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국토종단 27 - 5월 1일(목)
이렇듯 아무 기약 없이 다닌다. 아는 사람이 있어 언제나 눈치를 봐야했던 곳이 아닌 완전히 낯선 사람만 있어 자유로운 곳으로, 미래를 위해 늘 희생하기 바빴던 오늘을 살아야 하는 곳이 아닌 언제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이렇게 다닌다.
여행을 하다 보면 늘 예기치 못한 상황에 휩쓸리게 되는데, 그때 분명하게 느껴지는 건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과 같이 ‘던져진 존재’라는 자각이다. 그건 이미 내가 있기 전부터 어떤 상황들이 있었고, 어떤 흐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단지 나는 거기에 갑자기 던져진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흐름을 이해하고, 상황을 받아들이고 뚜벅뚜벅 걸어갈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도보여행은 던져진 존재가 던져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나는 겁이 많았다. 그러니 모든 것을 계획대로만 하려 했고, 갑작스레 일어난 일들을 싫어했었다. 그러니 누군가 뜬금없이 전화를 해서 “지금 뭐하냐? 심심한데 놀러나 갈까?”라는 말을 할라치면, 극단적인 거부부터 하고 봤었다. 이미 계획해 놓은 게 있는데 그것을 벗어난다는 게 공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니 삶의 긴장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만큼 나에게뿐 아니라, 남에게도 빈틈없는 잣대를 들이댔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하면서, 아니 이런 여행을 떠났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나에겐 ‘지하철 2호선과 8호선이 충돌하는 것’같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 보고자하는 마음이 녹아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계획이 아닌 무계획으로, 완벽하게 갖춰진 삶의 방향이 아닌 좌충우돌하며 부대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뜻밖의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고 헤쳐 나가는지 지켜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근본엔 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기약이 없기에 그만큼 다채롭고 흥미진진하다. 바로 일분일초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긴장감이라 할 수 있다. 그 긴장을 타고 오늘 하루도 노닐어 보자.
일요일에 40Km를 단번에 걸어간 이후, 너무 무리하면 다음날 여행에 방해가 된다는 걸 알았기에 욕심 없이 즐기며 걸었다. 주위의 풍경도 맘껏 감상하고 사람들과 얽히고설키며 걸어왔던 것이다. 목표에 대한 부담이 없으니 정말 좋다. 매순간이 오로지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여태껏 이미 정해진 정답에 맞춰 살거나, 남이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살아왔었다. 그것만이 잘 사는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에 대한 반감 때문일까. 규격화된 삶이 아닌, 자유분방한 삶으로, 남을 따르는 삶이 아닌 내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려 하니 말이다.
이런 게 바로 『장자』라는 책에 나오는 ‘소요유(逍遙遊)’이지 않을까? 소요유를 잘못 이해하면 세상을 등한시한 채 자유를 구가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노장사상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엔 비루한 세속을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것이기에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흔히 얘기하듯 노장사상을 유가사상과 대비하여 자연주의 사상이라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실제는 『노자』라는 책만큼 국가 통치자를 위한 사상서도 없으며, 『장자』라는 책만큼 사람들의 소통을 중시한 사상서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소요유도 그런 식으로 해석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그건 치열한 삶 속에서 자신의 길을 가는 도중에 느껴지는 오만가지 감정을 몸소 느끼며 누리게 되는 여유로움을 말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목표가 생겼다. 월요일까지 여주에 도착해서 친구 두 명을 만나 회포를 풀고 화요일엔 집에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행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도중에 그만 두는 이유는 다음 주 목요일에 예비군 훈련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어찌되었든 그 덕분에 중간 점검도 할 수 있고, 쉴 수 있는 시간도 생겼다고 생각하련다.
그렇게 정리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친구들과 함께 계획을 짠 게 아니라 나만의 생각에 불과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주 월요일에 시간이 괜찮은지 물어봐야만 했다. 그랬더니 다행히도 두 명 모두 괜찮다고 하더라.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월요일 저녁까지 여주에 도착할 수 있느냐다. 대충 거리를 재보긴 했지만 그게 4일 만에 걸을 수 있는 거리(확인해 보니 거리는 112Km로 4일 만에 걷기에는 빠듯한 거리였다. 그러려면 4일 동안 죽을동 살동하며 무작정 걷기만 해야 한다)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더욱이 내 체력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줄지도 미지수였다.
어찌 되었든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괜히 맘이 바빠지더라. 역시 목표란 사람을 결과론적인 존재로 만든다. 이렇게 되면 여주까지 가는 길은 별로 기억에 남지 않는 고된 길로만 남을 것이고, 그 시간은 그저 ‘여주를 가기 위해 들른 곳’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을 것이다. 결과를 중시하면 중시할수록 과정은 어떻게든 빨리 스쳐 보내려 안간힘을 쓰게 된다. 과정은 그저 결과를 위해 한시적으로 견뎌야만 하는 순간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빨리 지금만 지나라’라는 마음이 생겨난다.
그러고 보니 학창 시절이 떠오른다. 그땐 음악실기로 레코더를 학생들 앞에서 불어야 했었는데, 그 전날부터 공포증은 시작되어 심장은 벌렁벌렁 뛰기만 했다. 남들 앞에서 불러야 하는 게 힘들었던 것인지, 혹여나 틀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 때문에 그랬던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정말 그 순간은 어느 순간에 비할 수가 없이 싫고도 힘겨웠다. 그러니 당연히 ‘빨리 내일 이 시간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미 실기시험은 끝나도 좋은 결과가 나왔든, 나쁜 결과가 나왔든 그래도 편안하게 있을 테니 말야’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과주의는 이처럼 과정 따위는 늘 괴로움의 순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미 나도 그 순간을 이미 여러 번 경험했으면서도 그런 어리석은 상황에 휩쓸리고 있었던 것이다.
목표가 정해졌으니, 속도를 높여야만 한다. 며칠 전만해도 ‘일요일엔 아침부터 교회에 사정을 이야기해서 자리를 잡고 빨래도 하고 예배도 드리며 편히 쉬어야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그 지방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근거리에서 들을 수 있고 그만큼 여행은 풍족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실천도 하기 전에 이렇게 깨져버렸다.
마음 단디 먹고 오늘 하루 여행을 즐겁게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