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빵 Jan 25. 2017

잠자리 얻기의 버거움

2009년 국토종단 20 -  4월 28일(화)

걸어서 오는 중에 두 통의 전화를 연거푸 받고 오니, 꼭 혼자 걷는 게 아닌 둘이 오순도순 이야기를 하며 걷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혼자서 느껴지는 오만가지 감정을 맘껏 느끼고 싶어서 떠난 여행이지만, 막상 전화를 받으니 가슴 속엔 순풍이 불어오더라. 역시 사람은 혼자 있을 땐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하고, 둘이 있을 땐 혼자 있고 싶어 하나 보다.                



▲ 도보여행 중 처음으로 부탁을 하여 잠자리를 얻어보려 한다. 과연 될까?




최초의 도전잠자리 얻기

          

적당히 걸어서 도착한 마을은 ‘경천 1리’였다. 그 때 시간은 오후 4시였는데 이른 시간이긴 해도, 이쯤에서 멈추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여태껏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잠자리 얻기’를 해볼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런 규모의 마을이면 분명히 마을회관이 있을 것이니, 거기서 잘 수 있는지 물어보려 한다. 여태까진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는데, 오늘은 시간도 많이 남고 어느 정도 도보여행도 익숙해졌으니 맞닥뜨려보려는 것이다. 

조금 걸으니 도로가에 마을회관이 보이더라. 지금까진 돈을 내고 자던지,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자던지 쉽게 잠자리를 얻었다. 그만큼 편하게 여행을 했었는데, 이제야 이 여행을 떠날 때 맘먹었던 도전 정신을 불살라 보려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심장은 쿵쾅거리며 엄청나게 뛰더라. 막상 노크를 하려 문 쪽으로 다가가 보지만 의식이 가로막아 자꾸 머뭇거리게 된다. 그럼에도 몸은 벌써 움직여 문을 노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행동은 훨씬 빨랐고 의식의 주저함보다 무의식의 과단성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안에서 사람이 있는 소리는 들리는데 아무런 대꾸가 없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몇 분의 할머니들이 계시더라. 낯선 사람의 방문에 할머니들이 잔뜩 긴장하는 게 느껴졌지만, 이렇게 된 이상 나 또한 긴장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주 태연하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난 후에 “마을회관에서 제가 하룻밤 자고 갈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던 것이다. 당연히 다짜고짜 그렇게 물을 수 있었던 데엔 ‘할머니들은 인정이 있기에 설마 잘 곳도 없는 사람을 쫓아내기야 하겠어’라는 기대감이 깔려 있었다.                



▲ 오늘의 도전목표는 마을회관에서 자보기이다. 과연 될까?




마을회관에서 자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과연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할머니들이 ‘뭐 그런 걸 다 걱정해. 여긴 그저 편하게 왔다가 맘껏 머물다 가도 되는 곳이야. 그러니 오늘 저녁에 여기서 자고 내일 출발해’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해줄 것을 기대하며, 할머니들의 표정을 봤는데 그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시더라. 내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말을 자르시며, 각자의 말들을 하셨기 때문이다. 난처한 표정만 짓는 할머니, 딴 데로 가보라며 이야기를 하시는 할머니, 마을회관 사용은 노인회 회장의 승인이 필요하니 허락을 맡고 와야 한다는 할머니 등, 내 생각과는 매우 다른 전개를 보여줬다. 

상황이 이렇게 흘렀다면 더 이상 할머니들에게 읍소를 한들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리나케 거기서 나와 회장님을 찾아 나섰다. 처음엔 그게 이장님을 말하는 건 줄 알고 이장님댁에 찾아갔다. 다행히도 집에 계셔서 차근차근 내 사정을 이야기하니, 알았다고 하시며 “그런데 그건 회장에게 승낙을 받아야 해요”라고 일러주더라. 그 말은 곧 회장님과 이장님은 다르다는 얘기였고, 지금 이순간은 허탕을 쳤다는 얘기였다. 언제나 깨달음은 뒤늦게야 온다~

