쩡한 저수지를 지워버리려 한 것이니 말이다. 역시 사람은 생각대로 현실도 짜 맞추려고 한다.                



▲ 더 많이 걸어야지만 초평저수지가 나오더라. 세상에 엄연히 있는 저주지를 내가 없애버렸다니.




늦은 저녁까지 계속된 도보여행 

    

저수지는 매우 넓었고 그 위에 집을 띄워 놓고 낚시질하는 강태공들이 많았다. 그 때부터 내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이미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차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운행할 정도로 금세 어두워졌다. 밤 도보여행은 위험해서 되도록 자제해 오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쩔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전속력으로 걸었다. 익산 함열에 갈 때도 이와 같은 경우였기에 그 다음날 무진장 고생했던 안 좋은 기억이 생각나더라. 하지만 어쩌랴? 이렇게라도 서둘러 가지 않으면 도로 한복판에서 밤을 새야한다. 거의 8시가 되었을 때 드디어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어딜 봐도 십자가는 보이지 않더라. 그때의 절망감이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최악의 기분이었다.                



▲ 지금은 새도로가 뚫렸지만, 그땐 구도로여서 한참을 걷고 또 걸어야 했다.




교회는 찾았으나 잠자리를 얻지 못하다

     

그런데 한 코너를 돌자 홀연 빨간 십자가 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 엉겁결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무 것도 없을까봐 걱정을 한 가득 했던 터라 빨간 십자가만 봐도 영원의 안식을 얻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학자인 연암 박지원은 드넓은 요동벌판을 보고 한번 울어재낄 만 하다고 ‘울만한 곳에 대한 이야기(好哭場論)’을 펼쳤다지만 난 십자가를 보고 감격에 겨운 나머지 한바탕 울어재끼고 싶었다. 

그 때부터 힘껏 걸어 교회에 도착했다. 이젠 목사님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기만 하면 된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바로 허락해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난처한 표정을 지으시더라. 교회가 꽤 커서 작은 방들이 있을 법한데도 잘 곳이 없다며 다른 곳을 알아보라고 하신다. 이미 이와 유사한 경험을 꽤 많이 했기에 이런 상황에선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피차 난처해지기 때문이다. 그때 목사님은 근처에 다른 교회가 있다며 소개해주시더라. 그러면서 “그 교회엔 방들이 많아서 자는 데엔 문제가 없을 거예요”라는 말씀을 덧붙여 주셨다. 

어찌되었든 이 작은 마을에 교회가 두 군데나 있다는 건 희망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하나 남은 희망이라도 부여잡고자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보니 파출소까지 있더라. ‘만약 그 교회까지 안 된다고 할 경우 저 파출소에 들어가 무작정 부탁해봐야겠다’는 방안까지 생각해뒀다. 한비야씨도 이와 같은 상황에선 경찰에게 얘기하여 숙직실에서 잔 경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후의 수단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이번 교회에선 꼭 허락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 그땐 어두워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이건 다음뷰의 사진. 저 멀리 빨간 첨탑이 보이는 순간, 기쁨의 비명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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