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국토종단 26 - 4월 30일(수)
목사님은 아들을 학교까지 태워다 준다며 나에게 같이 나가자고 하셨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사택에 자게 해준 것도 감사한데, 그렇게 챙겨주기까지 하니 얼마나 행복하던지. 그 덕에 연기군 일대를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이미 연기군 일대는 행복도시 건설 사업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유독 한 군데만 원형이 보존되어 유지되고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부안 임씨 가묘’다. 이곳은 부안 임씨들이 모여 살았던 집성촌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부안 임씨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그들의 가묘만이 덩그러니 금강에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서있다. 사람이 떠난 곳에 남은 가묘는 무슨 의미일까? 이들은 행복도시개발로 흩어진 걸까, 도시화로 인해 흩어진 걸까?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풍수지리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그냥 딱 봐도 그곳은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적어도 볕이 잘 들고, 배산임수의 지형에 있어 사람이 살기 좋으면 명당이라는 기준으로 본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부안임씨가묘에서 내려다보이는 금강의 풍취는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이 맑고도 싱그러웠다.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에 정자에 대자로 누워 한숨 잘 수 있다면, 정말로 신선이 부럽지 않을 거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게 바로 홀로 즐김의 극치이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정자의 이름이 ‘獨樂亭’이더라.
그 다음에 간 곳은 금강이다. 그 곳엔 이른 시간인데도 낚시를 하시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8개의 낚시대를 설치해 놓았고 그 밑에 10개 정도의 다른 낚시대도 있더라. 이 정도면 ‘기업농’에 비견될 만한 ‘기업 강태공’이 아닐지^^ 혹시나 하고 낚시 바늘을 살펴보니, 아쉽게도 굽어있더라. “할아버지! 문왕에게 발탁되긴 틀렸어요.” 금강은 습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비되지 않은 자연스런 풍광이 좋아 보였다.
교회 주변을 한 번 천천히 둘러 봤다. 기분이 상쾌하다. 목사님과 함께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아침을 먹고 과일까지 맛있게 먹었다. 겨우 12시간 정도만 함께 했을 뿐인데 금세 친해진 느낌이다. 사모님과도 친해져서 떠나려할 땐 “유성에서 결혼식이 있어 뷔페를 먹는데, 같이 가실래요?”라고 점심약속에 초대까지 해주시더라. 지금의 난 그런 어색한 자리를 좋아하고, 무언가 새로운 인연이 엮이는 자리를 좋아하기에 충분히 갈 수도 있지만, 아직까진 ‘하루하루 걸어서 여행해야 한다’는 큰 틀에서 벗어난 건 아니기에 감사하다고 인사만 하고 나왔다.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 줄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근데 하루가 지난 후에 생각해 보니, 솔직히 그 제안을 거절한 것이 못내 후회가 되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게 쉽지 않고, 그렇게 얽힘으로 새로운 인연으로 확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기간이 늘어날까봐 노심초사했었는데, 막상 하루가 더 늘어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30일을 하건, 31일을 하건 별 차이가 없는데도 아침엔 너무 밴댕이 속 같았다. 누구 말마따나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절실했다.
마지막까지 환대해주시던 목사님과 사모님에게 감사한 마음과 함께 어제 살짝 배신 때렸던 일이 떠올라 미안했다. 목사님과 사모님 정말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구요, 머지않은 시일에 꼭 찾아뵐게요. 그땐 전혀 다른 교회에 계시겠죠.
이 날 아침을 먹을 때 티비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하고 있었다. 봉하마을에서 나오는 장면에서부터 촬영하기 시작하여 어느 고속도로를 타고 어느 휴게소를 거쳐 검찰청에 들어오는지 일거수일투족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아직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혐의도 갖다 붙일 수 없다. 그런데 이미 언론의 보도 방향은 그를 범죄자로 다루고 있었으니 말이다.