그래서 이장님에게 회장님 댁이 어딘지를 물어 찾아갔다. 집 앞에서 “회장님 계세요?”라고 여러 번을 외치니, 젊으신 분이 나오시더라. 그러더니 지금 회장님은 놀러 나가셔서 밤늦게야 들어오신다는 비보를 전해주신다. 거기에 덧붙여 보통은 허락해주지 않는다고 쐐기를 박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된 이상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회장님이 오실 때까지 끈덕지게 기다려서 허락을 받는 방법이다. 그러나 여긴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회장님이 언제 올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고, 막상 만난다 할지라도 자라고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근처엔 초등학교와 교회까지 여러 시설들이 있으니, 그곳에 말을 해서 자는 방법이다. 이건 그래도 나름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서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셋째는 여기서 버스를 타고 공주 시내로 들어가 찜질방에서 자는 방법이다. 이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둬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모든 가능성이 다 닫혔을 때 그때에 해도 늦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45분 정도를 기다렸나 보다. 조금씩 어두워지며 그에 따라 추워지고 있었다. 이로써 첫 번째 가능성은 멀어졌다는 생각을 하며 두 번째 가능성을 시험해봐야 했다. 그래서 교회와 학교가 있는 곳으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교회에는 사택이라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학교엔 숙직실이 없는 것이었다.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서서히 몰리고 절망감이 감돌았다. 이렇게까지 몰린 이상 세 번째 방법 밖에 없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았는지 나는 다시 회장님댁 근처로 돌아왔다.                



▲ 경천리에 걸어올 때만해도 한껏 여유를 부리며 즐거웠었는데, 지금은 삶의 낭떠러지에 몰린 느낌이다.




노숙할 각오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버티기

     

아까 전만 해도 그래도 이런 저런 방법들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작정 기다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1시간 45분을 기다렸는데도 오시지 않더라. 이미 해는 졌고 바람까지 불어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게 만들었다.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란 아마도 그런 걸 말하는 걸 터다. 내가 앉은 곳은 마을회관이 있는 공터에 만들어진 의자였다. 그곳에서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이미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곳곳의 집들이 보인다. 그러나 그 많은 집들 중에 내 한 몸 누일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게만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방법을 실행해봐야 하는 건가? 그러기엔 잠시 망설여졌다. 공주로 나갈 경우 다시 여기로 들어와야 하는 게 번거롭기도 했고, 도보여행 중에 웬만하면 차를 타지 않겠다는 다짐도 깨야했으며, 이 상황에 제대로 맞닥뜨려봐야 하는데 그건 좀 편하겠다고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치졸함으로도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껏 극한의 상황이든, 슬픈 감정이든, 견뎌내야 하는 아픔이든 적극적으로 경험하고 느껴보려 하기보다 대충대충 편한 방법들을 찾으려고만 했었다. 최대한 그걸 느끼지 않는 방법을 찾아 도망 다니기에만 바빴던 것이다. 



▲ 직면하거나 제대로 느껴보려 하기 전에 도망 가기에만 바빴다.



그러나 그렇게만 살다 보니 내 인생은 참으로 비루하고 설렁설렁 사는 인생이었다. 그런 나였기 때문에 이번 주의 여행 컨셉을 정하며 ‘치대기 & 민폐 끼치기’로 정했던 것이고, 그러려면 ‘예기치 않은 상황, 밑도 끝도 없이 일어나는 상황’에 몸을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최상의 순간이지 않을까.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이상 갈 데까지 가보자’라는 생각으로 버텨보고 이 순간에 최대한 몰입하기로 했다. 솔직히 많이 두렵고 떨리며 긴장되지만 어쩌겠는가, 아무리 극한의 상황에 몰린다고 해봤자 여기서 노숙하는 일 밖에 더 있겠는가. 그건 이미 군대에서도 경험해봤으니,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슈퍼 앞에 그렇게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7시 20분이 넘어가니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없더라. 금방 전까지의 호기로움은 완전히 사라졌고 스스로의 만용을 탓하며 온갖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지금 서러움과 외로움에 사로잡혀 서서히 땅으로 꺼져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비극을 혼자서만 감당하고, 모든 절망을 혼자서만 짊어진 양 힘들어 하고 있었다. 바람은 점점 칼날처럼 매서워지고 있었고 어둠은 한층 더 짙어져 나를 한없이 짓누르며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다. 



▲ 왼쪽에 보이는 의자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해는 서서히 저물어 가고 내 한 몸 갈 곳이 없는 그 와중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