‘세 사람이 호랑이를 만들어낸다(三人成虎)’는 말이 있다. 세 사람만 모이면 한 사람의 이미지를 조작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뜻이다. 한 사람이 하는 말은 그 사람의 사견이 될 뿐이고, 두 사람이 하는 말은 짜놓은 각본과 같은 의미를 지니지만, 그럼에도 세 사람이 하는 말은 전혀 다른 위상을 지니게 된다. 사람의 인식 속엔 세 사람 중 한 명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주위의 상황에 쉽게 휩쓸리는 존재다. 세 명이 같은 얘기를 하건, 백 명이 같은 얘기를 하건 충분히 오류일 수 있다는 뜻이고 다수결엔 함정도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두 얼굴』이란 다큐에서는 상황에 인간이 얼마나 휩쓸리기 쉬운지 실험을 했다. 5명의 학생이 시험을 보는데, 이 중 4명은 연기자로 시험장에 연기가 가득 퍼졌음에도 절대로 미동도 하지 말고 앉아서 문제를 풀 것을 요청받았다. 그때 나머지 한 명은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는 게 이 실험의 핵심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땐 연기가 난다는 건 위급한 상황이라는 걸 암시하기에 살기 위해서라도 시험을 그만두고 튀어나갈 거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험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연기가 나기 시작하니 실험자는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문제 풀기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연기가 더욱 짙어져 시험지조차 안 보일 정도가 되자 실험자는 더욱 더 겁에 질린 모양새다. 그럼에도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까지는 엄청난 결단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위 실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직감이나 판단이 얼마나 주위에 휩쓸릴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거다. 자신은 어떤 상황이든 올바른 판단을 하고, 올바른 선택을 할 것만 같지만 주위 상황에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삼인성호’라는 말은 정말로 무시무시한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하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 할 것 그를 ‘호랑이’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몸이 피곤해서 살살 걸었다. 오늘은 걷는 흥이 안 난다. 날씨까지 뜨거우니 더욱 고통스럽다. 5시가 넘어 교회팻말이 보여서 조금 들어가니 교회가 있다는 표시가 다시 보이더라. 그래서 한참 걸어 들어갔는데도 교회는 보이지도 않았다. 마을이 그렇게 큰 게 아니니 못 찾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지금은 없어진 건가.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마을회관이 보이기에 그곳으로 갔는데 마을회관은 잠겨있었다. 그래서 마을 입구에 있는 벤치로 가서 앉아 있었다. 어떤 분이 오시기에 마을회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니, 통장의 허락을 받아야 한단다. 그래서 바로 통장님 댁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그런데 ‘역시나’ 통장님은 안 계시더라. 이거 완전히 ‘공주 경천’ 때와 판박이다. 무작정 기다릴 생각으로 다시 마을 입구 벤치로 와서 앉았다. 그 순간 내 자신이 어찌나 처량하던지. ‘아~ 나도 집에 들어가 편안히 쉬고 싶다.’ 사람들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자꾸 맘은 요동치더라.
‘지금이라도 더 걸어갈까?’ 한참을 고민하다고 결국 길을 나섰다. ‘교회가 보이면 무작정 부탁해야지’라는 생각으로 가고 있는데 저 멀리 꽤 큰 교회가 보이더라.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최근에 지어진 것 같은 으리으리한 건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눅들 필욘 없었다. 거절당하면 다시 걸어서 가면 되니 말이다. 근데 이 교회엔 작은 방들이 여러 개 있어서 거절당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교회 목사님은 사택에서도 재워주시는데 좀 더 크고 방도 많은 이 교회에서 쫓아내기야 하겠는가?’라는 확신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사모님께서 나오셨다.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이런 저런 핑계를 한참이나 대신다. 무수한 말들을 핑계라고 판단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시험기간이라 아이들이 공부하러 교회에 오니, 머물 수 있는 방이 없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도 아이들이 갈 때까지 같이 공부하다가 다 가면 자겠다고 말했다. 다년간 임용공부를 하던 마인드로 책이라도 더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모님은 난색을 표하시더라. 낯선 사람이 있으면 공부하는데 방해가 된다나 뭐라나.
결국 거부의 요지는 ‘낯선 사람은 안 돼!’였던 것이지, 시험 얘긴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쯤 되니 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선 어떠한 말도, 어떠한 진심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낯설다’는 것을 지금 상황에서 익숙함으로 바꾸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쯤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거기서 1시간 정도를 더 걸어가니 청주 외곽 지역이 나오더라. 높이 치솟은 아파촌에 들어선 거다. 얼마 더 걸으니 찜질방이 보이더라. 시내 근접 지역에선 잘만한 민가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에 찜질방에서 자기로 맘먹었다.
찜질방에 들어가기 전에 저녁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며 주위를 돌아다녔다. 밥을 먹고 싶긴 했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 냉면집으로 들어갔다.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와서인지 냉면이 그렇게 시원하고 달콤할 수가 없었다. 국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더니, 배 속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것 같더라^^
찜질방으로 들어왔다. 이 아늑함이여~ 온 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푹 쉬어야지. 새벽 기도에 대한 부담도 없으니 이것도 나름 괜찮은 걸.
연기에서 청주로 향하는 길은 별로였다. 사람이 걷는 갓길이 너무 비좁아 큰 트럭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날렵하게 길옆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인제군의 공사현장을 지나쳤는데도 여전히 트럭들이 많이 다니더라. ‘트럭’이 ‘4차선 국도’ 못지않은 도보여행의 최악의 적으로 대두되는 순간이었다. 걷는 데 집중할 수 없으니 최악일 수밖에 없었다.
벌써 4월도 마지막이다.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막상 시간을 되돌아보니 여행을 떠나던 19일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하긴 이번 달엔 이사 건, 국토종단 건으로 꽤 바쁜 나날을 보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게 정신이 없어서인지 4월은 그 어느 달과도 비교할 수 없도록 생기 가득한 한 달이기도 했다. 내 맘대로 안 되는 일에 화가 나기도 했고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생각에 행복하기도 했다. 애증병존의 순간들을 몸소 느끼다 보니, 바로 이게 삶이라고 느껴지더라.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그런 걸 다 감내하며 나의 족적을 남기며 나아가는 행복이란, 해본 사람만이 아는 묘한 쾌감이었다. 행복이 별건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그 순간순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겠지. 그것에 나를 맡겨 노닐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극락’일 것이다. 4월은 그 가능성을 활짝 열었던 한 달이었다.
(음료수 2.000원, 냉면 5.000원, 찜질방 6.000원 / 총합 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